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가서도 편하게 공부에만 집중할 집안 사정은 아니었지만, 한 번 마음을 먹으니 그 마음이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심리학을 계속 공부할지, 전공을 바꿔 학부부터 다시 시작할지, 곧장 대학원을 지원할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공부하게 된다는 사실이 좋았고, 그 나라의 대학 캠퍼스를 누비게 된다면 어떤 전공이든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영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가서도 흥미가 이어졌다. 하지만 막상 유학을 가려니 크게 부족하다는 생각에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가 3학년 2학기였는데, 영어 시사잡지를 독해하며 문장에 익숙해지고 이해력을 키우려고 했고, 당시 한창 유행이던 수만 단어가 수록된 단어집을 통째로 외웠다. 그런 미련스러운 방법으로 하루에 8~10시간가량 공부했던 것 같다. 거의 도서관에 살다시피 했고, 그게 유난스럽게 보였던지 지나가는 동기들이나 선배들이 간혹 찔러오기도 했다. 미련스럽던 그 시간들 덕분에 서툴렀던 미국 생활을 비교적 수월하게 시작했다.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던 랭귀지 프로그램에서 가장 높은 레벨의 반에 배정되었고, 토플 공부라고는 교재를 사서 초반 몇 장 공부한 게 다였는데도 첫 시도에서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시사잡지 덕분에 영어가 눈에 익어 학과 공부에도 걱정했던 것만큼 쩔쩔매는 일도 없었다.
나는 미국에서도 도서관이 좋았다. 책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들 사이에 놓인 다인용 테이블에 뜨거운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놓고 무슨 책이든 펼쳐 놓으면 비로소 내 자리를 찾은 듯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런데 미국의 대학 도서관은 좀 달랐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고기압의 공기가 짓누르는 긴장과 고요로 뒤덮인 한국의 대학 도서관과는 달리, 미국은 옆 사람의 소음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분위기가 자유로웠다. 그래서 더 좋았지만, 문제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 도서관에 앉아 있노라면 관객이 한 명도 없는 영화관에서 미국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든다는 거였다. 내가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주변인 같았다. 친구들을 사귀면서 고독감이 차츰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그 주변인으로서의 거리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도서관에 앉아 있으니 책 정리 따위의 간단한 일을 하는 외국 학생들이 보였다. 나도 마냥 학업에만 집중할 입장은 아니어서 나름 경쟁률을 뚫고 도서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도서관이란 공간을 좋아하는 데다가 돈도 벌 수 있으니 좋았는데, 아마 가장 좋았던 것은 거기서 사귄 다른 유학생들과 맘껏 떠들 수 있다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서로 영어 실력이 다 고만고만해서 어느 시점이 되니 말하기가 더 이상 늘지 않는 정체기에 봉착했지만, 그들과 함께 떠들었던 그 시간들은 미국 생활에서 영어로 말하기의 두려움을 없애기에는 충분했다.
2001년 여름 방학, 한국 본가에 갔다가 아빠의 암 진단 소식을 들었다. 아빠는 항암 치료를 받던 중에 쓰러져 그 길로 중환자실 신세를 지게 되셨다. 아빠가 쓰러지시고 이삼일쯤 지난밤, 쓸쓸한 기분으로 집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때도 영어 감각은 잃지 말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별로 재밌지도 않은 CNN에 채널을 고정해 두고 있다가 맨해튼의 어느 고층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는 장면을 봤다. 미국의 상징인 뉴욕이 공격당하는 그 장면은 아빠는 중환자실에, 엄마는 보호자 대기실에, 나는 한국의 본가에 있는 상황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9/11 이후로 미국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내 상황도 그에 못지않았다. 미국으로 돌아갈 유학비는커녕 당장 중환자실의 병원비와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에서 단기 과외 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언제라도 미국으로 돌아갈지 모를 과외 선생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상황이 정리되면 미국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던 터라 정식 직장을 구할 생각은 없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가 번역 일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여성 잡지에서 어느 번역가의 기사를 읽고 왠지 작가와도 비슷한 번역가,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영어 번역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온라인으로 몇 군데 신청했더니 두세 곳의 번역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게 번역 일의 시작이었다. 이메일로 일감을 받아 번역해서 다시 이메일로 보내주는 형식이었다. 그러고 보니 20년도 훨씬 전부터 나는 번역하는 디지털 노마드였다.
식물인간처럼 누워계시던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오로지 졸업장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간간이 들어오는 번역 의뢰는 생활에 보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당 아르바이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로가 되어 주었다. 내용이 너무 어려워 쩔쩔매기도 했고 마감을 맞추느라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는 날이 있었어도 번역 일이 재밌었고 영어 실력을 인정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 일이 좋았어도 말 그대로 알바 수준에 그치고 있었고, 졸업 후에 미국에 살려면 영주권을 해주는 정식 직장이 필요했다. 졸업을 한 뒤 당시 급성장하던 핀테크 기업에 운 좋게 취직했지만 취업 비자를 해주지 않아서 취직한 지 1년 여만에 퇴사해야 하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하지만 집에서 놀 팔자는 아니었던지 또 취업이 되었고, 좋은 보스를 만나 비자와 영주권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이 회사에 취직이 된 뒤로는 번역은 거의 잊고 살았다. 체류 신분을 해결하는 일이 급선무였기에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회사에 열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체류 신분을 해결하는 일이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느끼는 성취감이 꽤 만족스러웠으니 말이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세계는 들끓고 있었다. 그 열기 속에서는 3년 차로 접어드는 나도 꽤 유능한 직장인이었다. 내가 손수 개발한 신규 거래처의 담당자들을 대동하고 한국 출장길에 오르기를 여러 번 했다. 수주 한 건에 적게는 몇억, 많게는 수십억에 이르는 큰 거래처들이라 나도 절로 어깨가 으쓱해질 때가 있었고, 이따금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직장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한창 직장생활에 재미를 느끼던 시기에 한국 출장을 갔다가 무령왕릉 박물관에 우연히 들른 적이 있다. 규모가 크지 않고 관람객도 거의 없어 아늑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무령왕과 무령왕비의 장신구가 전시된 전시실을 둘러보다가 금귀걸이, 금제관식 따위의 유물 옆에 유물을 설명하는 짤막한 영어 문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내용인가 하고 읽어 보는데 아니, 내 번역이 아닌가! 번역할 당시 원문이 수백 개의 구로 이뤄져 있던 터라 맥락을 파악하고 한국어로도 생소한 단어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를 찾느라 꽤 애를 먹었던 건이었는데, 여기에 이렇게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니 감개무량했다. 산업 번역은 번역가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서 납기가 이뤄진 뒤에는 애써 내 번역을 찾아보는 등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다소곳이 자리한 내 번역을 발견했을 때의 감동은 내 이름을 건 번역을 하고 싶다는 간절함의 발현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고는 번역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