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청년과 부모가 주시해야 할 문화 트렌드
[이번 주에 살펴볼 오해] 문화는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소비한다. 우리가 주체이다.
처음엔 예술이 인생을 모방할 것이고,
그 다음 인생이 예술을 모방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은 예술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At first, art imitates life.
Then life will imitate art.
Then life will find its very existence from the arts.
-Fyodor Dostoevsky-
우리가 선택해서 즐기는 영화, 드라마, 책, 음악.
우리가 문화콘텐츠의 소비자인 것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광고를 제외한 대부분의 매체를 생각해보면 사용자가 주체가 되어 선택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게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이든 서점의 매대이든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를 선택하는 이들이 따로 있다. 경영진이 있고, 제작자가 있고, 큐레이터가 있고, 투자자가 있다.
그게 동전의 반대편이라고 하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동전의 옆면’이 있다.
소설 원작의 영화 '하이 피델리티' (존 쿠삭 주연)는 주인공의 이런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내가 우울해서 팝음악을 듣는 걸까, 아니면 팝음악을 들어서 우울한 걸까?’
People worry about kids playing with guns, or watching violent videos, that some sort of culture of violence will take them over. Nobody worries about kids listening to thousands, literally thousands of songs about heartbreak, rejection, pain, misery and loss. Did I listen to pop music because I was miserable? Or was I miserable because I listened to pop music?” — Rob from the movie <High Fidelity>
약 20여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보기 전에도 듣는 음악이 청자listner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1) 대학시절, 유독 슬픔의 감수성에 예민한 R&B 가수 지망생인 지인이 있었다. 듣는 노래가 전부 슬픈 노래였던 그 친구는 늘 자신의 감정에도 상대의 감정에도 부정적인 해석을 했다. 5년 전 내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러줬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그 친구의 청첩장은 받아보지 못한 상태이다.
(2) 나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때, 일렉기타를 잡은 이후 BPM이 120 이하의 곡은 거의 듣지 않았다. 심지어 BPM 150 정도 되야 신나게 느낄 정도였다.
(발라드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흑인음악의 R&B는 그 화음 때문에 놓지 못하고 들어왔다.)
수험생 시절 처음 들었던 라디오헤드(Radiohead)는 그 광대한 음악성 때문에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았고 듣다가 졸 수 없는 그런 곡 구성 때문에 애정하기도 했다. 국내 밴드 중, 넬 이라는 4인조 밴드 역시 메이저에서 유명해지기 전부터 챙겨듣던 밴드 중 하나이다. 데미안 라이스는 그 단순한 코드 진행 속에서도 충분히 꽉찬 노래를 만들어내서 좋아했다.
하지만 난 그들의 음악을 의도적으로 자주 듣지 않게 되었다.
그 곡 속의 우울함이 내 정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너바나의 드러머가 커트 코베인의 사망 이후 만든 The Foo Fighter 라는 밴드의 곡 중 The Pretender란 곡이 너무 좋았던 때도 있었는데, 그 곡을 주구장창 들을 때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공격적이기도 했다.
기타 사운드나 리듬에 대한 연구로 우연히 접하게 들었던 일본 요코하마 지역 밴드 9mm Parrabellum Bullet의 곡들도 그런 효과가 있었다. 왈츠 리듬의 하드락/메탈사운드가 참신해서 종종 들었는데, 그런 음악들이 나의 태도와 언행에 영향을 미치는 걸 관찰할 수 있었다.
음악이 내게 미친 영향은 중학교 시절 실연과 맞물려 읽었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미친 영향만큼이나 위력적이라고 할수 있겠다.
인간의 오각 중, 한 가지만 충족시키는 음악이나 책이 이런데 영화/드라마는 어떨까?
음악, 영상, 글 (대사) 종합예술세트를 통해 우리의 정신/마음 속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할 것이라고 감히 주장해본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신진대사를 통해 피와 살이 되듯이, 우리가 소비하는 문화콘텐츠는 자아라는 '원석'을 조각한다.
예술이란 이름이 붙으면 허용의 폭이 증가하는 것도 삶의 영역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같은 나체를 그린 그림이더라도 예술품인지 ‘풍기문란’을 조장하는 음란물인지가 갈린다.
비트와 음악이 없으면 두 진영이 서로를 비하하며 자기 과시를 하며 싸우는 것 같은 랩 배틀도 음악의 힘을 얹으면 힙합이 된다. 음악을 끄면 선정적인 유혹의 몸짓이 댄스라는 형태도 유치원생, 초등학생의 몸동작으로 구현되기도 한다.
내 삶 속에서, 내 가족의 삶 속에서 마주하면 피가 거꾸로 솓을 불륜이란 소재 역시, 드라마에서 외모가 출중한 배우들을 통해 구연되면 또 큰 거부감 없이 보게 된다.
과연 문화콘텐츠 소비를 통해 형성된 나의 가치관은 내가 성장과정을 통해 주도적으로 쌓아온 자기 철학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글쓴이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삶을 통해 관찰해보면 적어도 내가 살아온 모든 문화권에서는 공통적으로 다섯 개의 트렌드 변화가 있었다.
