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키건, 다산책방

by 흐르는 강물처럼

맡겨진 소녀

클레어키건, 다산책방





가족에게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했던 한 소녀가 먼 친척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처음으로 받고 인생의 반짝임을 느끼며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격렬하지는 않지만 뭔가 따뜻하고 설레고 아프다.

‘빨간 머리 앤’의 메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도 생각이 났다.

초록지붕에 사는 빨간 머리 앤과는 전혀 다른 위기이긴 하지만.

조건 없이 내어주는 마음과 사랑은 때로는 혈연으로 맺어진 인연보다 부드럽고 따뜻하며 강할 때가 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존하고, 인연은 복잡한 관계로 맺어지고 이어지고 끊어졌다가 다시 연결되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떤 소녀가 말하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관찰자가 되어 물끄러미 옆으로 비껴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정말 짧은 소설이지만, 여운은 참 길게 느껴졌다.

독서록 작성과 정리를 위해 오늘 다시 훑어서 넘겨 보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장면들이 의미를 담은 복선으로 이어졌던 것임을 뒤늦게 발견하였다.

짧게 씌었다고 해서 쉽게 쓰인 소설은 아니구나 싶다.


이 작품은 영화 '말없는 소녀'의 원작 소설인데 2023년도 개봉했다가 2025년 재개봉했었다.

이 소설을 읽고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 작가에 대한 좋은 느낌을 받아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독서가 이어졌다.

최근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출간되었다고 하니 한 번 살펴봐야겠다.




작품 속 화자인 '나'는 아이들 다섯이 있는 가난한 집 딸이다.

아빠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나는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 집으로 가고 있다.

아이들이 많아 챙길 것도 많고 할 일이 많은 바쁜 엄마는 이제 출산이 임박했고, 넉넉하지 못한 빠듯한 집안사정으로 부모님은 한 입이라도 덜 심산으로 나를 이 집에 잠시 보내는 것이다.

먼 친척 킨셀라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못하여 내 마음은 갈팡질팡하고 이들에 대해 상상하고 짐작해 보다가 불안한 마음에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내색도 하지 않는다.


'나무가 아픈가 봐'라고 아빠에게 친근하게 을 걸어 보만, 아빠는 그저 '저건 수양버들이잖아.'라는 무미건조한 반응이다.


'이 집에 비밀은 없어.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우리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라는 아주머니와 처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 나서 나는 이제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자신의 가족들과 익숙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된 어린 소녀에게는 모든 것이 엄청난 불안과 스트레스이면서 공포였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간밤에 매트리스에 실수를 한 것을 알게 된 나는 집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매트리스가 낡아서 습기가 차서 그렇다고 하며 나의 실수를 드러나지 않도록 해준다.


킨셀라 아저씨는 내가 다리가 길어 순록과 같이 달리기를 잘하게 될 것이라고 매일 시간을 재주며 달리기 연습을 시킨다. 달리기 연습은 아저씨가 나와 할 수 있는 조그만 놀이였던 것 같다. 킨셀라 아저씨는 재밌는 말을 나에게 많이 걸곤 한다.

귀지가 많다며 귀지를 파주는 다정한 아주머니의 모습, 카드놀이를 하면서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웃음들.

이렇게 그들의 평온하고 소소한 일상에 나는 빠르게 익숙해진다.


초상집에서 만난 드러드 아주머니는 나에게 나와 킨셀라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물어본다.

그 대화 중에 나는 킨셀라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숨겨진 아픈 과거를 알게 된다.

나에게 옷을 새로 사 입혀야 한다고 킨셀라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눈 후 아주머니가 구스베리를 다듬으며 왜 눈물을 흘렸는지, 그 울음을 왜 감추지 못했는지, 그리고 늙은 사냥개가 왜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킨셀라 아저씨는 나에게 말할 수 있어도 말하지 않아야 하는 침묵의 지혜와 말의 무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준다.


남동생이 태어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편지가 집으로부터 도착하자, 나는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 오늘이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겠다고 킨셀라 부부에게 말한다.

속상함을 감추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이만, 이별의 시간은 어쩔 수 없이 다가온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아준다. 킨셀라 아저씨는 나의 보폭에 맞추어 걸어준다.

아빠와 손을 잡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킨셀라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깊은 배려와 사랑을 받아들인다.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숨겨져 있어도,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고, 말하고 싶더라도 말할 수 있어도, 침묵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지혜로운 인간은 그렇게 해야 한다.

나는 내가 전보다 성장하였을 스스로 느낀다.



[마음에 드는 문장]


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 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인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집에 도착하자 개가 일어나서 자동차 앞까지 우리를 마중 나온다. 나는 아주머니나 아저씨가 개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킨셀라 아저씨가 한숨을 쉬고 우유를 짜러 간다. 집으로 돌아온 아저씨는 아직 잘 준비가 안 됐다고, 오늘 밤은 초상집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 거라면서 누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라고 덧붙인다.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아저씨가 웃는다. 이상하고 슬픈 웃음소리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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