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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번역가 Oct 05. 2023

제3년

2015년은 내게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해였다. 영화 「리플리」에서 선박 부호 허버트 그린리프의 부탁으로 그의 망나니 아들 디키 그린리프를 데리러 가는 날 아침에 톰 리플리는 자신을 태우러 온 리무진 운전사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장담컨대, 그린리프라는 성이 많은 문을 열어줄 거요.” 그 이름 뒤에 숨지 않았다면 말 한 번 걸기 어려웠을 사교계 여성 메러디스 로그의 사랑까지 받았으니 그린리프라는 성이 리플리에게 여러 문을 열어준 것은 사실이었다. 나의 그린리프는 D사였다. 영한 번역가로 전향한 뒤로 체계가 잘 잡혀 있어 보이는 번역회사들에 프리랜서 등록을 신청해 두었었다. 내가 신청을 했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시점에 D사로부터 프리랜서 등록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는 몇몇 회사들과 이미 거래하고 있던 터라 ‘정말 오래 걸리네’ 하고는 별 기대 없이 거래를 시작했다. 이 회사의 가장 맘에 드는 점은 자동 이메일로 일감 공지가 뜨면 의뢰 내용을 확인한 뒤 수락 여부를 결정하면 되는 자동 시스템이었다. 일단 등록 절차를 마치고 나니,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일감 공지가 떴다. 자세히 보니 공지의 발신 이메일 주소가 세 개였고, 공지마다 담당 PM이 다 달랐다. 다른 회사들은 함께 일하는 PM이 보통 두세 명인데 여기는 도대체 몇 명인가 싶어 D사를 구글링 하고서는 깜짝 놀랐다. 당시 기준으로 전 세계에 100여 개의 사무소를 두고 있는 업계 1위 회사였던 거다. 절박함에 두드린 여러 개의 문 가운데 한 개가 열렸는데, 알고 보니 그 문은 수십 개의 문으로 가는 통로였던 셈이었다. 어쩐지 일감이 많다 싶었고, 건당 물량도 꽤 컸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소화불량에 우울증까지 왔던 내게 드디어 이런 기회가 오다니 뛸 듯이 기뻤다.


전공 분야를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의 문화에 따라 내가 프리랜서로 등록된 분야는 정보, 통신, 기술이었다. 대학원 전공이 도움이 되었다. 전공 덕분에 영주권도 수월하게 받았는데, 번역 업계에도 발을 들여놓게 해 주었으니 내 인생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D사와 거래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게는 조금 생소한 분야의 일이 들어왔다. 미국의 대표적인 군수업체 E사가 클라이언트였다. 한국의 특별한 상황상 한국은 E사의 큰 고객일 터였고, 당연히 한국어로 번역할 문서도 많았을 것이다. 내가 들어오는 일감을 마다할 입장은 아니라는 판단에 덥석 수락하기는 했으나 내용이 어려웠다. 군대의 군 자도 모르는 내게는 너무 생소한 분야라 국방과학기술용어사전을 뒤지며 열심히 하기는 했다만 잘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을 마감하고 난 뒤 얼마 지나서 D사의 PM이 연락이 왔다. 클라이언트가 내 번역을 맘에 들어했고, 후속 번역도 내게 맡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거래하는 업체에서 꾸준히 일을 맡길 때는 품질에 불만이 없다는 암묵적인 의사 표시도 될 것이다. 꾸준히 거래하는 업체들이 몇몇 있었지만, ‘내 번역이 맘에 들었다’라는 피드백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자신 없던 내게는 대단한 힘을 지닌 치유의 말이었다. 영한으로 번역 방향을 바꾸고 나서 맘고생을 꽤 심하게 했다. 거절의 경험이 쌓이면서 내가 영한 번역가로 자리 잡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내게는 꾸준한 물량과 유명 클라이언트들이 필요했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D사와 거래하면서 그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국에 살다가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언제나 내 나라에 왔다는 편안함이 있다.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도 그랬다. 한영 번역에서는 도착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부담감과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벗어나기 힘들었던 표현력의 한계에 갇혀 있다는 자괴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영한 번역은 편안한 마음으로 단어들을 조합하고, 문장 배열을 이리저리 바꿔보며,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게다가 간간이 생각지도 못한 표현이 난데없이 떠오를 때면 묘한 쾌감마저 일었다. 무엇보다 한영 번역에서는 그려지지 않던 미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미래는 몇 년이 흐른 뒤 현실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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