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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산 Jun 02. 2024

사랑에 대한 오해-On Love

지속가능한 사랑: 감정인가? 그 이상인가?

1. 들어가는 말: 사랑과 나의 역사


사랑이 뭔지 아주 일찍부터 궁금해 한 초등학생.

그 아이는 얼굴이 하얗고 키가 크고 좀 차가운 말투에 애매한 기사도*를 가지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같은 반 남자친구들을 제지하는 그런 ‘ㅈㅅ없는’ 남자애 아시나요?) 여동생이 있다는 것과 아버지에게 ‘여자는 전자기기처럼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던 것이 작용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버지는 역사를 좋아한 공대 출신 엔지니어이시니, 그 표현의 애매함은 널리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5학년 때, 6학년 선배가 유리색연필 껍질에 써준 편지라든가. 한국에서의 마지막 학기로 선포된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렛을 12개인가 받아본 6학년. ‘의리초코’와 ‘애정초코’를 굳이 구분하지 않은 숫자지만, 인기의 절정을 찍었던 그 시절의 무의미한 숫자를 남겨본다.


어린 시절의 ‘인기’란 것은 여러 상황에 따라 좌우되었던 것 같다. 키, 얼굴색깔, 체중, 체형, 성적, 목소리, 말투, 태도……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소위 ‘산동네’ 생활이었으니, 경제력, 가정배경은 없었다.

2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반장, 부반장을 쭉 하게 된 건 왜였을까. 키가 커서인가. 외모로 시작된 호감의 가벼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일찍 깨달았던 것 같다. 조금 차가운 ‘상판’과 달리, 마음을 열고 마주하면 물러터진 ‘정 많은’ 아이.


아, 이런 구차한 과거 얘기를 하다니.
하지만, 브런치작가가 된 이상, 글을 위해서 사생활공개는 일부 감수할 수 밖에 없다. (픽션을 쓸 껄… ) 내가 경험한 ’풋사랑‘은 요즘 초등학생, 중등학생이 생각하는 연애가 아니었다. 주로 편지들이었다. 어쩌면 연애가 아니라 ‘펜팔’로 분류하는 게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부터 시작된 해외생활.

출국 전후로 먼저 다가온 두 사람의 연이은 ’배신‘이라고 해야할까.


조숙한 그 아이가 초6, 중1을 거쳐 사랑에 대해 내린 첫번째 결론은 ……

불신: 먼저 다가오는 사람의 마음을 믿지 말 것.

꽤나 구체적이었다. 2번의 통계로 8X년 여자는 통으로 불신의 대상으로.


중2 때부터는 그렇게 사랑을 믿지 않는 남학생이 되었다.

그저 연애감정에 대한 배신감 뿐만 아니라, 떠나고 싶지 않았던 친구들과의 이별, 그리고 멀리 있어도 계속 이어질 거라고 약속 했던 유년시절의 우정이 시간과 거리를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든 것을 경험했던터라, 인간관계의 유효기간을 너무 일찍 자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가 지금 아무리 친해도 나중엔 잊혀지는 존재가 될 거라는 자각을 하고 살아가다보니, 스스로가 누군가의 연애감정의 대상이 되는 게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농구가 연애보다 의미 있다고 생각했고, 연애 감정을 표현하거나 받아주는 것보다 기타를 치고 노는 게 좋았던 건가보다.


다행히(라고 하기엔 지금 돌아보니 너무 안타깝지만) 외모의 절정은 하향곡선 그리기 시작했던 것 같고, 사춘기의 호르몬과 농구에 대한 열정, 바닷가 동네의 소금기 머금은 바람과 자외선, 부모님 조언 따윈 콧구멍으로 듣는 오만함이 선크림 사용을 권유 받았지만 무시하게 한 것들, 어느 덧 예전 처럼 자라지 않게 된 키를 키워보겠다며 음식섭취를 늘려봤지만 지금 알게 된 건강지식으로 보면 혈당치만 높게 한 무의미한 탄수화물뿐이었다. 하얀 피부는 붉어졌고, 여드름의 습격으로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나의 외모로 내게 호감을 느끼고 다가오는 이는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고3이 되었을 때는 미국 텍사스의 뜨거운 태양과 부적절한 상처관리로 흉터도 많아졌다.  
그나마 다가오는 이들에겐 friend zone이라는 철벽을 치고 살다가 대학생이 되었다.


