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잡지에서 본 번역가란 직업이 왜 맘에 들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고요하나 지루하지 않은 번역의 특성 때문인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책상 앞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는 내게 책상에 노트북을 한 대 놓고 한국어에서 영어 혹은 그 반대로 옮기며 돈을 버는 일이 안 맞을 리가 없었다. 키보드의 타닥타닥 소리에 채워지는 화면과 머릿속 잡념을 밀어내는 무수한 단어, 간간이 끼어드는 감탄이나 짜증이 있는 그 시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장인이라면, 직장은 조용히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버거운 사내 정치, 편애, 부당, 차별 따위가 난무하는 곳이란 사실에 대개 동의할 것이다. 내 업무만 잘하면 그만이었다면 나는 취직을 한 이상 거기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일단 결정하면 잘 바꾸지 않는 성격인 데다가, 프리랜서는 누리기 쉽지 않은 일정한 수입, 훌륭한 건강보험, 쾌적한 사무실, 왠지 남의 돈으로 여행을 가는 것만 같은 출장길, 남이 차려주는 점심 등 찾아보면 장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편애와 괴롭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새 상사의 등장으로 나는 구체적으로 프리랜서 생활을 꿈꾸기 시작했다.
계획은 이랬다. 작은 집을 사서 세를 준 다음에 퇴사하고는 스페인에서 1년을 살아보는 것이었다. 직장생활 중에도 퇴근 후나 주말에 이따금 번역 일을 했던 터라 퇴사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받으면 넉넉하지는 않아도 생활은 가능해 보였다. 비록 대출을 껴야 하지만 집을 사려 했던 건 외국에 나가더라도 돌아올 집이 있다면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안정적인 프리랜서를 꿈꿨던 것이다. 10년이 지나고 보니 프리랜서와 안정은 공존하기 어려운 단어들인데 말이다. 팔구십은 거뜬히 사는 요즘이라면 프리랜서로 가늘고 길게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총기가 살아 있고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한 언제까지라도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할수록 깊어지고, 오롯이 내 것이며,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번역 프리랜서라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몇몇 지인은 직장생활이 안 맞으면 왜 관두지 않냐고 했다. 캠퍼스 주차 위반으로 딱지를 수십 개 받아도, 할부금이 수십 개월 남은 새 차를 방치하고 외국으로 떠나버려도 알아서 처리해 주는 부모가 있는 사람들은 내 삶의 무게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했다. 한국을 떠나오면서 내 삶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 문제를 해결해 줄 부모도, 월세가 없으면 들어갈 본가도 없었다. 아직 진로를 확실히 정하지 못했던 유학 2년 차에 나도 IMF 금융위기를 피하지 못했다. 달러가 두 배로 뛰면서 원래도 넉넉히 송금해 줄 형편이 안 되었던 부모님께서 한국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돌아갈 수 없었다. 영어로 맘껏 공부할 수 있는 더 넓은 세계로 온 지 불과 1년 여 만에 이룬 것 하나 없이 돌아간다는 건 실패나 다름없었다. 그러고는 생활고가 시작되었다. 학비와 생활비, 비자 갱신에 필요한 예금 잔고, 고장이 잦은 중고차 수리비 등 끊임없이 돈이 필요했다. 그것을 충당하느라 학기 중에도 전투적인 N잡러가 되어야 했다. 그런 생활고 속에서 따낸 졸업장은 내 인생의 첫 성취가 되어 주었다.
졸업하고 취직을 한 뒤로는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데다가 등록금을 낼 필요도 없으니 날아갈 것 같았다. 좀 더 나은 환경으로 이사하고, 먹고 싶은 것도 사 먹고, 예쁜 옷도 사고, 자동차 대신 비행기 여행을 선택하는 여느 직장인이 누릴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나도 편한 생활에 익숙해졌다. 다달이 통장에 꽂히는 월급은 절대 쉽게 포기되지 않는 요물이 되었다. 씀씀이는 거기에 맞춰졌고, 그보다 적은 돈으로는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비싼 월세와 필수품인 자동차 유지비, 10% 더 내야 하는 이른바 싱글세 따위를 고려하면 멀쩡한 직장을 박차고 나와서 ‘난 프리랜서다’ 하고 외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싶었다. 변명으로 들릴지 몰라도, 졸업 전까지 겪었던 생활고가 트라우마가 되었던지 돈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자유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해 들은 것이 2명, 내가 본 것이 3명 이렇게 총 5명을 퇴사하게 만든 새 상사는 나를 드러나게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거의 무시하면서 나가주었으면 하는 게 느껴졌다. 이전 상사의 신뢰와 관대함에 익숙한 나로서도 퇴사하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올 때가 많았으나 책상을 박차고 나가고 싶을 때마다 친하게 지내던 A 언니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대기업을 다니던 A 언니는 직속 상사와의 마찰 끝에 욱하는 마음으로 퇴사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힘들게 취직한 직장을 상사 때문에 나왔다는 사실이 늘 창피했다면서 사람 때문에 그만두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나도 인간관계에 밀려 나가지는 않겠다는 마음으로 참았다.
내 집을 마련하면 자발적 퇴사를 위한 용기를 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동산 사이트를 검색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와중에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게 되어 스페인 살기는 불발되었으나 프리랜서는 되었다. 원하면 자기 회사의 동부 지점에 소개해주겠다는 거래처가 있었고 내가 직접 일자리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취직한다면 내 인생에 프리랜서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눈 딱 감고 프리랜서가 되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