brunch

#38번째 시작

시작은 늘 서툴다.

by SseuN 쓴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많은 수식어 중에서 좋아하는 걸 꼽는다면 나는 단연 '세계 여행자'라는 타이틀은 제일 좋아한다. 단어가 좀 멋있어 보인달까? 세계 여행자는 만화에 나오는 모험가 같은 이름같이 들린다. 나의 여행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외출이었다. 물론 시간적 여유도 금전적인 여유도 없어 진짜 세계의 모든 나라를 여행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서른이 넘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을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만약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만 있다면 여행 이야기는 밤을 새워해도 모자랄 정도 많다. 버스 여행 중에 당한 강도 이야기. 소금사막에 깔린 얕은 물 위에 반영된 하늘의 색. 과거를 여행하는 듯했던 쿠바 거리의 모습들까지 이야기를 하자면 한참을 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자동차 뒷자리에 놓아둔 사진이 햇볕에 바래듯. 시간은 감정의 기억을 바라게 만들어 버렸다. 시간이 흐르자 여행의 떨림이나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시들해졌고, 주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여행 이야기의 쉽게 대화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만나는 사람은 내 주변에 늘 있었던 사람들이니 결국 유한한 청자에게는 "라떼는 말이야~"로 들리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즐거웠고 소중했던 경험이자, 나에겐 인생 최고의 여행 추억은 머릿속 기억의 방 한쪽을 차지하며 다락방이나 창고방에 들어가게 될 상자에 담긴 소중해서 버릴 수 없는 애물단지처럼 되어 버렸다.


나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론사 광고 팀에서 일하던 친구로부터 우리나라에서 큰 포털사이트에서 연제를 하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게 된 것이었다. 내 평생에 한 번도 꾸준한 적이 없었던 내가 여행하면서 유일하게 매일 했던 일은 바로 블로그 쓰기였다. 그 친구는 그걸 보고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이 볼 수 있게 글로 써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연재의 조건이라 생각보다 준비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세이브 원고도 필요했고, 주제의 연관성이 맞는지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급하게 여행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드디어 나는 먼지가 쌓이기 전에 상자를 꺼내 올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얼마 안 가서 다른 준비된 사람에게 돌아갔다. 내가 연재할 글을 고민하고, 주제를 정하고 글을 시작하는 게 처음이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이다. 겨우 블로그를 일기장처럼 하고 싶은 이야기나 쓰고, 사진을 찍어 감성적인 몇 자 적어 놓았던 글쓰기가. 불특정 다수에게 읽히는 글로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일정이 있었고, 계획이라는 게 있었으니 그걸 맞추는 데는 가랑이가 찢어지듯 달려도 될 뱁새는 쫒아가기 힘들었다. 어설픈 준비에 정말 일생일대의 기회를 날려버리게 되었다.


핑계를 하자면 글쓰기 초보에게는 모든 게 낯설게만 느껴지는 일이었다. 가르쳐주는 이 하나 없이 준비를 하려다 보니 어설프게 막아둔 둑이 터지 듯이 여기저기 막지 못하는 일이 터져 나왔다. 이곳을 막으면 저곳이 터지고 저곳을 막으면 또 다른 곳이 터지면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어 버렸다. 한동안 키보드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워낙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얻어지는 결과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후련하기도 했다. 여우가 신포도를 보듯이 저 일은 나에게 맞는 옷이 아니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리고 머릿속에 어지럽게 펼친 수많은 여행 이야기를 다시 상자에 넣어 버렸다. 마치 다시 꺼 낼 수 없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마음 한 곳에는 미련이 남아 자꾸 손이 가지만 막상 다시 열어 볼 자신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 어쩌면 글을 쓰는 것이 자신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 아는 것을 말하는 것과 글을 써서 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나름 말은 잘한다고 생각했고, 글은 특별한 몇 사람의 능력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엔 늘 두려움이 앞섰다. 그래서 새롭게 글 쓰는 플랫폼을 바꾸었다. 내가 쓰는 글을 사람들이 읽어주고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말이다. 그래도 첫 시도는 좋았다. 한 번의 신청으로 작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처음 하는 글쓰기로 조회수 50이 넘는 글을 썼다. 그게 나에게 좋은 시작이 되면 좋았을 텐데. 다음 글을 쓰기 쉽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었다. 해보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연제를 준비할 때처럼 큰 벽 앞에 서있는 느낌도 들었다. 무엇인가 대책이 필요했다. 고민하다가 며칠 전 글을 잘 쓰는 국어 선생님인 친구를 만나 나의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는 진심 어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친구가 해준 “글이 재미있다”는 칭찬에 오늘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한다. 나의 USB(저장 메모리)에 담긴 오래된 버전의 글을 모두 컴퓨터 폴더에 넣어두고 새로운 창을 열었다. 드디어 38번째 새로운 창을 열었다. 파일 이름을 '_수정'이라고 한 것만 20개가 넘는다. '_최종'이라고 한 것만 10개가 넘는다. 이런저런 공모전에 내기 위해 쓴 글도 많이 보인다. 전부 실패한 경험들이었다.


이제는 친구의 이야기처럼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번 #38번 째 시작을 쓰면서 늘 어렵게만 느껴진 이야기를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조금은 어설프다 해도 남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보는 것, 바로 그것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이번 공모가 어쩌면 나의 글쓰기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좋은 시작이 되는 것 같다. 글을 쓰고 발표를 기다려야 하지만 글쓰기는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잠시의 시간이라도 주어지게 된다면 써볼 것 같다. 다시금 기억의 상자를 꺼내와서 펼칠 수 있게. 밤새도록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