이미 지루해졌을 독자의 마음을 읽어 여기서 약 450개 단어로 축약된 개인사는 멈추고 어른들의 사랑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개인적인 경험으로 사랑이란 거대담론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합리적인가?


우리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감정에 대한 선택을 한다.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짧고 좁은 경험들로 ’감정‘ 이라는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는 게 과연 합리적인 것이었을까?


구구절절 나열한 위 이야기 속 주인공의 논리적 오류이다. 그는 패턴을 분석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지금까지 그랬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일반화오류를 저질렀다.물론, 좀 더 고상한 척 하는 ‘애정관’ (혹은 사랑관)으로 변환시킬 수도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알게 된 영국 이중국적자 흑인 선생님/친구 K의 기숙사 방에서 처음 본 책 제목 <The Art of Love (by Erich Fromm)>.


지금도 ’사랑의 기술‘이란 제목이 왜곡된 느낌을 준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art를 예술로 이해 하지 않게 하는 목적은 달성한 것으로 본다.


빌려달라고 했는데, 거절 당했다. 중학생이 볼 책은 아니란다. 

아니, 정확히 애들용이 아니라고 했다. 

This is not for children. 
 


수년 후, 어머니께서 대학 입학 기념으로 선물을 고르라고 하셔서 난 그 책의 원서를 골랐다.

그 때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 학술적 접근을 시도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에리히 프롬의 세계관을 그대로 도입할 수 없었던 것 같지만, 그런 분류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미디어콘텐츠를 통한 간접 경험의 영향


로맨스코미디에 물들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 수많은 VCD, DVD로 본 영화들. 때는 로맨스코미디의 전성시대. 맥 라이언의 ‘유브갓메일’ You’ve Got Mail를 필두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로코’를 참 많이도 봤다. 맥 라이언(Meg Ryan), 쥴리아 로버츠 등 당시의 로코를 대표한 배우들의 영화를 안 본 게 없을 정도이다.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 패치 아담스 (Patch Adams 라든가 미세스 다웃파이어 Mrs. Doubtfire 등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의 영화는 물론, 헐리우드에서 나오는 박스오피스 상위권 영화는 다 봤다.


미국에 가서 좋아하는 영화들을 설명하니, 친구가 놀리듯 말했다.

‘Hey, guys. He  likes Chick-flicks’


-아. 내가 여자들이 보는 걸 좋아했구나.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후, 좀 더 남성적인 취향이 되기 위해 초등학교 시절 많이 읽었던 셜록 홈즈,도루팡 추리소설이 떠올라 스릴러 영화로 전향하게 되었다.)



책이 미친 영향

다시 시점을 중국에 있던 중학생 시절로 돌린다.

영화를 좋아하게 되니 책을 거의 안 읽게 되었다.


*발행 후, 섬뜩하게 살아난 기억 중의 책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있었다. 마음 속의 불신이 싹을 틔우고 있을 때, 아마 이 책이 실연/배신 후의 해외거주 중 중2병 소년의 감성을 증폭시켰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당시의 감정을 공책에 쏟아냈던 기억이 있다. (그 공책은 수차례 물에 담가 잉크가 흐려지게 한 후, 버렸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남매의 어머니께서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의 ’길은 여기에(道ありき)‘ 란 책을 빌려주셨다. 자서적 성격의 책 속의 주인공이 만난 한 남자의 태도를 통해 ’진짜 사랑은 저렇게 까지 할 수 있는 건가?’ 하며 사랑관의 또 다른 방점을 찍었다.