낭만주의는 과거 유명화가들의 화풍과 문학작품에서만 남아 있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다. 헐리우드 영화, 디즈니사의 영화에 남아 21세기 청소년과 성인들의 철학이자 애정관이 되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없으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거라는 주장은 미국 하이틴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미 가정을 이뤄 아이들의 부모가 된 이들에게도 작용하고 있다.
(유튜브 유부남 개그소재로 나오는 ‘의무방어전’이란 개념도 그렇고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라며 결혼을 하면 sexless로 가는 게 자연스럽다는 비현실적인 부부관계를 그린다.)
‘사랑 받는다고 느끼지 못한다’ 라는 걸 불륜의 정당한 사유인 것처럼 말하는 드라마 속 주인공을 혹시 기억나는가?
18세기 ‘젊은 베르테의 슬픔’(1774) 의 시대에서부터 19세기 ‘보바리 부인’ (1857)를 거쳐 20세기 한국 영화 ‘자유부인(1956)’까지 이어졌다.
*「자유부인」은 1956년에 한형모 감독이 정비석의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연출한 영화이다. 1950년대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교수 부인의 춤바람과 일탈을 다루어 소설과 마찬가지로 전후 한국 영화계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자, 이제 자유부인이란 단어가 내포한 뜻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인스타든 어디에서든 '나 오늘 자유부인이야' 란 텍스트와 해쉬태그 #자유부인 은 하지 않도록 하는 걸 추천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21세기 한국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통해 ‘불륜’은 마이너한 소재가 아닌 대중적 소재로 자리 잡는다.
시대를 불문하고 실연이 (어떤 경우에는 거절) 폭력의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가해자들을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기도 하며, 사랑한다며 기본적인 ‘인권’을 망각하는 부모도 찾아볼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그런 현대인들을 향해 ‘낭만주의’가 사랑을 망쳐놨다고 주장했다.
어떤 노력도 필요없이 ’모든 면에서 잘 맞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완벽한 존재‘는 기다리면 나타난다고 믿게 만들고, 정말 사랑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한다는 망상을 하게 만든다. 말해야 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믿게 하기도 한다.
(1) 결혼에 대한 환상을 생산해 결혼 기간은 단기연애에서 누리는 자극적인 감정의 장기버전일 거라고 믿게 만들었다.
(2) ’환상적인 섹스‘와 사랑을 동의어로 착각하게 만든다.
(3) ‘진정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외로움에 종결시킬 거라고 믿게 한다
(4) 낭만주의는 파트너를 선택할 때 ‘느낌’이 주도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낭만주의적 사랑에 대한 해석이 현대 사회에서 워낙 당연한 주류문화처럼 여겨지다보니 ’결혼을 포기하는 사회‘를 이야기 할 때, 거시경제와 미시경제적 요인만이 아니라 이런 사랑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치를 다루는 기사를 보기도 어렵다. (열심히 찾아보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내릴 듯 말듯 계속 상승하는 것처럼 보이는 집값과 미혼 청년층의 구직난 외에도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이 미치는 영향도 분명 있다. 사랑이 너무 중요한데 (중요한 것은 맞다), 기대치가 비현실적이니 ’사랑’을 기대하기도, 여기에 도전하기도 버거워 하는 시대가 된게 아닐까.
이성은 열정의 노예이다
Reason is the slave of passion
-데이비드 흄
David Hume-
이런 낭만주의의 트렌드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게 주류 문화가 됐다고 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으로 시작되어, 르네 데카르트로 이어진(?) 이성주의는 (혹은 합리주의) 흡사 경험주의로 대체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대중문화에선 그 경험주의의 근본의 주된 동력은 감정주의(주정주의 emotionalism)로 보인다.
이번엔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여파를 살펴보자.
(1) 한 때 유행한 (대한민국 버전의 왜곡된) YOLO(You Only Live Once)는 이성주의의 반대편에서 청년들이 미래를 위해 절약하는 것 대신 현재를 위해 소비하는 걸 합리화시켰다.
(2) 그럼 조금 더 큰 30대 초,중반은 어땠을까? FOMO(Fear of Missing Out)로 불리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기반해서 ’지금 사지 않으면 안 돼‘ (지금 안 사면 평생 못사) 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많은 부동산 대출을 “땡겼으며” 금리상승이라는 너무나 발생가능한 미래를 등한시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집값상승에 기여하며 근로소득의 적지 않은 부분을 대출이자와 원리금 상환에 할애하게 하는 한편, 금융소득도 들쑥날쑥하는 장에 긍정주의는 다음 십년을 바라보고 지내게 된 이들도 많을 것 같다.
<넛지>의 저자이기도 하고 노벨경제학 수상자 리차드 탈러 (Richard Thaler)가 행동경제학을 통해 주장한 바가 여기에 드러났다.
NIH의 2017년 기사 헤드라인이 그걸 참 잘 뽑아냈다.
Humans are predictably irrational. : The Influence of Nobel Laureate Richard Thaler and Behavioral Economics
형용사형 문장으로 표현된 이걸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인간은 예상대로 비합리적이다?
인간의 비합리성은 예측가능하다?
