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여행은 없다.
새벽같이 일어났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시간이다.
모두가 자고 있는 이른 아침이라 살짝이 문을 열고 나오려 했다. 하지만 손님보다 부지런한 주인 분들이 일어나셔서 인사를 해주셨고, 아침을 조금 일찍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서 역까지 가는 거리가 얼마 멀지 않아 걸어가기로 했지만 막상 출발을 하고 나니, 가방을 메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택시를 예약하지도 않았고, 버스 노선도 모르기 때문에 제일 빠른 방법으로 선택할 수 있는 보기가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방에 온 짐을 넣고 다니는 나는 늘 어깨가 무거웠다. 여행자의 가방은 마치 삶의 미련과도 같은 것이다. 내가 들고 다니는 것 중에 10% 정도 사용할까 말까 하지만, 혹시나 모른다는 생각에 들고 다니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바라 꼬아에서 짐을 덜어 놓고 올 수 있었던 터라 조금의 무게는 가벼워졌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무게가 있어 별화의 폴이 크지 않았다.
앞장서서 가고 있는 형의 뒤를 따라가면서 사진기의 뷰파인더로 보이는 풍경을 담으며 전진했다.
어스름한 거리의 풍경은 살짝 스산한 것 같기도 하면서, 자세히 보면 포근하기도 한 느낌이다. 사진으로 설명할 수 없는 피부에 닿는 감촉이 있는데. 그 느낌이 따뜻한 것이다.
우선 공기의 온도가 낮지 않았고, 바람이 없었다. 물론 사람들도 없었지만 떠오르는 태양이 있었다. 대지의 표면은 달궈질 준비가 끝났고, 그 시간에 맞춰 가로등은 꺼질 준비를 마쳤다. 온기가 감도는 시간이라고 해야 하나? 마치 곧 뜨거워질 것을 예비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바람 한점 없지만 해가 없는 틈을 타서 걷기 때문에. 덥지는 않았다. 혹시 몰라 긴팔을 입고 나선 게 계절감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것만 빼면 다 좋았다.
역에 점점 가까워 지자 해는 더 떠올랐고 주변은 그 빛에 맞추어 서서히 밝아온다. 이제는 앞에 가는 스탠리도 보이고 건물에 현수막도 보이기 시작했다.
밝아지니 늦은 것 같아 더 서두르기 위해 주머니에 든 어제 산 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가방을 고쳐 메며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이상하게 역에만 서면 기분이 좋다. 공항에서 드는 느낌이랑 비슷한 것 같다. 어디론가 떠나는 길 위에 있다는 것과 그 종착지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 닮았다.
하지만 기차는 비행기보다는 느리다는 장점이 있다. 기차는 서서히 변하는 풍경과 자유롭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비행기는 좁은 의자에 경직되어 앉아 있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기차는 무작위로 선물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기 전의 마음과 같다. 운이 좋으면 아주 좋은 풍경을 마주 할 수 있다. 하지만 쉽게 그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 같은 여행자는 모든 길이 초행길이다. 내가 가본 적이 없는 그 미지의 풍경은 좋을 수도 있고 혹은 안 좋을 수도 있다.
그러니 기다려질 수밖에 없다. 기차가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답 승구를 빠져나가면 도시 간의 이동으로 바뀌는 풍경이 시작된다. 어쩌면 내 여행의 모슨 순간이 알지 못하는 연속의 무작위의 순간들로 채워진다.
기차는 다행스럽게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아라비아 숫자로 적힌 좌석 번호를 표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표 한 장 들고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어느 쪽이 앞인지 뒤인지 구분이 없는 열차 안에서는 표들 들고 양쪽으로 고개를 돌려 봐야 오른쪽으로 번호가 커지는지 왼쪽으로 번호가 커지는지 알 수 있다.
숫자가 작아지는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니 우리 자리가 나왔다. 버스 의자처럼 꺼진 쿠션 의자에 엉덩이를 넣으니 삐그덕거리는 의자에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허리가 과하게 꺾여 들어가는 게 영 느낌이 좋지 않다. 이대로 허리가 접힌 상태로 몇 시간을 간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지만, 선택한 여행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자세를 고치고 앉았다.