고등학교 시절은 연애를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존재적으로 연애불가의 태도를 취했으니 이성친구, 21세기 어휘로 ‘여사친’들은 생겼지만 호감이 생겨도 그걸 연애감정으로 이어가는 일은 없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알랭 드 보통의 ‘On Love’ (왜 나는 널 사랑하는가?)를 읽게 되었는데, 그게 또 다른 임팩트 포인트. 별 거 아닌 걸로 사랑이 시작되고, 헤어지면 죽을 것 같으면서도, 다시 아무렇지 않게 사랑하는 주인공의 모습. 그런 주인공이 되지 않고 싶었다.


휴학생시절, 전철의 광고에서 만난 책 제목 “사랑이란 이름의 중독 (Victim of Love: How can you break the cycle)”. 마침 어머니께서 늦깍이 석사에 도전하시며 공부하시던 상담학 때문에 책이 집에 있었다. ‘연애중독’이라는 개념을 깨닫게 되고, 연애라는 것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경계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의 사랑관이 멈췄더라면, 난 아마 지금까지 솔로, 싱글, 독신, 자유의 몸, 홀몸, 그 어떤 단어로 바꿔도 외로워 보일 그런 성인남성이었을 거다.



2. 사랑은 진화의 산물인가?


앞 장에서 진화론에 대해 다뤘다.

진화론적 해석의 맹점은 만사에 통용되는 한 마디로 복잡한 많은 사안에 대해 깊이 없는 결론을 내게 한다는 거다.


“ …… 가 ㅇㅇ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진화했다(했을 것이다). ” 라는 구조의 문장으로 모든 걸 해석한다.

 적자생존이나 자연선택의 개념을 적용시키기 어려운 ‘보편적 도덕성’이나 ‘희생정신’에 대해서도 ” 앞 문장 구조을 적용한다.

‘종교’나 ‘신을 향한 신앙’ 역시 인류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약간의 피해망상증(paranoid)가 생존에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텐데.


자, 그럼 그 주장을 ‘진화론’에 대입하면?

”진화론을 믿게 된 것은 그게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해도 이 문장은 위화감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말이 되는 가' 를 뛰어넘은 사실여부이다. 실제로 그런가......?


진화론의 관점에선 사랑이란 감정은 착각이다.


번식을 위한 생화학적인 반응이 만들어낸 성적충동이 있을 뿐이다.

이기적인 유전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는 목적이 인간의 행위를 조종하고 있을 뿐이다. 유전자를 더 많이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일처제가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을 억압하고 있다고 하는 이도 봤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자과 같은 방을 쓴 적이 두 시기 정도 있다.

입대 후 훈련소에서 한 번, 합숙 훈련을 하는 운전면허 단기연수에서의 숙소에서 한 번.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육체적 행위가 미치는 정서적 영향을 악용하며 여자의 마음을 쥐락펴락했다.

그런 사람들은 남성의 생물학적 본능을 따를 뿐이라며 파트너를 쉬이 교체한다.

여성도 비슷한 세계관을 갖게 되면 왜 남성만 생물학적 욕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반기를 들고 비슷한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성도덕’은 사회규범이며 특정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전인류적으로 공통적인 게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성에 대한 호감, 연애 감정, 성적 흥분 등이 생화학적 반응의 관점에서 설명가능한 건 맞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번식의 필요가 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사랑을 온전히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진화사회학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진화나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사랑’을 이어가는 인간의 선택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아이를 향한 부모의 사랑, 형제나 친구 간의 우애, 부부 간의 사랑 모두 단순히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라는 일반화를 시키기 때문에 동조할 수 없다.


한편, 정말 진화를 통해 인간의 사랑이란 감정과 성행위가 존재하게 되었다면,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번식의 행위‘가 왜 ’성병‘을 결과로 갖게 하는 지도 의문이다.