Our whole life is taken up with anxiety for personal security, with preparations for living, so that we really never live at all.
-Leo Tolstoy-
감정주의가 물질주의와 환원주의와 조합이 되니 또 새로운 양상을 띈다.
보이지 않던 마음이 작용하는 생화학적 인터페이스가 뇌과학 (혹은 신경학) 적으로 관찰가능한 영역이 되니 우리는 마음을 브레인스캔의 색깔을 통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혈류량의 증가와 특정 성분의 증가나 감소, 결핍으로 감정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미지 출처: 링크
슬픈 가정을 해보자.
(1) 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물리적 스펙트럼의 최악’에선 그게 사별이 될 수 있겠고, ‘정서적 스펙트럼의 최악’은 외도(배신/배반/cheat)이 될 수 있겠다. 사별만큼이나 배우자의 외도가 미치는 타격이 크다고 한다. 그건 정서적 살인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이 배우자 살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뇌과학을 배제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슬픔이 당연하다는 것을 안다.
서기 1년을 기준으로 삼아도 2,000년 간 그걸 알아왔다.
이런 경험이 우리를 행복의 가장 먼 반대편에 자리하게 하는 게 당연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가 비슷한 경험을 하게 할 걸 두려워 하게 하는 것도 당연하다.
인간의 학습능력에는 패턴분석능력을 아주 근본적인 도구로 사용하고 그걸 바탕으로 미래를 추론한다.
이런 슬프거나 불쾌한 경험을 한 뒤에 겪는 감정인 ‘불안’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런 감정을 긴급하게 치료해야 된다는 판단을 한다면, 그 이면에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철학적 전제가 있다고 주장해볼 수 있겠다.
이런 불안을 병으로 정의하는 게 1차적 배경이 된다.
한편, 21세기 현대의학은 화학물질로 특정 부위와 특정 성분이 작용하는 걸 통해 특정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상태이다. 이것이 2차적 배경이 된다.
마지막으로 괴로움으로 정신의학과를 찾은 ‘피해자’는 효과있는 치료를 원한다.
세 개의 조건이 부합하여, 피해자는 ”환자“가 되어 의사로부터 마음의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처방전’을 받아, 약을 먹고 약효가 지속되는 동안 ‘기분이 나아진다’.
대게 그런 약물들은 부작용이 있지만 그걸 특별히 강조하며 처방을 하지 않는다.
그 부작용이 생리학적으로 신체기관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엔 또 다른 치료를 요하는 심리학적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2) 산후우울증?
배우자의 불륜이라는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다른 상황으로 바꿔도 비슷하다.
아이를 키우며 참석하게 되는 여러 단체 활동 속에서 지금까지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렇게 알게 된 사람의 예다.
배우자가 주 4일 지방출장을 하는 지인(女)이 있다.
출산 후, 신생아 양육 기간에도 남편의 직장은 특별히 이런 특수기간을 배려할 수 있는 직종이 아니다. 부부 둘이 감당해도 너무 피곤하고 괴롭고 힘든 그 기간을 혼자 버텨낸다. 배우자가 집에 돌아올 때마다 싸운다. 배우자는 아내가 너무 비정상적인 감정표출을 한다며 ‘산후우울증’이 아니냐며 병원 방문을 추천한다. 아내는 이명이 신경쓰이던 찰나에 이런 얘기까지 들으니 병원에 간다.
병원에서는 이명의 원인이 스트레스일수 있다며 산후우울증으로 진단한다. 약을 처방받는다. 지인은 우리 부부에게 처방전을 보여줬고, 나는 그 약에 대한 검색 후, 그 성분이 가지고 있는 부작용을 찾아봤다. (결과는 아래에) 그리고 그 부작용에 대해 아는 지 물어보니 의사가 별다른 설명 없이 줬다고 한다. 부작용이 소개된 페이지를 읽어본 후, 요즘 그런 증상들을 느끼고 있다고 하며 약 먹는 걸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약 이름: 스타브론정 (티아넵틴나트륨)
(아래 설명 내용 출처: 식품의약품안전처- 링크)
(1) 효능효과: 주요우울증
(2) 용법용량:
치료의 갑작스러운 중단은 피해야 한다. 금단 반응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7 ~ 14일 동안 서서히 용량을 감량해야 한다. (사용상의 주의사항 ‘일반적 주의’항 참조)
(3) 사용상의 주의항
가. 경고: 자살/자살관념 및 임상적 악화. 임상 경험은 자살 위험이 회복의 매우 초기단계에서 증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 이상반응:
1) 대사 및 영양
- 흔하게 : 식욕부진
- 빈도불명 : 저나트륨혈증
2) 정신계
- 흔하게 : 악몽
- 흔하지 않게 : 약물 남용 및 의존성 (약물 또는 알코올 의존 병력이 있는 50세 이하의 환자)
- 빈도불명: 티아넵틴나트륨 치료시나 투여중단 직후 자살관념이나 자살행동 (1. 경고항 참조), 착란, 환각
3) 신경계
- 흔하게 : 불면증, 졸음, 현기증, 두통, 기절, 떨림
- 빈도불명 : 추체외로장애, 이상운동증
4) 순환기계
- 흔하게 : 심계항진, 기외수축, 흉통
5) 혈관기계
- 흔하게 : (폐경기 여성들이 느끼는) 열감
6) 호흡기계
- 흔하게 : 호흡곤란
7) 소화기계
- 흔하게 : 위통, 복통, 구갈, 메스꺼움, 구토, 변비, 속이 부글거림
8) 피부 및 피하조직
- 흔하지 않게 : 반구진발진, 홍반발진, 가려움증, 두드러기
- 빈도불명 : 여드름, 이례적으로 수포성 피부염
9) 근골격계
- 흔하게 : 근육통, 허리통증
10) 전신 및 투여부위
- 흔하게 : 무기력증, 목이 막힘
11) 간담도계
- 빈도불명 : 간효소 증가, 간염(이례적으로 중증 간염)
이명 때문에 병원을 간 그 사람은 흔한 부작용으로 "악몽, 불면증...두통... 떨림"을 덤으로 받아왔다.
