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느 번역가 Oct 04. 2023

제2년

2박 3일의 장기 운전이 동반되는 이사였다. 쓰던 가구를 다 팔고 필요한 짐만 차에 싣고 떠나 도착한 그 도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가까이에 자연, 쇼핑, 한인 마트와 식당을 두루두루 즐길 수 있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뉴욕이 가까웠다. 뉴욕은 나를 비롯해 전 세계 여성들을 열광시킨 「섹스 앤 더 시티」의 도시였다. 나는 이사 온 직후부터 뉴욕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그 화려한 칼럼니스트가 살던 집과 거닐던 거리와 공원, 즐기던 컵케이크 가게, 구두를 신어보던 백화점 등 한 번 나가면 저녁까지 쏘다녔다. 굳이 노트북을 가지고 나가서 감각적인 카페를 찾아 뉴요커들 틈에서 일하기도 했다. 사무실 데스크에 앉아 있을 시간에 뉴욕의 카페에서 일하는 가슴 벅찬 경험이라니. 프리랜서의 시작은 꽤 괜찮았다.


아담한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우리 집 창가에 오롯이 앉아 일하는 시간도 뉴욕의 카페에서와는 또 다른 즐거움과 평화로움이 있었다. 남편이 출근하면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 주어졌고, 온전히 내 것인 그 시간이 주는 만족감에 의욕이 불타올랐다. 퇴사 전부터 거래하던 B사의 일감을 이제는 가리지 않고 수락했다. 애초에 번역을 시작할 때 내가 영한보다는 한영 번역에 더 경쟁력이 있겠다는 판단과 한영 번역의 요율이 더 나아 B사에도 한영 번역가로 등록했다. 일감은 주로 이공계 연구 논문들이었다. B사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데다가 일감도 꾸준해서 일하기 좋은 클라이언트였다. 그런데 일감이 많아지면서부터 문제가 보였다. 논문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수준의 형식과 논리를 찾아볼 수 없는 논문이 수두룩하다는 것이었다. 원래 잘 쓴 글은 번역하기 쉬운 법인데, 그 논문들은 번역가인 내가 논리적 흐름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좋은 번역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원문을 이해하려 애쓰는 고통이 견갑골 통증으로 나타나 난생처음으로 침을 맞으러 다녀야 했다.


 마흔이 되기까지 맹장 수술을 제외하면 병원 신세를 진 적이 거의 없어서 누구에게는 사소한 건강 문제일지 몰라도 내게는 일 때문에 한의원을 들락거린 것이 이 일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30년은 더 해야 할 텐데 시작부터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면 과면 지속 가능한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논문들을 접해야 하는 고충은 다른 클라이언트들을 개발해 옮겨가면 해결될 것이었다. 사실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영어가 내 모국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영으로 번역하노라면 눈에 뭔가 뿌연 것이 낀 듯 답답하고 개운치가 않았다. 내 한영 번역에는 미국에서 무수히 접해온 시사주간지, 신문, 소설, 교과서 등에서 쉽게 보이는 선명함과 적확함이 없었다.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신체적 통증보다 더 버거운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번역가로서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질 텐데 새롭게 클라이언트들을 개발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성공적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영어로 번역한다는 자부심은 어쩌나? 이런 고민들에 집중하면서 B사의 일을 수락하는 횟수가 줄다가 급기야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수락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좀 지나니 온라인으로만 소통했던 B사가 한국 오피스를 통해 전화를 걸어왔다. 더 이상 일을 받지 않는 이유를 밝히자 ‘당신 번역에 아무 문제없다’, ‘당신의 번역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번역가도 잘 자리를 잡아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다’ 등의 말로 계속 함께 일하자고 설득했다. 국제전화까지 걸어와서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로 설득하니 마음이 동했다. 그 설득에 넘어가 계속 거래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영 번역 실력이 향상되면서 자신감을 조금 회복했을지라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데서 오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나 스스로를 옥죄며 내내 괴로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한으로 바꾸는 일이 번거로웠지만 한번 해보자 싶었다. 미국 최대 번역 플랫폼인 C사에 프로필을 만들어 두고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플랫폼에 올라오는 프로젝트들에 참여 의사를 밝히고 번역회사들의 웹사이트에 가서 프리랜서 등록도 했다. 단발성 작업들을 하기는 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몇 개월이 흘렀다. 영한 번역이 자리를 잡기 전에 B사와 거래를 중단한 게 섣부른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고는 했던 어느 날 저녁,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그 참사의 생중계를 지켜봤다. 멀리서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거기에 몰두했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여름을 보내야만 했다. 내 커리어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수나 다름없던 가을 무렵부터 난생처음으로 소화불량과 훗날 생각해 보니 당시 앓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정오가 지나도 침대 밖으로 나오기가 힘들었다. 음식을 먹으면 명치쯤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직장에서 받던 연봉의 반을 버는 일도 소원해 보였는데도 원래 받던 월급 정도는 벌어야 한다는 생각과 내가 이 땅에서 고생한 세월이 얼만데 하는 아집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기분으로 연말을 맞았다.

이전 02화 제1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