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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산 Jun 30. 2024

철학에 대한 오해-On Communism

시와 편지로 살펴 본 칼 맑스: 공산주의는 경제이론일까

People don’t have ideas.
Ideas have people.
사람들이 사상을 갖는 게 아니다.
사상이 사람들을 점유한다.


-Carl Jung
칼 융-


<목차>
1. 철학의 영향
2. 주관적 경험 
  1) 내가 경험한 공산주의
  2) 자본주의 대표 국가에서의 삶
  3) 다시, 계몽? 다시, 공산주의! 
3. 공산주의: 경제모델의 차이인가? 
   1) 자본주의 
   2) 공산주의의 시초(?): 칼 맑스 
4. 시인 맑스: 잘 알려지지 않은 글들을 살펴보다
   1) 청년 맑스의 시
   2) 편지: From Marx & To Marx 
    3) 맑스의 '친구들'
    4) 칼 맑스의 사생활 
5. 공산주의와 종교 
6. A Total Life Inspection: 문장 하나 말고 철학자의 삶을 살펴보기 
7. 에필로그: 우리 삶에 녹아든 철학 
  - 맑스주의는 끝난 걸까: 문화적 맑시즘의 발아?




1. 철학의 영향


지난 글에서 문화가 사람들의 가치관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시대의 문화 속 창작물에 담겨진 철학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다.

이번 글은 거기서 이어진다. 철학이 개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서 시작해보려한다.


학문으로서 너무 어렵기만 한 것 같은 철학.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아무도 안 궁금해할 질문을 진지하게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의 단어이다.

하필 대한민국에서는 ‘철학관’이라는 이름의 간판을 단 곳에서는 이름을 짓는다거나 ‘주역’과 ‘사주팔자’를 보는 곳도 있어 철학이란 단어의 뜻이 더 혼란스럽기도 하다.


우선 안심해도 될 부분. 나는 이 글을 통해 어떤 철학을 개념적으로 설명한다거나 철학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철학에 대해 일상생활 속에서 들을 수 있는 내용은 이렇다:


난 철학에 관심 없는데?
전 딱히 철학이 없어요.
제 목표는 ㅇㅇ세까지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 사람 멋있잖아요. 확고한 자기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우선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철학 없이
혹은 철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건 가능한가?


일단 철학가들은 일반대중이 철학에 관심이 없는 것에도 철학적인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건 차치하자.  철학은 개인의 일상 속의 선택에서부터 경제 사회나 국가체계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원시불교와 같이 철학에 가까운 사상체계를 포함시키고, '기독교철학'이란 단어까지 포함시키면 철학의 범주 안에 종교를 집어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더더욱 철학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는 주장엔 힘이 실린다.


그래서 위 질문의 답변은 "불가능하다"가 된다.


아주 소수의 사람이 아니고서야 철학이란 주제가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취미‘나 ’열정‘의 분야라고 말하는 이는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다. 대학 전공을 선택해야 할 때, 철학과는 염두에 둔 적이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어 살아갈수록 우리 삶 속에 숨어 있는 철학을 마주하게 되는 걸 발견했다. 드러나지 않고 숨어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큰 질문을 맞이할 때 마다 그 영향을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에 철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의 삶에 맞닿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영역 속에 숨어 있는 철학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2. 주관적 경험


(1)  내가 경험한 공산주의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언급된 민주주의를 배우다가 6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중국으로 '이사'를 갔다.

난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 국가로 이사를 간 것으로 생각했는데, 중국친구들의 시선에서 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선배들이 후배에게 '홍링진'을 매어주는 의식 (출처-chinadaily.com.cn

학생들은 '홍링진红领巾' (Pioneer Tie)이란 것을 메야했다. 한국에선 '빨간 마후라'를 연상시킬 이 '패션아이템'은 '소선대원少先队员'의 중요상징이다. (나름대로 명예로운 아이템이고 문제아들은 착용못한다)

중국에선 이 '홍링진' (빨간손수건) 이 중국의 국기의 한 구석을 대표한다고 하고,  '혁명선열'들의 피가 물들어 있다고 한다.  소련에선 그 삼각형 모양에 대해  '지식, 우정, 완벽'의 뜻을 더한다. 그걸 메고 ‘국기에 대한 경례’ 시간에 나는 아무 것도 없이 아무 동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내 ‘민주주의’를 ‘수호’했다. .