자, 여기서 잠시 분석을 해보자.
너무 힘든 기간을 혼자 보냈는데, 우울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다.
누가 겪어도 힘든 상황에서의 정상적인 반응은 치료 대상으로 분류 되어야 하는 걸까.
시간이 지나거나 상황이 달라지면 나아질 기분을 약물로 개선하고자 한다.
항정신성약물이 다양하게 개발되기 이전에 인류는 자기진단적이며 자발적인 대응을 했다.
사또에게 정혼자를 빼앗겨 연인을 잃던, 도박을 해서 돈을 잃던,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음료를 마셨다.
노래로 불려지는 ‘난 맨날~ O이야’ (바이브) 부터 드라마에 수없이 등장하는 장면의 그 음료.
사극에서부터 현대극까지 비슷한 상황과 비슷한 대사 속에 등장하는 그 소품.
대스타가 되면 의례적으로 출연하게 되는 광고의 그 상품.
슬픔을 이기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이다.
굳이 의사의 처방없이도 소비자로서 구매할 수 있는 술.
지극히 단순화 시켜서 이 상황의 본질을 비교하자면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현실 세계에서 내가 겪은 불쾌한 경험.
그 경험을 통해 내가 겪고 있는 불쾌한 감정.
그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섭취하는 물질.
이 과정에서 정신적 초월이나 극복은 없다.
일시적 안위와 망각과 반복이 있을 뿐이고, 그 과정은 주로 중독으로 이어진다.
주: 글쓴이는 지금까지 슬픔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관점에서 서술했으며, 생화학적 불균형, 생리학적 문제로 기인한 병리학적 현상이 치료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 사례에서 인간이 패턴분석을 통해 경험주의적 예견을 하고 살아가본다고 가정해보자.
앞서 예로 든 사별이나 배우자의 불륜은 평생을 극복하며 살아야할 상처라 적합한 예가 되지 않으니, 좀 더 보편적인 예로 바꿔보자.
예를 들어, 한 번 실연 당한 사람이 같은 슬픔을 겪고 싶지 않아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사람이 앞선 경험을 바탕으로 평생 사랑을 믿지 않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적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기에 더욱 공감 가능한 가정이기도 하니, 이 가정 속의 사람을 ‘나’라고 부르겠다)
나는 그렇게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내 세상 속 ‘사랑’은 존재 하지 않는다. 영화, 소설, 음악에서만 나오는 그런 허구의 감정이다.
나의 철학적 관점, 나를 사로잡은 생각이 내 현실에 지극히 현실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거다. 하지만 내 예견, 내가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기대치는 과연 현실적인 것일까?
미래에 대해 가장 확실한 팩트가 하나 있다면 그건 또 ‘불확실성’이다. (그게 내가 원하는 불확실성으로 다가오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그 불확실성은 미지의 영역이고 이 역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 나에게 사랑을 줄 사람을 만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
………
반대로 죽을 때까지 날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모르는 일이라는 게 현실적인 사실이다.
물론 미래에 일어날 이벤트는 스펙트럼이 있고, 운명론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란 걸 믿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 지가 또 다른 팩터로 작용한다.
내가 이 시점에 출가(?)하여 머리를 깍고 산 속에 들어가 무기한 템플스테이를 시작하는지, 매일 밤 어두컴컴한 클럽과 바를 전전하며 술을 마시며 보낼지, 아니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적절한 산책과 운동을 하며 보낼지, 적정한 성비와 규모를 자랑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지, 내가 하는 선택이 나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그게 불확성실이란 미래를 마주하는 나의 가장 현실적 인식이다.
여기에 조금 더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를 던져보자면 그건 ‘희망’의 유무 여부 정도가 되겠다.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절망이 나의 현실이 되게 살아갈 것인지.
희망은 아름다움이란 단어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희망은 현실과 미래의 갭을 채우는 태도이다.
Beauty will save the world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Leo Tolstoy
레오 톨스토이-
그 아름다움을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에서도 현대문화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예전에 우리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타고난 것이거나, 시간을 거쳐 미래에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타고난 미인이라는 카데고리가 존재했고, 평범한 여자도 ‘숙녀 훈련‘을 받으면 기품 있는 여자가 되어 언행이 우아한, 즉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태생적인 것과 시간을 들여 노력을 거쳐 얻을 수 있는 후천적인 것의 구분이 있었다.