그나마 쿠바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기차뿐이다. 겉은 낡고 부서질 듯해 보이지만 뜨거운 바람을 가르며 꾸준하게 달리고 있다.
기차에 올라 얼마 동안은 기분이 좋았다. 열차는 규칙적이며 정확하기 때문이다. 역에서 역으로 가는 길은 변수가 없고 정해진 선로를 달린다. 마주오는 기차는 없고, 뒤를 따라붙는 기차도 없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교통수단으로 꼽는 기차는 중간역에서 내린다면 모르겠지만 출발역에서 종착역으로 달리는 기차는 아무런 염려도 없이 잠을 청해도 되는 경우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산타 클라라가 종착역이 아니기 때문에 소요되는 시간에 맞춰 일어나야만 하는 단점이 있긴 했다.
기차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역과 마을을 지난다. 기차는 약속한 시간에 지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기차가 보이면 자주 인사를 해주는 편이다.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열차칸 사이에 문이 없어 칸과 칸 사이를 지나면서도 아찔한 느낌이 드는 열차라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지만 그래도 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기차에서는 항상 정직한 '축국축국 축국축국' 이라는 소리는 내고 있다.
얼마나 달렸을까?
반가운 검표인이 다가왔다. 하얀 안경을 콧등 위에 올려 마치 우리 할머니가 돋보기를 끼고 계시 듯한 모습을 한 직원분이 다가왔다. 우리의 표를 내어주고, 여권도 같이 내밀었다. 열차는 우리가 가는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 검표하는 분이 웃으며 표를 건네주었다. 숙제를 다 했음에도 선생님께서 검사를 하실 때면 긴장하게 되는 것처럼 표를 제 값 내고 샀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떨렸던 건 사실이다.
우리 칸의 사람들이 거의 검표를 마칠 쯤이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일어나면서 어슬렁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혹시나 해서 우리의 가방을 우리 자리 앞으로 내려서 모아 두었다. 번갈아 가며 우리 둘은 화장실을 다녀왔고, 가 보고 싶은 곳이 몇 곳이 있어 기차 앞, 뒤칸으로 다녔다.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족들이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직육면체 안에 앉아있다.
우리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열차는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서 쉴 새 없이 달리고 있고, 사람들은 서로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정을 보내고 있다.
형이 화장실을 다녀오는 순간 간식 트레이가 우리 자리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 기차와 닮았다. 사실 기차를 타 번 거의 모든 나라는 간식 파는 트레이가 지나간다. 여행의 별미가 바로 기차 안에서 먹는 간식이 아닐까 싶다. 긴 여정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간식이다.
대학교를 다니는 때에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오던 때가 되면 무궁화 열차의 느린 풍경과 함께 간식 아저씨가 지나다니셨다. 술을 먹고 탄 날에는 시원한 음료를 사 먹기도 했고, 지각을 해서 기차를 타고 가는 날에는 배가 고파서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사 먹기도 했다.
그때보다 더 어렸을 때에는 맥주도 팔았던 것 같았는데. 진짜 팔았던 건지 아님 누가 사 들고 탄 거를 본 기억인지 온전하지는 않다. 어쨌든 우리는 아침 일찍 역에 도착하면서 기차에 올랐기 때문에 금방 배가 고팠다. 그래서 파는 음식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많이 사 먹는 음식들과 맥주 한 캔을 샀다.
제법 간식을 많이 사게 되긴 했지만, 가격은 저렴했다. 둘이서 먹을 양이라 생각하고 넉넉하게 사 모은 간식을 이 기차 선반 위에 올려다보니 제법 많아 보인다. 뭐가 맛있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먹을 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간식 아저씨가 지나가면 언제 또다시 지나 갈지 모르는 상황이라 넉넉히 사두니 기분이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거의 반나절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해는 어느덧 넘어가는 중이며, 바람은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가 완전히 넘어가 어두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저녁이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갑자기
"두두둥 쿵"
하며 기치가 무엇인가에 부딪혀 나는 소리 같은 게 들린다. 그러더니 별안간 기차가 선로 위에 서 버렸다.