러시아핛생들

중국에서는 '사상정치思想政治'라는 수업이 있었다. 외국인으로서의 나는 처음엔 그걸 '세뇌'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듣지 않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시험, 중학교 졸업시험 등 시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다보니 학생으로서 모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상정치' 수업의 내용도 듣기 시작했었다.


난 그 때까지 중국이 공산주의국가라고 생각했는데 교과서에서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공산주의국가는 '최종 이상향'이고 사회주의는 그 길로 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마르크스/맑스, 레닌, 엥겔스 등의 이름을 중국어 한자로 먼저 만난 나는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그저 사람 사는 세상의 한 체계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일반 대중들은 태어난 국가의 시스템에 맞춰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사상의 차이에 대해서 부각시켜봤자 교우관계에 도움이 될리도 없었다.


마침 내가 처음 겪은 중국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등소평[鄧小平[덩샤오핑]]이 닦아놓은 길을 걷기 시작한 상태였다. 지금은 칭다오가 관광도시로 예쁘게(?) 개발되어 해안도로가 제법 운치가 있지만, 내가 살던 시절엔 그저 공사판의 연속이었다.

중국에서의 삶을 시작한 그 다음 해, 등소평은 사망했고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던 과외선생님은 정말 하염없이 울었다. 국가의 한 인물의 죽음에 대해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는 선생님이 이해되지 않았다.


중국에선 리더십계층(?)의 '높은 사람'들의 비평이 없다.

과실은 가르치지 않는다.

미담만 잔뜩 배웠다.

지금도 중국 검색엔진에서는 X에 대해 '이혼'을 검색해봐도 아무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교과서에는 연구원들이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잠들었는데 돌아다니던 주은래[저우 언 라이] 총리가 옷을 덮어주었다는 일화를 읽은 기억이 있긴 하다. 덩샤오핑도 뉴스에 나온 모습으로는 시골에서 마주칠 수 있을 법한 정겨운 할아버지였다.


고등학생 때는 북경에서 보냈는데, 학교 친구의 아버지가 미국으로 망명한 이유를 듣다가 처음으로 '문화대혁명'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 4년 넘게 사는 동안 넓고 넓은 천안문광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는 거다. 그 광장에 있는 커다란 그림 속 모택동/마오 쩌뚱의 통치 하에 중국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 당시 사춘기 소년를 해외에서 겪고 있던 와중에 환경에 대한 적응과 나의 생존이 최우선이었다.


돌아보면 6학년 2학기에 시작된 중국에서의 삶은 사회주의국가에서 선호하는 철학이 버무려져 유물론적 사상이 공기 중에 가득했었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공휴일로 지정한 크리스마스도 중국에선 그저 12월 25일에 불과했고, 난 크리스마스에도 학교를 갔다. 그래도 난 유물론이 뭔지 관심도 없이 시험 문제의 빈칸으로서의 답으로만 다가왔다.


중국어 한자로 쓰여진 马克思[마커스]로 발음되는 맑스가 어떤 사람인지도 관심이 없었고, 그를 언급하면 꼭 세트로 따라다니는 恩格斯[언거스] '엥겔스'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몰랐다. 유일하게 역사관이 부딪히는 6.25 전쟁/사변 (그들은 '조선전쟁'이라 부른다)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진작에 포기했다.


그렇게 나는 공산주의든 사회주의에 대한 감상은 깊이가 없었다. 아니, 흥미도 없었다.


'그저 모든 민중이 평등하게 같은 걸 누리라고 하는 건가 보다'

'그래. 의도는 좋았는데, 인간의 본성 속 잠재적 악을 무시해서 결과가 좋을리가 없지'


단순히 그게 전부였다.



