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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가 권서경 Mar 25. 2021

층간소음


층에 어린아이가 있는 가정이 이사를 오고부터 층간소음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괜한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아 아파트 경비실을 통해서 주의를 부탁했다. 계속되는 소음에 여러 차례 당부했음에도 그때 뿐. 전혀 호전이 없어 그냥 반쯤 포기한 채 지냈더니, 그걸 용인의 뜻으로 받아들인 건지 아침, 낮, 밤, 새벽을 불문하고 아이는 더욱 가열차게 뛰어댔다.
참다못하신 엄마가 직접 올라가셔서 이야기했더니 위층 사람은 되려 이것 좀 보시라며, 매트도 다 깔아놨는데 더 뭘 어떻게 하냐고, 소음이 들린다면 그건 자기 집이 아니라 저 위층에서 타고 내려오는 소리일 거라고 반박하더라며 하소연하듯 말씀하셨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 집이 이사 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아이가 뛰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거니와, 천장을 사이에 두고 바로 위에서 들려오는 또렷한 소리에는 다른 가능성의 여지라고는 없었다.

신이 난 아이는 때로 비명마저 지르면서 발을 구르곤 했는데, 그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안겨준 건 신난 아이의 반응을 뒤따라 부추기는 성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외출하려 아파트 공동현관을 나서는 길에, 유아차를 끌고 들어오시던 아주머니께서 머뭇거리면서 나를 불러세우셨다. 혹시 X 층에 사시는 분이냐고, 어렵게 말을 꺼내신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내 이어서 말씀하시기로는, 우리 집 위층에는 딸네 부부가 살고, 아주머니께서는 같은 라인의 다른 층에 거주 중이라고 하셨다.

손주가 이제 두 돌 조금 안 됐는데, 요즘 부쩍 뛰기 시작했다며 난감한 웃음을 지으셨다.

"딸아이가 저번에 어머니께서 직접 올라오셨다기에, 언제 한 번 찾아뵙고 인사드리라고 얘기는 했는데..."

말씀하시는 내내 표정에서 미안함이 묻어났기에 사과를 하시려는 거구나 생각했다. 다만 나는 그 사과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는 게 적절할지, 당장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괜찮다고 해야 할까. 아니, 안 괜찮은데? 주의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해야 하나. 태도와 말투에서 이미 충분히 그럴 의지가 보이는데, 굳이?

나는 직업상 집에 있는 시간이 길다. 계속되는 층간소음을 피해 일부러 카페에 나가서 작업을 해야 하는 날이 늘어났기에,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혹시나 위층과 마주치면 제대로 한 마디 해줄 테다 벼르고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집 어머니와 마주칠 상황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대비하지 못한 만남에 시종 어색한 웃음만 내비치다가 인사를 나누고 아파트 현관을 나왔다.
그러고 나서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걷다 보니, 그제야 내가 어르신께 마땅한 대답을 드리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어린아이가 뛰어노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는 없다. 아이는 그렇기에 아이다. 통제는 보육자의 역할이다.
층간소음은 허술한 아파트 구조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시간을 불문하고 뛰어다닌 아이와, 그에 잇따르던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에서 어른들의 제지 의지라고는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 나는 무엇보다 불쾌했다.
정작 사과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우리 어머니와 비슷한 연세의 어르신에게 딸 부부를 대신한 진심 어린 사과를 받는 상황 앞에서 민망함은 왜 내 몫이어야 하는지.

그날 현관에서 마주친 게 다름 아닌 위층 부부였더라면 확실하게 할 수 있었을 말들을 곱씹으며, 눈앞에 가까워지는 목련 나무의 꽃봉오리를 사진에 담았다. 삭막한 세상에 기어이 찾아온 봄이다.


그날 이후로 아직까지 별다른 소음 없이 지내고 있다.
이 평화로운 나날이 이번에는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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