성욕이 식욕처럼 자연스러운 거라면, 많이 먹어서 생기는 위염처럼 자기만 아프고 말면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런 자연스러운 욕구의 분출을 통해 얻게 되는 결과 치고 성병은 너무 비합리적이라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3. 매커니즘과 의도


연애 감정, 부모의 모성애, 부성애를 생물학적 매커니즘으로 관찰하는 것은 가능하다. 옥스포드 대학의 두 학자 리처드 도킨스와  데니스 노블 교수의 토론을 통해 시스템 생물학에 대해 알게 된 후, 시스템생물학의 관점에서 현재 ‘이기적인 유전자 패러다임’에 부합하지 않는 지난 수십년 간의 연구와 관련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서 모든 생물이 살아간다는 해석에 대한 근거 있는 반문이 가능해졌다. (물론 그 이전에도 보통의 상식으로 ‘지능이 없는 정보’가 ‘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위자를 조종하고 있다는 이 해석이 미심쩍긴했다. )  

데니스 노블(Denis Noble) 교수의 ‘유전자는 악보에 불과하고 유기체/생명체가 연주자’라는 비유를 통해 유전자와 유기체의 관계를 해석했다.그 비유를 빌려서 ‘감정’과 ‘호르몬’ 등 기타 화학반응을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호르몬은 악보에 불과하고 감정을 연주하는 건 사람이다.


호르몬 때문에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는 건 주객전도된 해석인 거다. ‘감정의 발신처‘ (혹은 마음)에서 시작된 감정이 호르몬에 영향을 미치는 게 된다. 어떤 매커니즘을 알게 되었다고 그 매커니즘을 운용하는 주체의 ‘의지‘를 대체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부모의 사랑은 순전히 자신들의 노년의 보장을 위해서이고, 부부 간의 사랑은 후손을 낳고 유전자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는 해석은 너무 단편적이었다. 복잡한 현실을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했다.



4. 사랑은 단순히 감정인가?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 존재하는가?


이건 나를 아주 오랫동안 쫓아다닌 질문이다. 타지인, 외국인으로서의 삶이란 개인적 (편협적) 경험을 통해, 어차피 변해버릴 사랑이란 감정에 크게 가치를 두지 않고 추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아왔다.


당연히 어차피 변해버릴 사랑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결혼에 대해서도 별 흥미를 갖지 않았다.


아니, 사실 대학생이 되고, 모국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시작하니 마치 이제는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자라지 않은 나는 한국에서 자란 다른 학생들과 여러 모로 달랐다.

또 한 번, 또 한 번, ‘사랑’을 감정으로 정의한 채 도전을 하기도 도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감정은 사그라들었고,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빌린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통해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사랑이란 게 우연을 필연으로 착각하고, 이 사람 아니면 안 될 것 같다가도 결국 그렇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물론 영화라는 취미도 계속 이어졌다. 너무 눈물을 자아내는 영화는 싫어했는데, 돈을 내고 슬픔을 얻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대학시절 정우성, 손예진의 <내 머리 속의 지우개>나, 제니퍼 러프 휴잇의 <이프 온리 If only>를 보고 저게 사랑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라는 짧은 시간 속 픽션의 삶이 현실을 다 반영할 수 없을 거란 건 자명했다.


그러다가 좋아하게 된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란 영화. 거의 보지 않던 한국영화 중 가장 내 정서에 맞는 한국 사랑 영화였다. 아주 오랫동안 자라온 사랑. 가까운 곳에서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자라다가 어른이 되어 이루어지는 사랑.


바로 그런 사랑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억지 부리지도 않고, 인위적이지도 않으며 자연스러운.

앗, 그런데 초등학교 때 모국을 떠나 떠돌이 삶을 살아온 내게 그렇게 오랜 인연이 없었다. 내겐 불가능 한 사랑.


'인위적인 만남에 대한 거부감'은 서른이 넘도록 소개팅을 하지 않도록 했고, 그렇게 사랑을 ‘변치 않는 감정’으로 정의하고 ‘실패’를 반복하며 살아갔다.