(2)  자본주의 대표 국가에서의 삶


난 중국에서의 삶의 염증을 느껴 별 열정과 열망 없이 고인이 되신 어머니의 친구분께서 알려주신 매일경제 신문의 광고에 나온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신청하게 된다. 소정의 신청비와 항공비용을 내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거주비는 없었다.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는 호스트 패밀리는 나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고1을 마치고 도전했던 고등학교 2학년의 삶은 미국 텍사스 주의 공립학교에서 보냈다. 내가 지내던 인구 3000여명의 작은 '마을'이 미국을 대표할 수 없지만, 내가 경험한 2000년대의 미국에서의 삶은 실용주의, 개인주의가 보편적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고등학생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을 할 기회는 없었다.


학교 생활에서 인상 깊었던 것 중 아래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었다:

1. 선생님이 학생에 대해 강력한 통제권이나 권위가 없어보였다는 것이다. 선생님에 따라 나를 Mr. 를 붙여 호칭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학생은 숙제를 안한 이유를 묻는 선생님에게 ‘because I’m lazy’라고 했으니. 학생이 교사에 대한 ’공경‘도 유교문화권과는 결이 달랐다.

2. 역사선생님이 보여준 불과 미국의 지난 행보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였다. 팽글팽글 도는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쓴 할머니 선생님은 U.S History 시간에 과거 미국이 잘못한 것들이 나올 때마다 신랄하게 비판하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3. 크리스천인 친구들은 아침에 어느 구석에 모여 함께 무슨 모임을 했는데, 학교라는 공간에서 그런 걸 하는 게 신기했다. 중국과 달리 이 곳엔 종교의 자유가 있었다.


이런 것들은 학생으로서 중국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신선했다.



그러던 어느 날, 2001년 9월 11일.

컴퓨터 수업시간이었다. (프로그래밍은 아니고 워드나 엑셀 등을 가르치는 '비지니스 ㅇㅇㅇ'어쩌구)


담당선생님은 왜인지 교실에 있는 TV를 틀어놓으셨다.

당시 난 아직도 미국에서 보내는 첫 학기에 적응이라 정신없는 교환학생이었다.

아무리 회상해봐도 놀랐다거나 걱정했던 기억은 없다.

어렴풋이 남은 기억들은 뉴스 화면의 장면이 있는 영화를 틀어놓은 건지, 고층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나는 장면.

할머니께서 장손이 있는 미국에서 테러사건이 있었다며 걱정하시더라는 부모님의 전화를 받았던 것도 기억난다. 뉴욕에서 텍사스 주는 약 2830 km 굉장히 먼 데, 그걸 알리가 없으시니. 멀리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도.


그렇게 이슬람 극단주의단체 '알카에다' 소속의 19명의 테러리스트가 납치한 비행기가 미국의 가장 높은 건물 두 동을 파괴하며 2996명이 사망했다. 미국을 충격에 몰아넣은 격동의 순간. 그 순간이 미국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 지 고등학생인 나는 알 수 없었다.

몇년 후, 대학생이 되어 다큐멘터리론을 공부하다가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란 영화도 보게 된 것이 또 이 사안을 이해하는데 또 다른 가능성을 마주하게 되어 더 혼란스러웠다. 다큐멘터리를 봤을 때는 마이클 무어가 말하는 것이 숨겨진 진실이라고 받아드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미국 역사시간에 배웠던 공산주의 소련이나 북한이 아닌 중동국가 테러단체에 의한 공격.  그렇게 한 종교가 다시 한 번 '악'이란 단어와 함께 쓰이게 되었다.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사건 이후, 불붙여진 종교에 대한 경계심은 ‘반종교적’ 태도를 지닌 학자들에게 창작욕구를 불러일으킨듯 하다.


그 후 약 5년 1개월 후, 세상은 리처드 도킨스의 책 <The God Delusion> 을 맞이한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철학과 역사에 대해 책을 내는 트렌드가 생긴다. 도발적으로 종교를 공격하는 과학자들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렇게 과학주의의 시대에 과분한 권위를 부여받은 과학자들이 전문영역 외 분야에 대해 피력하는 의견을 가슴 속에 새기는 대중이 늘어났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신, 만들어진 위험 > , 스티븐 핑커의 <인간의 선한본능> <다시, 계몽> 등의 책에서 취하는 태도는 ‘반종교적‘인 공격적 무신론을 ’계몽‘의 이름으로 포장했다. <알쓸신잡>에 출연한 류시민 님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학자들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하는 걸 경험했다.

