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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풍 west wind Jun 24. 2024

" 귀환 "

A Beautiful Moment

8년 전이다.

기차는 한적한 아씨시(ASSISI) 역으로 느리게 진입했다.

오래된 작은 역사를 빠져나와 버스를 기다리며 멀리 시야로 들어온 아씨시 언덕을 바라보았다.


아 왔구나!

움브리아주의 맑은 햇살을 가르며 살랑이는 미풍이 불어왔다.

청량한 기운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올라왔다.

몸의 미세한 떨림.

눈가에 물기가 슬쩍 스며 나왔다.


사치스러운 계절(직장인은 엄두내기 힘든 계절)에 내가 원하는 루트와 방식으로 스페인과 이탈리아 여행을 하겠노라 했던 나의 소망은 아주 간단히 이루어졌다.

마침 5월 초였고 통장잔고를 확인했으니 비행기를 예약하고 짐을 꾸리면 되는 일이었다.

친구도 나의 계획에 동참하여 한 달여의 여행일정을 함께하기로 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내가 그 많은 이탈리아의 소도시 중에 '아씨시'를 여행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공간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때 건축가들로부터 '장소특정적 예술(Site Specfic Art)'의 레퍼런스로 성프란치스코성당이 비중 있게 언급되었던 게 기억나서이고.

여행을 즐기기 위해 조사를 조금 하다 보니 성프란치스코 성인의 이야기와 기적을 포함한 성스러운 땅 아씨시에 대한 부분이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종교가 인간에게 필요한 그 무엇이라는 것에는 매우 동의한다.


여행을 준비하며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여정을 따라 변화하지 않을까?

아씨시는 마음의 여정에서는 최종 목적지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다음 시간과 공간으로 넘어가는 문지방.

통과 의례를 마칠 수 있는 장소.  


우리는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올라 먼저 호텔로 갔다.

중세시대부터 사용했을 법한 묵직한 룸키를 받아 들고는 방에 들어가 짐을 부려놓았다.

여닫이 창문을 활짝 열어져 치니 아씨시 언덕에 위치한 호텔답게 낮은 구릉의 움브리아 평원이 멀리까지 내다 보였다.

와우, 지평선을 보게 되다니!


벌써 늦은 오후 시간, 우리는 중세의 골목길을 따라 성프란치스코 성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타오십자가(T자 모양의 십자가)'를 파는 기념품 가게와 식당들을 기웃거리다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곧 언덕의 지형에 절묘하게 배치되어 있는 성당이 입체적으로 서서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었다.

빠른 걸음을 옮기며 눈에 담게 되는 시각적인 변화에 나는 감탄을 쏟아냈다.

규모가 있지만 고압적으로 보이지 않으며 보는 위치에 따라 하늘을 배경으로, 멀리 보이는 평원을 원경으로 성당의 모습이 드러났다. 장식이 많지 않은 성당 외관은 단정하고 소박한 느낌이지만 아름다웠다.


그리고 시선을 바꿔 평화의 언덕에 설치되어 있는 성 프란치스코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기사가 되길 꿈꿔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포로가 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온다. 기사로서 금의환향을 꿈꿨으나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고개 숙인 프란치스코.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듣게 될 것이다.

'<성프란치스코의 귀향> 조각상에서'


아마도 내가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은 그를 인도한 주님처럼,

그가 그처럼 '고객 숙인 나'를 인도하였기 때문이리라...

성프란치스코의 귀환.

나도 생면부지의 아씨시에 잠시 귀환해 본다.


해가 기울어져가는지 성당을 둘러싼 풍경이 변해가고 있었다.

우리는 성당의 내부로 들어갔다.

엄숙하고 아름다운 성당내부를 둘러보는 중 무심코 뒤돌아보니 유아세례를 받기 위해 온 듯 훤칠한 이탈리안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갓 100일쯤 되어 보이는 아주 작은 아기를 안고 있었다.  

내부를 향해 잠시 아기를 안고 기도하는 남자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성당 1층 지하를 둘러보고 2층에 있는 중세의 거장 조토가 그린 프레스코화를 감상했다.

그리고, 우리도...?

옷매무새를 순간 정리하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는 친구의 모습.

친구와 나는 각자 기도를 하기 위해 잠시 떨어졌다가 만나기로 하였다.

나도 그녀도 주님이 보시기에 빨간 아카징키를 발라줘야 하는 어린양들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외부의 가로등에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평화의 언덕으로 다시 발길을 옮겼다.

불 켜진 성당과 노을 지는 하늘과 움브리아 평원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바람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귀환하는 성프란치스코 조각상을 다시 바라보았다.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듣게 될 것이다.

귀환.

어디에 있는가?

돌아갈 곳이 있는 자는 모험가이자 여행자이지 부평초가 아니다.


친구와 나는 성당 근처의 작은 식당을 발견하여 즐겁게 저녁을 먹었다.

와인 반잔을 겨우 마시던 친구는 이제 나처럼 한 병을 통째로 마시는 수준이 되었다.

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웃음을 폭포처럼 토해냈다.


달이 떠오르는 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바람의 언덕과 골목길을 만끽했다.

아씨시의 바람이 나를 부드럽게 그리고 강하게 안아주었다.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나는 지금 그날 무슨 기도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저녁 나를 감싸안던 아씨시 언덕의 청량한 바람.

어린 아기를 안고 성당에 들어서는 아름다운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아씨시역에 도착하자마자 느꼈던 떨림.


청량하고 젠틀한 아씨시의 감각과 감정만 남아 있을 뿐.





성프란치스코는 십자군전쟁이 벌어지던 13세기 청빈과 평화의 수도사가 되었고, 가톨릭 성인으로 현재까지 전 세계인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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