‘이번은 다르겠지-’라고 포기할 만하면 다시 열리는 마음 속, 그 생각의 저변에는 ‘내가 아직 그 사람(the one)을 만나지 못해서’라는 <세렌디피티> 스러운 망상이 깔려 있었나보다.


내가 상처를 입는 것도 그랬지만, 타인에게 내 ‘어차피 변할’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든 호감을 아주 치밀하게 분석하고 시효성 (혹은 유통기간)에 대한 검증 기간을 갖기도 했다.

‘이게 사랑인가?’

그 불편한 두근거림.

하지만 대부분의 끌림은 그 대상을 알아갈수록 사라졌고, 그 검증 기간을 통과하는 동안 나는 소위 ’friendzone’에 자리 잡아 (상대방 입장에서) 연애가능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호감 하나 하나를 검증하는데 1-2년, 3년이 걸리는데 연애가 가능할리가 없었던 건 아닐까?




5. 지속가능한 사랑?


사랑을 연마할 수 있는 ‘기술art/craft’이라고 표현한 에리히 프롬의 말은 C.S루이스의 문장을 통하기 전까지 내게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나보다. 그러던 어느 날, C.S루이스의 책에서 이런 표현을 마주하게 되고, 그제서야 <사랑의 기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생략) 여러분이 저처럼 많은 이혼을 보게 된 후에는 애당초 ‘쌍방향의 사랑’에 대해 너무 큰 강조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랑을 지속하게 하는 건 ‘자유 의지free will’이지, 느낌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느낌이 있을 거라는 걸 약속할 수 없다.‘
(원문) “But, as I said before, that is what is wrong with the whole business. When you have seen as many divorces as I have, you will know that there is too much emphasis on mutual love in the first place. It is free will and not feelings that make love last. You cannot promise to always have a feeling."

C.S Lewis (Mere Christianity, Book 3, Chapter 6).


사랑은 당연히 쌍방향인데, 이게 무슨 말이지?


다른 책에선 이런 언어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사랑은 애정의 느낌이 아니라 최대한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선에 대해 지속적으로 기원wish하는 거다.

Love is not affectionate feeling, but a steady wish for the loved person’s ultimate good as far as it can be obtained.

- C.S Lewis,  The Four Loves-


사랑은 그저 feeling,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


우리의 기분은 생화학적 매커니즘으로 구현되는데, 그 생물학적 요소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2주만 햇볕을 못 봐도 생애에 대한 애착이 급감하여 ‘하면 안될 생각’을 하기도 쉬운 인간이 있다. 배가 고프면 짜증이 나고, 몸이 아파도 짜증이 난다.


그런데 늘 변하지 않는 기분. 변하지 않는 느낌이 있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친구의 결혼식 주례사 중 들었던 말도 나에게 유쾌한 한 방을 날렸다.

“성경에서 아내를 내 몸 같이 사랑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 단어가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단어랑 같은 단어래요”



아.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게 느낌일리가 없었다.


사랑은 동사라는 말도 그제서야 이해가 됐다.


사랑의 정의를 ‘의지를 가지고 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하니 이제 좀 뜬 구름이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한 시절 꾸준히 보던 미드 <Grey’s Anatomy>의 주인공 부부 의 대화도 떠올랐다.


결혼을 고민하던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한다.


데렉(남):
우리 서로에거 어떤 걸 약속할까?

메러디스(여):
날 싫어할 때도, 날 사랑할 거라는 거  

Grey's Anatomy (S5 E24) 중


from Grey’s Anatomy

(맥락 파악을 위한 전문)

Derek: What do we want to promise each other?
Meredith: That you’ll love me even when you hate me
Derek: To love each other even when we hate each other…No running. Ever. Nobody walks out, no matter what happens.
Meredith: No running.
Derek: What else?Meredith: That we’ll take care of each other, even when we’re old and smelly and senial and if I get alzheimers and forget you…
Derek: I will remind you who I am every day…To take care when old, senile, smelly. This is forever. Sign?
Meredith: This is our wedding? a post it…


예전부터 이어져온 식상한 클리셰Cliché 스러운 우리의 전통적인 결혼서약도 그랬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것.