나름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멈춘 기차를 타고 있으니 세상에는 안전한 수단이 없다는 실망감까지 들었다. 기차가 멈춰버린 상황이야 여행을 하다 보면 한 번씩 경험하게 되는 일이지만, 또 한 번 고된 시간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기차에 탄 모두는 밖으로 내려와 무슨 일인가 살피긴 했지만 상황에 익숙한 사람들인지 전혀 흔들리는 모습이 없다. 기차는 마을을 얼마 앞두고서는 서버렸다.
기차가 서 버리자 기분도 가라앉아 버렸다.
'그럼 그렇지. 내 여행이 이렇게 순탄하게 지나갈 리가 없지'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기차가 서서 움직이지를 못하니, 일단 밖으로 나왔다. 누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간에 도착을 해야 하는 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철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기차가 멈춰 선 것이 사고나 충돌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장에 의해서 그런 것이라 차분했다. 오래된 기차를 쓰는 나라에서는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언제 기차가 고쳐 질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정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같이 타는 것이 아니라 고장이 나면 정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도시에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일단 사람들이 내린 자리를 먼저 찾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길게 누워 기다리겠다는 사람도 보인다. 웬만하면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편이지만 아닌 사람들이 눈에 더 띈다.
얼마를 더 있어야 하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화에서 금방 하늘이 어두워졌다. 금세 비라도 내릴 것 같았는데, 정말 얼마 안 가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마치 영화에서 내리는 것처럼 우리 기차 위에만 내리는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트리니다드로 가는 날처럼 창문을 닫았지만 비가 새어 들어왔다.
비가 내리는 중에는 밖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 들어와 의자에 앉아 내리를 비를 보며 음악을 들었다.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주어졌다.
공간을 채우는 빗소리와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악이 섞여 상상으로만 느끼던 그런 풍경이 그려졌다. 무심결에 느끼는 타국에서의 이국적인 감정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분명 외국이지만 익숙함에 외국임을 망각하고 지낼 때가 많이 있다. 이런 뜻 밖에 시간에 낯선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비가 그쳤다. 접혔던 허리를 다시금 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공기가 아까와는 다르게 차가워졌다. 조도 또한 낮아졌다. 금방 어두워진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도 수리가 안 되는 거 보니 결국 기찻길 위에서 밤을 보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우선 가방에서 밤 추위를 이겨낼 만한 옷을 찾아 꺼내 놨다. 평소 짐만 같았던 겉 옷 하나가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줄 몰랐다.
그날의 밤은 길었다. 추위도 더했다. 사람들은 창문을 모두 닫고 있었지만 어디에서 들어오는지도 모르는 차가운 바람에 몸은 조금씩 더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이른 저녁부터 멈춘 기차는 한참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우리도 떠날 수 없었다. 인터넷 연결이 없어도 확인할 수 있는 지도에서는 아직 가야 할 길이 한참 남았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지붕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차가워진 레일 위의 기차에서 깊이도 잠들 수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의지해 번갈아 가면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밖이 소란하면 괜히 치안이 걱정되면서 들고 있던 핸드폰과 지갑, 그리고 여권을 슬며시 한쪽 구석으로 밀어 넣기도 했다.
슬며시 동이 터오는 태양에 주변이 밝아지면서 긴장된 밤이 지났다.
온몸이 피곤했다. 의자에서 어설프게 눈을 감았던 지난밤이 고되기만 했다. 다행히 동이 트기 직전 기차가 움직이지 시작하면서 슬슬 기차가 움직이기도 했다.
새벽부터 달린 기차가 오전 9시가 될 무렵에서야 우리의 목적지인 산타클라라에 도착했다. 이미 지나가 버린 도착 시간이라 역 앞에서 호객꾼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적당한 시간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의 숙소를 소개하곤 했는데, 몸이 천근 만근이 된 날은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우린 숙소를 찾아 나서기 위해 역 밖으로 나와야 했다.
여행은 목적지의 도착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겪게 되는 모든 순간이 여행이 되는 것이다. 길 위에서 보낸 그 시간이 산타클라라 여행의 시작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앞으로 방을 구해야 하는 일이 남았지만 이 또한 여행이라 생각하며 역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