잠깐.


종교가 사회에서 척출 되어야 하는 악의 근원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을 새겨들어볼 필요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종교를 배제하고 무신론적 세계관을 강조한 유물론의 사회는 역사 속에 존재한 바가 있다.


바로 공산주의의 시대이다.



(3) 다시, 계몽? 다시, 공산주의!


공산주의 출현 약 100여년 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을 필두로 유럽에선 계몽주의와 맞물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혁명가들은 공격 대상을 정했고, 억압받던 피해자인 대중은 권력층(가해자)에게 반항하고 ’정의‘를 이룩해낸 것처럼 보였다. 분명 프랑스혁명 이후, 권리가 대중에게 넘어 간 것은 사실이다. 군주제/왕권/교권이 약해진 지고 사라진 것 맞다. 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구도가 획기적으로 달라져 만민이 평등해졌을까? 계몽주의는 역사의 흐름상, 자본주의의 시작과 연결되고 산업의 발전은 결국 또 다른 상하구조의 질서로 이어진다.  

계몽주의의 효과를 과대포장하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계몽주의와 유물론적 무신론이 다수가 된 사회에서 평화가 확장되어야 한다. 종교가 전쟁을 부르는 문제라고 규정하기도 했으니.

종교를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과학적 무신론'을 사회전반에 강요하는 것을 국가정책으로 시행할 수 있었던 나라들이 있었다. 그게 유토피아를 꿈꾸던 공산주의 국가들이다.


구소련 Soviet Union은 어떨까?

중국의 공산주의혁명은 어땠나?

자본가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선‘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일어난 혁명의 결과는 모두가 평등하게 나눠갖는 사회로 이어졌던가?

레닌은 민중이 충분히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를 운영하기엔 부족하다고 봤다. 그렇게 국가를 이끌 집단이 생기고 그 안에서 물론 리더가 생겼다.


모두가 평등한 삶이 이어졌을까?

모두가 평등하게 나눠받은 건 빈곤과 죽음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역시 다른 이름과 다른 사상을 가진 지배층이 탄생했을 뿐이고 진정한 의미의 평등은 이룩해내지 못했다.

결국 당시 지배계급에 대한 혁명을 하고 자신들이 지배계급이 되었을 뿐이다.


역사속에선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냉전이 종식되고 공산주의의 가장 큰 세력인 소련이 해체된다.


중국도 덩샤오핑 주석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자본주의의 형태를 사회주의 안에 도입시키는 실험을 했다. 내부에서는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 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외부인에선 그렇게 비추어졌다.


그렇게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결과는 자본주의의 승리로 마무리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이 요약하는 것처럼 ’사유재산의 폐지‘ 차이일까?


서양의 자본주의의 시초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라고 하면 공산주의의 시작점은 칼 맑스와 엥겔스 ‘공산당선언문 (communist manifesto)’ 이다. 그 후에 자본론이란 것도 쓰여졌지만 한참 후의 일이다.




3. 공산주의: 경제모델의 차이인가?



(1) 자본주의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공산주의는 주로 경제 모델로 인식되어진다.

초등학교 반공교육에서 가르치는 단순화된 '민주주의는 선, 공산주의는 악'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게 그렇듯이 경제이론에는 철학적 전제가 숨어있다.

세계관이 내재되어있다.

자본주의의 경제이론 속에는 시대의 철학이 드러난다.

칼 맑스(카를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자본주의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Adam Smith)도 단순히 ‘경제학자’ 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닌 철학자였다.

그는 인간의 선한 속성과  개입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제대로 움직일 거라고 전제했다.


애덤 스미스에 대해 전혀 모를 때, 경제에 관한 기사나 책을 볼 때 나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뭐, 초자연적 신이 시장에 개입이라도 한다는 건가?

난 돈이 없었음에도 돈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생이 되어서도 경영/경제학부에 관심이 없었다. 방학 때 부모님 지인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 수학 과외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뭘 해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일주일에 한 번, 두 번 수업을 해주고 월 50-60만원을 버는 게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 노력에 비해 너무 큰 돈이 들어오는 것 같아 뭔가 마음이 불편했고, 결국엔 과외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경제관념이 없던 대학생이 자본주의에 대해, 애덤 스미스를 알리가 없었다.