의학기술의 발달은 이걸 뒤집어 놓았다.
돈이 있다면 의술의 ‘도움’을 받아 외모를 바꿀 수 있는 시대가 된 거다.
각 시대마다 문화콘텐츠가 선호하는 미美의 틀이 있어왔고, 자아가 불안한 시기에 주로 외모로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하고, 경쟁 사회 속에서는 외모 역시 경쟁력으로 해석했으며, 그 경쟁력이 취업시장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니 경제력에도 영향을 미치고, 그 경제력이 또 ‘결혼시장’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순간, 외모가 후대의 가정배경을 달리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성형을 선택적 투자로 해석이 가능한 시대의 도래.
어쩔 수 없는 타고난 미도 아니고, 시간을 거쳐 얻을 수 있는 미가 아닌
돈을 들이면 즉각적으로 (회복기간이 필요하지만) 얻을 수 있는 미의 카데고리가 열린 것이다.
내가 처한 현실(외모)을 즉각적으로 바꿀 수 있는 시대
그 선택을 하게 하는 복합적 요소를 단순화 시킬 의도는 없다.
하지만 많은 청소년들은 가장 불안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갈 때, 외모에 집중하게 된 상태에서 SNS라는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현실로 오해하고, 본인의 외모에 대한 평가를 한다.
(이제 중2가 되는 직장 동료의 딸아이가 방학 때 성형수술을 한다고 해서 떠오른 예시이다)
흥미로운 현상은 '수술을 통해 자신감을 갖는다'라는 주장을 하지만, 성형수슬을 한 환자들이 우울증을 겪게 될 확률이 일반 대중에 비해 높다는 것이다. (연구결과 링크1, 링크2) *물론 이미 불안이나 우울증을 갖고 있던 사람이 성형을 선택하게 되는 가능성과 수술 후 생기는 정서변화를 구분하기 위해 더 세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분석했을 때, 부족한 자신감을 얻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바꾸는 것은 극복이 아닌 회피이며 외모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태도의 연속일 뿐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한 편, 그 반대편에서는 또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이 역시 시간을 들여 노력하는 것 대신 즉각적인 현실의 재구축을 시도한다.
* 바디 포지티브 운동(body-positivity Movement)이 그렇다. (외래어표기법이 참 일관성이 없다)
흥미롭게도 이 운동은 1969년 뉴욕의 엔지니어 Bill Fabrey가 사회가 자신의 뚱뚱한 아내를 대하는 것에 대해 화를 내며 시작된다.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 National Association to Aid Fat Americans (NAAFA)란 단체를 만들었다. 캘리포니아에선 1973년 Fat Undergroud가 창립된다. NAAFA에서 Fat Acceptance라고 부르던 걸 여기에선 Fat Liberation이라고 부른다. (참고기사: BBC)
물론 fat-shaming(뚱뚱하다고 놀리는 것)은 나쁘다.
외모의 특정요소로 사람을 비하하는 건 어떻게 봐도 나쁘다.
외모지상주의를 기반한 fat-shaming은 미국 하이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따돌림의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체중과 ‘비만’이라는 게 의학적으로 신체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NIH 링크)
'바디 포지티브', 자기의 '모델 같지 않은 몸매'를 긍정하는 운동. 모델처럼 날씬하지 않아도 되는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생각의 전환이다. 근데 그 범주가 모호하고 미국의 경우, 건강을 저해하는 극도비만의 경우에도 이 바디 포지티브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긍정하는 이들이 보인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에는 물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고 아끼는 게 포함된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는 나를 관리하고 더 나은 나로 이끌 수도 있다. 식습관, 운동습관, 수면습관을 관리하며 나의 외형을 가꾸는 거다.
미를 대하는 태도 역시 현대 문화의 여러 요소를 통해 다른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 물론 모든 이들이 이런 외적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건강에 지장이 없는 선상에서야 당연히 내적 아름다움에 더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운동에 시간을 할애 하지 않는 삶이 앞서 말한 라이프스타일보다 좋지 않다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미에 대한 추구와 처한 현실에 대해 변화를 갈망하는 21세기 인류는 그 전 시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물리적 수단을 선택지에 올려놓고, 나의 인식을 바꾸는 내적성장을 택하는 대신 타인의 시선을 바꾸는 외적변화를 선택하고 있다.
이 미적 추구가 성별을 초월하게 되면 더 복잡한 트렌스젠더 수술로 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실제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경우, 미성년 아이가 스스로를 다른 성으로 인지하면 gender-affirming, 그 성을 지지 하지 않으면 '인권침해'가 되고, 아이가 원한다면 부모의 동의 없이 시설에서 성호르몬 '치료'까지 받을 수 있다. (참고: 링크 lao.ca.gov)
이 주제의 소재가 된 어제의 대화(중2가 되는 딸의 쌍꺼풀수술 계획)에서도 그렇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미의 기준이 있다는 걸 인지한 상태에서, 그 기준에 맞춰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성형이라는 옵션이 없었다면?