그러고보니 거기에서도 동사였다.

옛날부터 선조(?)들은 알고 있었나보다.


그 후, 유튜브에서 보던 구글 직원들을 위한 강연 시리즈 Talks at Google.

이 강연에서 팀 켈러 라는 작가가 자신의 저서  The Meaning of Marriage 대해 설명했다. (한국어 제목: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 강연은 흥미로왔다.

그는  지적이고 위트 있는 사람이었다.


팀 켈러 강연

나중에 그의 책을 읽으며 그 전까지 ‘내 자신의 사랑관’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모두 영화와 드라마 등 내가 소비한 문화콘텐츠에서 구축한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사랑에 대한 재정의가 이루어지고, 나의 삶에는 결혼 이라는 가능성이 눈에 들어왔다.


한 편, 대학교 때 친구가 선물해준 오래된 킨들이 직장생활 중의 독서습관을 재개하게 되었다. 닉 부이치치 란 뉴질랜드 사람의 Love Without Limits (닉 부이치치 부부의 한계를 껴안는 결혼) 란 책도 한 몫했다. 팔 다리 없는 사람도 저렇게 용감하게 사랑하는 이를 만나 가족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는데, 사지멀쩡한 나에게도 희망은 있어보였다.

Nick Vujicic 와 Kanae Vjicic 부부의 결혼 이야기


6. 사랑과 연애의 무덤?


내 생각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게 사랑이다.


하지만 주변에 30대 중후반의 지인들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과거의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the right guy(woman). 혹은 ‘the one’의 출현을 기다리며,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혼자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너무 소중하고, 절대로 타인을 위해서 날 바꿀 필요가 없어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줄 그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믿음


너도 나도 그런 아름다운 말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니, ‘있는 그대로의 나’ 라는 게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거길래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있는 그대로의 나도(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계속 변해간다는 게 사실이란 것도 깨닫게 되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게 타인을 사랑하는 것과 상충될 때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희생’의 가능성도 배제한 관계를 기대해야 했다.


이런 낭만적 환상은 문화콘텐츠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인간은 현실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할 때, 비현실적 기대를 가지고 판단을 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없다.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면, 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소위 ‘사랑’이라고 부르던 호감과 열정의 초반이 도화선이 되는 건 필연적이다. 그 후, 어느 시점에 한 약속의 태도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며, 계절이 반복되고, 달이 차오르고 얄상해지는 반복과 같이 나의 기분만을 의지 하지 않고, 우리의 약속을 바탕으로 서로를 아끼고 따뜻하게 대하는 것.



Erich Fromm, C.S Lewis, Tim Keller.

이 세 사람의 작가의 책이 어쩌면 평생독신이 되어 고아원 원장이 될 지 몰랐던 독거청년의 미래를 바꿨다.

(아 물론, 그 운명을 바꾼 건 아내이다.)


물론, 내가 생각한 약속을 기반으로 하는 사랑결혼을 전제로 한 사랑이고, 결혼 안에서 꼭 필요한 사랑이다.



‘연애감정’만을 사랑이라고 전제해야 수많은 불륜 소재의 콘텐츠가 정당화 된다. 결혼의 기반인 감정이 (당연히) 사그라들었으니, 연애 초기의 감정을 주는 또 다른 사람과 “사랑”을 시작해야,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행복이 실현 가능해지니깐.


그건 헐리우드 영화의 2-3시간 짜리 사랑이고, 엔터테인먼트 섹션에서 ‘성격차로 헤어지며 억단위 위자료를 위해 싸우며 종결하는 결혼의 길이다. (그나마 길고 긴 시즌을 이어간 드라마 정도 되어야 늘어지는 스토리 속에서 좀 더 현실적인 고민과 갈등을 충분히 관찰 할 수 있다)


결혼 공부를 하다


+이런 결혼관이 확립된 게 2016년 말~2017년.

