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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번역가 Oct 08. 2023

제5년

경쟁에 취약한 나는 D사와 거래하면서 조금씩 자신감을 얻고 있었다. 한 번은 네덜란드의 다국적 기업의 프로젝트가 있었다. 프로젝트의 분량이 많아서 번역가들에게 나눠 맡길 거라고 했다. 나눈다고 해도 분량이 꽤 많은 편이라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우선 샘플 형식으로 소량을 번역한 뒤에 추후 진행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좋았다. 한창 경험이 쌓여가던 터라 뭐든 수락하던 때였으니까. 샘플을 마감해서 보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담당 PM에게서 연락이 왔다. 클라이언트가 내 번역을 마음에 들어 했다며 물량을 나누지 않고 프로젝트 전체를 내게 맡기겠다는 거였다. 지금까지 최대 물량으로 남아 있는 그 천만 원짜리 프로젝트는 경쟁에 선뜻 뛰어들지 못하는 내게 큰 프로젝트를 경쟁으로 따냈다는 기쁨과 나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증거가 되어 주었다.


다른 몇몇 회사에도 시도하는 족족 프리랜서로 등록되면서 영한 번역의 커리어는 만족스럽게 안정되어 갔다. 그런데 꼭 이뤄보고 싶은 한국 출판시장을 뚫는 일은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유명하다는 구인/구직 사이트에 프로필을 올리고 어필을 했지만, 출간작이 없으면 거래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반응만 있을 뿐 한국 출판시장은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이런 실정이라도 출판 의뢰가 들어오기는 했는데, 죄다 한영 번역이었다. 모두 2017년에 의뢰를 받아 작업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히면서 나열해 보면, 주식, 종교, 어린이 과학, 예술 따위로 분야도 다양했다. 영한으로 전향한 뒤로는 출간 계획이 없는 한영 번역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내 번역이 책이라는 매체에 담겨 하나씩 쌓여가기를 바랐기 때문에 책 번역 의뢰라면 언어 방향, 분야, 유통 방식 따위를 따지지 않았다. 언제나 마음이 동했다.


책을 번역하고 싶다고 말하면 아마 가장 많이 그리고 먼저 듣는 말이 출판기획을 해보라는 말일 것이다. 즉, 외서를 발굴해서 판권이 살아있는지 확인한 다음에 비슷한 분야를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에 번역기획서를 제출하라는 것이다. 해본 사람은 이 일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움을 경험한다. 좋은 책을 찾는다고 해도 그중에 판권이 살아있을 확률이 높지 않고, 판권이 살아있다고 해도 그 책의 기획서를 받아보고는 출간하겠다는 출판사가 별로 없고, 출판사가 출간을 결정해도 그 번역을 내게 맡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몇 겹의 난관에 봉착해야 하는 일이다. 생업이 있는 사람이 이렇게 가능성이 낮은 일을 꾸준히 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한 번은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해서 출판사에 판권 여부를 확인하니 아직 살아있다, 즉 팔리지 않았으니 한국 에이전시에 연락해 보라고 했다. 한국 에이전시가 다시 한번 판권을 살 수 있다고 확인해 주니 기쁜 마음에 얼른 번역기획서를 작성해서 20여 군데의 출판사에 투고했다. 그중 한 곳에서 관심이 있다며 연락이 왔고, 게다가 내 브런치를 읽고는 그에 관한 출판기획서도 받아보겠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둘 다 불발되었지만, 하도 무응답들이라 내 기획서들이 출판사의 기획 회의에 올려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해야 하는 슬프고도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그 한국 에이전시와 이메일을 주고받던 중에 F 출판사가 한영 번역가를 찾고 있다며 샘플 테스트에 응해볼 생각이 있냐고 물어왔다. 다른 번역가들의 샘플을 몇 번 받아봤는데 맘에 드는 번역을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외국에 수출할 요량으로 출간을 할 계획이며, 일단 책의 1/4을 번역한 뒤에 시장에서 반응이 있으면 나머지를 번역할 거라고 했다. 책이라고 하니 혹해서 일단 샘플에 응했다. 내 번역이 맘에 든다며 계약하자고 했다. 무사히 작업을 마쳤고 좋은 경험을 했다로 끝나는 해피엔딩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전자는 맞고 후자는 아니었다. 한국 시장에 진입하려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원문을 꼼꼼히 따지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다. 여느 일이 그렇듯 내 맘에 꼭 드는 일감을 받기란 어렵다. 다만  ’오호’ 하는 호기심이 일거나 적어도 동의가 되는 원문이라야 일하기가 수월하다. ‘과연’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 원문이 있다. 그 일이 후자에 속했다. 정말 그럴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일었다.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을 만날 때마다 턱턱 막히는 것이 모래 언덕을 걷는 듯 작업이 힘겨웠다. 그 1/4 샘플을 맡은 게 과연 잘한 일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체 번역 의뢰가 들어온다면 그 일을 거절하는 게 맞는 것일까? 아니면 내 안의 까다로움을 잠시 눌러 두고 과연이든, 오호든 기회가 있다면 수락하는 게 맞는 것일까? 이런 고민 자체가 호강에 겨운 것인지 몰라도 프리랜서가 된 이후로 간간이 이런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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