사회인이 되고 3-4년차였나. 주5일의 근무일로 이루어진 패턴 속, 약속이 없는 수요일에는 퇴근길에 영화관에 들렀던 시기가 있다. 나름대로 전략적으로 한 주의 중간에 정신적 휴식을 배치한 거다. 그러다 이런 광고를 만났다.

넌 넷플릭스 보니? 난 넷플릭스 산다


그제서야 경제에 좀 더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불로소득’이라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주식은 도박으로만 보였다. 통장에 현금을 쌓아놓는 건 그냥 돈을 썩히는 거라고 말하던 후배가 적극적인 투자를 권할 때도 난 설득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광고는 묘하게 나의 실험정신을 이끌었고 '자본소득'에 대한 실험으로 이끌었다.



애덤 스미스가 도덕선생은 아니었지만 그의 저술을 통해 말한 바를 토대로 미루어봤을 때, 그는 현실(이 세상)에 대해 두 가지 가정을 한다.

- 신이 존재하고 이 현실을 창조했으며 현실에는 가치가 있다

- 신은 인간이 신의 의지를 이 땅에서 실현하길 바란다


학자들은 그가 형식적 기독교인이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같이 무신론자였다는 등 의견이 갈린다. '자연신학natural theology'를 가르친 적은 있다. 학자들의 의견은 차치하고 그가 쓴 글을 직접 보자.


그의 사상은 ‘도덕감정론 (Theory of Moral Sentiments)’ 에서 드러난다.


(원문) 자연의 지혜로운 창조주(The All-Wise Author of Nature)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이 형제들(동족)의 감정과 판단을 존중하도록 가르쳤다. 타인이 자신의 행동을 인정해줄 때 더 기뻐하고, 부정할 때는 더 상처받도록 만들었다. 그 자연의 창조주는 인간이 인류의 '즉각적인 판관'(immediate judge)이 되도록 했으며 많은 다른 면에서처럼 인간을 자신(신)의 형상으로 창조하고, 지구상의 대리자로 임명하여 그의 동료들의 행동을 감독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권력과 관할권이 그에게 부여되었음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도록 배웠으며, 그가 자신의 비난을 받았을 때는 더 겸손해지고, 그가 자신의 칭찬을 받았을 때는 더 고양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중-
*(1) 원문 최하단 배치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애덤 스미스를 어떻게 설명할 지 궁금해져 네이버 지식백과를 찾아봤다.

도덕감정론을 설명한 걸 보자 :


.....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사실상 처음 거론한 것도,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때 사회를 분명히 이롭게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도덕감정론]에서였다. 자기 이익을 위하는 자연적 성향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행위 할 수 있는가?

스미스는 자연적인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제3의 입장에서 타인을 평가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을 강조한다.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일깨우고, 자기 행동의 도덕성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자신에게 공감해주는 외부 관찰자를 원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회관계가 도덕적 판단과 행동의 근원이라고 보는 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애덤 스미스 [Adam Smith] - 정치경제학과 경제학 분야를 개척한 스코틀랜드 철학자 (인물세계사, 표정훈)
어떤 인물과 이론에 대해서 공부할 때, 그 인물에 대해 글을 쓴 사람이 영향을 받은 현 사회 풍조를 인지할 수 있는 또다른 사례였다. 아이작 뉴턴이 쓴 <프린키피아>의 원문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원문에서 그렇게 이러쿵 저러쿵 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도 하지만 그런 건 알려지지 않았다.


도덕감정론에서 ‘공감능력‘이라는 단어는 없다. (공감능력은 나중에 심리학에서 대중화시킨 용어다)


[도덕감정론]이 강조하는 공감과 [국부론]이 강조하는 '이기심'과 '자기 이익'은 서로 모순 되는 것이 아닌가? 이기적인 개인과 사회적 복리의 조화와 모순 문제를 학자들은 '애덤스미스 문제라고 부른다 "

한 인물의 중심에 있는 철학(이 경우에는 종교관)을 배제하고 두 질문을 바라보니 그림이 완전하지 않은 건 아닐까?  그의 세계관에서 신을 빼고 나니 생기는 모순이다. 도덕감정론이 말하는 건, 심리학 용어로서의 ‘공감’이 아니다. 초자연적 절대자의 존재를 인지한 상태에서의 ‘자기이익’은 한계 또는 제한이 있다. 개인의 이기심보다 절대자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여기까지, 다시 공산주의로 돌아가보자.