우리가 마주한 문제의 근본은 스마트폰 의 필터를 거쳐 ‘개선된 외모’의 사진이 넘치는 SNS라는 외적환경이 아니고, 성장기에 있는 자신의 외모가 자존감에 직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미성숙한 자아라는 걸 마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예전에 흔했던 외적외모에 치중하는 대신 내면의 아름다움을 키우는 식상한 전개가 펼쳐지거나, 자신의 승부수를 학업이나 기타 지적활동으로 규정해서 다른 측면에서 업적을 이뤄낼 수도 있겠고.
왜 우리는 이렇게 단순해졌을까?
어떤 사회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게 아닌 개인적 관점을 펼쳐본다.
혹시 디자인의 미니멀리즘이 우리의 사고로 넘어온 건 아닐까?
단순한 걸 선호하는 시대가 되니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복잡한 현실을 단편적으로만 압축해서 해석하는 건 아닐까?
무언가를 모르는 건 싫고, 알고 싶긴 한데 복잡한 건 싫다.
그러면 다층적인 현실의 복잡한 부분은 버리고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취한다.
그리고 그게 현실의 전부라고 인식하는 거다.
현실적으로 그 속성상 복잡성을 배제할 수 없는 건 우주부터 세포 내부까지 이 세상 가득하다.
그 중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인간을 단순화 시켜 이해하려는 트렌드를 살펴보자.
동양에서는 사주가 있어왔고, 서양에는 별자리가 있고, 일본에서는 혈액형이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MBTI가 (또 다시) 유행이다.
아마 내 생애 두번째 유행인 것 같다.
MBTI는 다양한 인간을 16가지로 나누려는 시도이기도 하며 그 안에 타인을 집어넣어 ‘안다’의 범주에 넣고 싶은 거다. 나르시즘이 대중적이 된 자기애의 시대이다보니 물론 자신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사용하기도 한다.
어쩌면 오랜 시간을 거쳐 소통해가며 부딪혀가며 조율해가며 알아가야할 한 사람의 성격과 장,단점을 초면에 알파벳 네 개 (가끔은 -[대쉬]를 붙인 다섯 개)를 통해 알고자 하는 거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자.
”초면에 실례지만, 성격이 어떻게 되세요? 내향적이세요? 외향적이세요? 장점과 단점이 어떻게 되세요? 분석적이세요? 직관적이세요? “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굉장히 이상한 사람 취급 받기 쉽다.
이렇게 풀어서 말하면 굉장히 이상할 말을 영어단어 네 글자로 요약해서 물어보면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문화가 되었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애당초 심리학자들 중, MBTI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여러 봤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사람으로는 조던 피터슨이 되겠고, 직접 만나본 분은 사내특강 하러 오셨던 가톨릭대학교 심리학 교수님이다.
그들은 MBTI는 가변적이고 정확도가 낮고 실용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조금 생각해봐도 그렇다.
일단 이런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테스트는 자기인식의 정확성을 가정한다.
내가 날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한다는 거다.
하지만 서른 이하, 혹은 마흔 이하의 성인이 ‘스스로를 잘 안다’라고 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화가 계속 되는 것이 청년의 ‘진행중인 청춘‘이기 때문이다.
MBTI테스트.
날 잘 알고 싶어서 하는 테스트가 '내가 날 잘 알 것이라는 걸' 가정해야 한다.
가족이나 배우자의 MBTI 테스트지를 보는 상상해보자.
그들은 자기가 어떻다는 ’셀프 이미지‘가 있을 것이고, 오랜 기간 그들을 관찰한 우리 입장에서 그 셀프이미지가 현실과 갭이 있다는 걸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스스로 굉장히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사실 배우자가 볼 때는 감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판단을 자주한다고 느끼고 있다면, 이 테스트로 분류된 이 사람의 성향은 신뢰도가 낮아질 수 밖에 없다.
빙산의 MBTI:
대학교 때 테스트를 했을 땐 INTP, 취업 후 초기엔 INFP, 결혼 후 육아를 하며 해보니 INFJ가 나온 나. I와 E 편차가 크지 않은 ambivert 이기도 하지만 T와 F 사이, P와 J사이 역시 근소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찌보면 효율을 추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을 들여 누군가를 알아가는 대신 속전속결을 하고 싶은 거일 수도 있다. 그렇게 누군가와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를 ’공략‘하기도 하고.
(실제로 사이비 기독교 이단으로 불리는 신천지 같은 경우, 이런 테스트를 통해 상대를 분석하고, 취향에 맞춰가며 친분을 쌓아 종교활동에 끌어드린다고 알려져있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속궁합‘을 미리 알아보겠다며 ’자만추‘ 라는 걸 추구하려는 문화와 대조해서 조금 더 극단적인 비교를 하자면, 이런 MBTI에 대한 질문은 ‘정신적 궁합’을 알고 싶어하는 성급한 우리들의 시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현대 문화의 양상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또 다시 ‘미’를 바라 볼 때 언급되었던 질문으로 귀결 되기도 한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갈 때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이런 현실을 받아들여 한 사람을 알아가는 노력을 할 것인가, 아니면 네 가지 알파벳으로 이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인스턴트 ‘앎’을 선택할 것인가?