나보다 2년 먼저 결혼한 친구(나이는 어리지만)에게 보낸 카톡과 선물에 내가 ‘결혼 공부‘ 후 갖게 된 생각을 보내기도 했다.

2017/2/8 북경 고등학교에서부터 이어진 인연의 송ㅇㅇ 군과의 대화 중

자취집을 결정할 때도 열심히 발품을 팔고 임대차법을 공부해보고, 작은 전자기기를 살 때도 꽤 많은 조사를 해보는 사람으로서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보니 결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적 고민도 필요했다. 그렇게 결혼에 관해 쓰여진 책을 여러 권 읽어보고 위와 같은 철학(?)을 같게 된 거다. 결혼 축하와 함께 교보문고에서 산 멋진 노트를 선물하며 저런 의미도 부여했다.

당시 결혼도 안한 형으로서 저런 주제 넘는 훈수를 둔 걸 비웃지 않고, ‘브런치 작가’가 될 미래를 예견한 동생에게 박수를.


물론........ 나만 이런 생각을 갖는다고 결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가을 만나게 된 사람이 나와 같은 결혼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사람은 감정적으로도 나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감정으로서의 사랑’을 믿지 못하던 나에게도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해 겨울에 이미 서로에 대한 확신을 갖고, 다음 해 여름,  ‘서로를 싫어할 때도 사랑할 수 있는’ 결혼이라는 튼튼한 약속 안으로 들어갔다.



7. 부모로서의 경험이 미친 영향


그렇게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었다.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고 나니, 헐리우드 영화, 로맨틱코미디 속의 사랑이 얼마나 단편적인지 하루 하루 깨달았다. 아내를 만나러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제3의 도시에서 만나기도 하고, 신혼초기를 각자 다른 나라에서 보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늘 함께다.


늘 함께 한다는 건 좋은 모습만 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란 건 내 모습만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모습도 당연히 포함한다.


절대로 결혼상대 (후보)로부터 보고 싶지 않았던 가족구성원의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 그렇게 피한다고 피했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안에도 숨어있었다.

단점은 우리 모두 안에 숨어있었다는 걸 간과했다.



아무것도 못하던 아이를 사랑할 때는 그 희생이 그렇게 당연하고 쉬웠는데, 자유의지를 언어를 통해 표현하기 시작한 어린이들이 되자 ‘자식사랑’이란 것이 그렇게 말랑말랑한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 속, 미디어를 통해 주입된 “무조건적인 포용과 용납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생각”. 아이 안에서 드러나는 이기심과 폭력의 잠재성을 마주할 때, 그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낭만인지 또 다시 깨닫는다.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나봐” 라고 말하는 유치원 3개월차 큰 딸의 말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날 사랑하지 않는 거다’란 잘못된 전제가 숨어있었다.


지난 5-6년간 시청해온 영어권의 유신론과 무신론 토론영상.

종종 ‘기도가 이뤄지지 않아 신이 없다고 믿는다’는 사람의 사례가 떠올랐다. ‘신이 존재한다면,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한다’라는 생각의 근거는 사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굉장히 고통스러운 순간에서야 그런 말을 하게 될 것 같은 상상이지만, 단순히 보면 나의 딸이 ‘아빠, 과자 안 사주면, 우리 아빠 아니야. 난 아빠 없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거다.


한낱 인간도 자식에게 가장 좋은 걸 주겠다고 늘 고민하는데,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있다면 ’어련히 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게 더 속 편하고 현실적인 전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결혼은 연애의 무덤이야‘ 부터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야‘, 그 외에도 많은 오해가 떠오른다.


서로 감정의 동요로 쉬이 떠날 수 없는 사람, 법적인 효력이 있는 선언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안전감‘. 그 안전감 위에서만 드러낼 수 있는 두 사람의 본 모습. 그런 진실한 모습의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진짜 사랑’을 키우는 게 아닐까.