줄여 말하자면 이렇게 된다.
현실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우회할 것인가?
MBTI의 예를 들었지만 이건 숏폼 콘텐츠의 유행이나, swipe left, swipe right의 '틴더tinder' 컬쳐, 'hook up 훅업' 컬쳐로 연관지어 볼 수도 있겠다. 2시간 짜리 영화를 다보지 않고, 하이라이트만 보고 한 영화를 본 기분을 느끼게 한다거나, 한 사람의 몇 장의 사진과 프로필 소개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거나.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
책 표지로 책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더 이상 깊이 있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이젠 ChatGPT에게 책 요약내용을 알려달라고 하고, 그걸 읽은 후, 책을 읽은 것 처럼 느끼기 쉬운 시대이다.
고작 다섯 가지의 대표 예를 들었지만, 현대 문화를 소재로 뽑아낼 수 있는 주제는 아직도 많다. 이렇듯 문화는 분명 우리 인류가 만들어내고 우리가 향유(또는 소비)하는 게 맞지만, 조금 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을 빚어가는 건, 문화이다.
다소 민감한 소재가 될 수 있겠지만, 난 종교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부모의 종교관, 그 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걸 세뇌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에게 초월적 존재와 그 세계관에서의 선과 악의 개념을 심어주는 것, 도덕체계의 기초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미치는 것, 이건 세뇌가 아닐까?
하지만 상대주의에 대해 조금 더 깊은 고민을 한 후에 알게 되었다.
이건 그 반대편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신이 없다고 믿는 부모 밑에서 아이들은 똑같이 신이 없다는 전제 하에 부모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 혹은 부모가 믿는 세계관을 철학적 고민을 하는 것을 권유하지 않고 받아드리게 한다.
이게 세뇌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중요한 건 두 가지를 뽑을 수 있다.
(1) 첫째, 신의 존재 유무. 실제로 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있다고 가르친 가정이 어린 시절부터 조기 교육을 제대로 한 게 되고, 신이 없다고 가르친 가정이 잘못된 정보를 심어준 게 된다.
(2) 둘째,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질문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사고의 공간, 이견을 검토할 여력을 남겨두었는가.
어린 나이부터 뭘 가르쳤다고 무조건 세뇌라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사고의 미니멀리즘이다.
That’s TOO SIMPLE.
And that attitude is simplistic.
그럼 명시적, 전통적 개념의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종교교육과 가장 비슷한 것은 무엇일까?
문화콘텐츠이다.
SF소설을 좋아하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며 자란 세대들은 우주에 대한 열망과 신의 부재에 대한 확신을 함께 공유하는 경우가 보인다. 그런 과학애호가들은 과학자들의 얕은 역사지식이나 철학적 사고를 과학적 사유와 혼동하며 자신의 가치관의 기초로 삼기도 한다.
청소년기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에 심취하며 자라온 학생들은 어떤 장르를 선호하느냐에 따라 갈리긴 하겠지만,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을 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누군가에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는 게 그 가치를 입증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장르를 불문하고 소년만화를 꿰뚫고 있는 중심사상인 ’강해지고 싶다‘ 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종종 더 깊은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왜 사는가’ 와 같은 철학적 질문, ‘선과 악은 구분가능한가’ 같은 질문은 ‘진격의 거인’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주로 무신론과 다신론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귀신, 요괴 등 영적 존재를 액션 만화의 소재로 삼기도 한다. 그게 아마 <귀멸의 칼날>이나 <주술회전> 등의 콘텐츠에 반영된 요즘 트렌드인 것 같다.
이런 문화콘텐츠의 소비자로 자라온 사람은 본인은 종교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보이지 않는 세계, 철학과 초자연적인 세상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면 다수가 애청 혹은 애독한 작품의 세계관에 동조되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거창한 질문이 아니더라도 앞서 다룬 연애관, 사랑관 하나에서만 해도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한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인생의 목표나 선과 악의 기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을 때, 문화가 종교를 대체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리처드 도킨스 조차 스스로를 문화적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시대라 종교와 문화의 구분이 더 세밀하게 되어야하겠지만, 일본의 예를 들어보자. 일본의 마쯔리 문화의 이면에는 신도[신토]적 세계관, 자연숭배나 귀신숭배의 종교관이 포함되어 있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런 세계관을 공유하지 않더라고 이런 의식을 문화 행사로 해석한다. 새해에 신사에 가서 점괘를 뽑는 주술적 행위도 문화라는 단어로 포함한다.
종교를 배제하는 사회주의 국가 중국도 남쪽, 서쪽 중앙정부와 멀어질수록 다른 특색의 미신과 토속신앙이 숨어있다. 삼국지의 장수 관우가 신으로 숭배 받는다거나, 돈을 관장하는 ‘재신’의 조각품을 집에 둔다거나, 풍수지리를 고려해서 침대를 두고, 생일잔치 시간을 정하는 등 마르크스 주의적 유물론이 어찌하지 못한 민생의 종교관은 21세기 중국에 계속되어 가고 있다. 학생시절 읽었던 교과서에선 그렇게 공산주의사상이 봉건미신을 물아냈다고 자랑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Tribalism: 부족주의
기능으로서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문화.