결혼 속의 사랑은 고작 얇은 고무조각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한다는 배려’의 ’사랑‘과는 무게도 깊이도 색깔도 의미도 다르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랑. 그게 연애감정인지도 모른다. 그게 왔다가는 감정의 속성이다. 지금은 있지만 수년 후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감정을 관계 존속 여부를 결정하는  조건으로 삼는 순간, 연애는 소비주의적 행위가 된다.


내가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이 되면…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건 픽션용이지 현실의 목표가 되지 않는 편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이 시대의 유행하는 사상과 워낙 반대편 스펙트럼에서 사랑의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든다. 하지만, ‘낭만’의 탈을 쓴 허상이 더 많은 사람들을 ‘자유’란 이름으로 구속하고 있는 이상, 이 글은 발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 누군가는 80세가 되고 90세가 되어 ‘결혼 하길 잘했어’ 라는 말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어차피 유명 브런치작가가 아니다. 소수의 진실된 목소리로서의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되는 것으로도 만족한다.




Writer’s Now 


둘째, 첫째, 열이 이틀나고, 잘 때 기침하는 날 하루. 그렇게 4-5일의 텀을 가진 ‘감기’ 같은 바이러스가 아이들을 거쳐 저에게도 왔네요.


글을 쓰는 중에도 관절이 욱신욱신하는 38도 중후반대입니다.

그런데 코로나를 제외하고는 해열제도 감기약도 먹어본 적 없는 똥고집입니다.

면역시스템 이럴 때 한 번 돌리고 업데이트 해야죠.

아이들도 만 3세가 지나니 그런 도전을 함께 하고 약을 안 먹어도 감기는 낫는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물론, 관자놀이 온도로 38.5-38.8까지 가도 컨디션 좋은 아이들이라 이런 아빠와 같은 도전(?)을 하고 있죠. 열이 면역반응이고, 열로 나쁜 애들과 싸우고 있다는 걸, 알면 너무 오래 지속 되지 않으면, 너무 힘들지 않으면, 그 열이 내가 건강하다는 증표로 해석되기도 하니깐요.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고 부딪히는 것도 어쩌면 그런 것 같아요.

사랑하니깐 서로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고, 그런 마음이 불완전한 언어를 통해 표현되고 전달 되는 과정에서 서로 아프게 하는 거죠.


듣는 사람의 해석력이 또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한다. 나에게 좋은 걸 기대한다. 그래서 악의를 가지고 나에게 말을 뱉는 게 아니다- 라고 끊임없지 remind해줘야겠죠.


사랑에 대한 주저리 주저리.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약 3200개의 단어를 독파해주신 독자님께 감사의 박수를 드립니다.

제 앞에 있으면 미국식 hug라고 드리고 싶을 정도에요.


사랑에 대한 오해 편을 마치며, 연애가 결혼의 무덤이란 테마로 썼던 자작곡의 가사를 나눠봅니다.




Love Until Heaven

(한글가제: 결혼은 무덤…?)


Verse>

결혼은 무덤이래.

“언제든 끝날 수 있는 연애”의.


결혼은 시작이래,

‘끝낼 수 없는 참사랑의’


어렵게 찾은 서로가,

완벽하진 않더라도/


하늘이 주신 선물인 걸 잊지 말고 -


<Chorus>

기억하자. 우리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에도

사랑해주시던 부모님의 사랑을.


서로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도 사랑해주며

변치 않을    사랑을      연습해


*


2>

결혼은 무덤이다, 혼자 살아온 네 자아의.

결혼은 시작이다, ‘감정보다 더 큰 약속’의.


살아온 가족의 연속이 아닌

부모를 떠나 하나 된 두 사람 이제


<chorus>

기억하자. 사랑스럽지 않은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신 영원 한 큰 사랑

서로가 -  너무 미울 때도 사랑해주며

나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우리’ 를 위해



<outro>

We’ll love despite our feelings.

We’ll love because we promised.

love because we’re loved first,

forgive ‘cause we’re forgiven.


love despite our feelings.

love because you promised.

love because we’re loved first,

Love until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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