이외에도 현재 문화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현상을 꼽자면 그건 ‘부족주의’라는 어색한 단어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 tribalism이다.
이건 정치적으로 구분된 집단의 예가 가장 보편적이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과 힐러리를 지지 하는 이들의 대립 때 대두되었던 것이 바로 이 부족주의인데, 혈연보다 이 정치적 지지를 더 중요시 하며 같은 후보자를 지지 하지 않는 다는 것 자체로 많은 관계가 와해되는 것을 친구들의 SNS를 통해 간접체험 했다.
공화당 vs 민주당, 미국의 좌파 vs 우파, 진보 vs 보수의 대립으로 단순해석할 수 없는 이유는 각 진영에서 대변하는 가치관 뿐만 아니라, 소속감 측면에서 이 현상을 풀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파는 기독교 세력이 주류이고 가장 큰 목소리를 낸다.
LGBTQ이슈에 대해서도 그렇고, 낙태를 마주하는 태도에서도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한 비호감을 공유하면서도 실질적인 사회적인 영향을 구현해 내기 위해 공화당과 연대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모든 우파가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기독교인은 정치적으로 우파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종교인 유대-기독교*는 정치이전에 그들이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게 했다.
(전통적 혹은 종교적 유대인들도 구약성서의 가치관을 공유하기 때문에 미국에서 Judeo-Christian 이란 개념으로 묶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 좌파의 경우는 어떨까? 종교라는 공통분모가 없이 모인 이들은 이슈에 따라 뭉치고 흩어진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다양하기 때문에 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LGBT라고 하자니 Q가 소외되었고, Q만 넣자니 다른 분류들이 소외감을 느낀단다. 그래서 지금은 LGBTQIA+까지 알파벳이 증가했다. (L: Lesbian, G:gay, B: Bisexual, T: Transgender, Q: Queer (or questioning, sometimes), I: intersex, a: asexual, + 기타…)
LGB까지는 단합이 되었다고 하는데, T가 들어오며 스포츠 영역에서 여성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부각되자 요즘은 서로 상충되는 영역이 생겼다. (트랜스젠더/생물학적 남성 스포츠 선수가 여성들과 같이 경쟁하면서 메달, 출전기회를 잃게 되는 사례 등)
혹시 그런 좌파에게 종교를 대체하는 게 정치정당이며, 그들의 세계관에 없는 신을 대신하는 것이 정부이고, 예배를 대신하는 것이 집회가 되는 건 아닐까?
기독교인들이 일용할 양식을 신에게 구하고 최종 안식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좌파의 대다수인 비종교인이 정부의 연금과 노후보장을 희망으로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신이 없는 세상에서 한 국가 안에서 가장 높은 존재(기관)은 정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게 예전의 사회주의국가가 신을 ‘죽이고’ 국가를 최고의 권력이자 최고의 가치로 두려고 했던 것과 다른 부분은 어디에 있는 걸까?
물론 이런 tribalism은 정치 뿐만 아니라, 학계 안에서도, 종교계 내부에서도 존재한다.
부족주의가 문화트렌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만큼 이견을 가진 이를 배척하는 성향도 같이 관찰된다.
처음엔 예술이 인생을 모방할 것이고,
그 다음 인생이 예술을 모방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은 예술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예브스키가 맞았다.
예술이 인간의 삶을 모방하던 시대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인간이 예술을 모방하는 삶이 되었다. 아니,
아이들은 예술가를 모방하며 어른들은 문화콘텐츠로 여가시간을 채우며 정신세계를 구축한다. 그 중 일부는 분명 그런 예술(미디어) 안에서 삶을 좌우하는 철학을 정하고 존재 의미를 찾고 있을 것이다.
끌리는 걸 보는 것만으로는 우리는 문화가 정신을 이끌어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슬퍼서 슬픈 음악을 듣는 걸까?
아니면
슬픈 음악을 들어서 슬퍼진 걸까?
이 상관관계에서 주도권을 갖아야 하는 시점이 된 게 아닐까.
슬프기 싫으면 슬픈 음악대신 즐거운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우울을 이기기 위해 적극적인 행위 (운동, 식단, 수면시간, 시청 콘텐츠 조정)를 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 시대의 문화가 우리를 소비하게 될 거다.
부모로서 더욱 더 경계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비단 부모가 아니라 하루 하루 문화콘텐츠를 소비하는 모든 사람들이 해봄직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P.S = 4000개의 단어를 독파한 독자님들 위한 선물로 두번째 곡을 선공개 합니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선물은 풍경이고 음악은 덤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튜브에 업로드 하니 음질이 열화되서 기타톤이 너무 후져졌다. 고민된다.
제목은 Neverland.
역시 2010년 작곡&녹음. 지난 번에 공개한 곡 Fallen 과는 다른 장르의 곡이고 일본어로 가사를 만들어본 곡이에요. 군부대 교회에 있는 신디사이저를 적극활용해서 좀 더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어 시도해봤습니다.
https://youtu.be/eqddLIejjqE?si=Ohd8CN-AH9WnFM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