[쉬어가는 코너] 잠시 토로하는 자료조사의 어려움


이데올로기 대립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주제인만큼 ’중립적인 의견‘을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민주주의 국가의 특권이자 특성은 지도자에 대한 비평이 가능하다는 거다.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다르다.

공산주의에서 지도층에 대 한 비평은 곧 반동분자가 되는 것이며 ’사라져버릴 수' 있다.


내가 경험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그 사회에서 추앙하는 인물에 대한 비평은 삭제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짓밟힌 경험이 있는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는 반공주의를 경험했다.


PRO와 ANTI의 해석이 버무러진 자료의 바다 사이에서 '사실'을 찾아야 한다니.

What have I done?!!!


뭉크의 scream



비평이 어려운 공산주의 체제 특성상, 어디까지가 미화이고 프로파간다인지 구분하는 건 늘 주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반공의 자본주의에서 제공하는 자료 역시 중립이라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영어 자료에서 확인된 자료들에 대한 사회주의국가의 입장이 궁금했다. 아쉽게도 러시아어는 한 두 개월 취미삼아 도전해봤으나 글자를 겨우 읽는 정도이다. 동유럽언어는 당연히(?) 못한다. 결국 중국어를 활용해서 ’중국의 구글‘ ‘바이두’를 통해 확인하자니 맑스 찬양이 대부분이다. ‘맑스가 사생아가 있는 걸 꼬투리 잡는 사람들에 대한 반박’부터 영어권에선 그리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은 아내 예니와의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나마 어렵사리 한 사용자가 맑스가 쓴 시를 번역해서 올린 ‘웨이보’ 게시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어권 자료는 어떨까?


처음에는 영어자료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미국은 예전에 ‘Red Scare’, ‘McCarthyism’을 경험한 국가이다. 현 정권은 물론 주류 언론사 모두 ‘좌향 좌’를 하고 있는 입장이라 오른쪽을 바라보는 이들의 의견을 참고해서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니 미국은 현재 좌파 속 ‘사회주의’를 굉장히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 인사들의 의견을 들을 때도 과장된 것들을 살펴가며 들었다.


사회주의하면 스웨덴 복지국가 정도를 떠올리는  젊은 세대와 실제 공산주의 소련과 대치상태였던 삶을 살았던 세대와 시선 차이가 큰 것 같다. 그리고 질의응답 사이트에서 인터넷 여론을 보면 미국의 젊은 층과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맑스를 옹호하는 의견을 피력하는 양상을 봤다


한국에서도 맑스/마르크스에 대해 검색하면 ‘기사로서의 양질의 글’은 다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댓글에는 추앙과 비하가 오가지만.



그래서 일단 일문에 대한 해석이 담긴 글들을 자료로 사용하는 것은 배제하고 실제 텍스트 원본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널리 알려진 정보대신 특히 한국에서 알려지지 않은 내용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 그럼 챗GPT는 어떨까?


어느 정도 자료조사를 마친 후, 문득 챗GPT에게 질문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결과적으로 다음 인공지능 관련 글을 쓸 때 사용할 예시들을 많이 얻게 되었다.


처음엔 질문한 사항에 대해  묻지도 않은 공산주의에 대한 우호적 해석을 더하며 설명을 했다. 게다가 맑시스트 아카이브에서 원문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챗GPT의 답변을 보니 헛소리 하고 있다는 게 보였다. 맑스가 쓴 시를 엥겔스가 썼다고 하질 않나, 1막까지 밖에 완성하지 않은 연극에 대해서는 4막까지 요약해주며 작품설명을 했다.


다시 한 번, 챗GPT에 너무 큰 기대하면 안된다는 걸 실감했다. 특히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분야에서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으면서  ‘우와…’ 하면서 받아드리면 안된다. 챗GPT를 논문에 사용한다? 요약된 내용에 대해 원전을 확인하고 더블체크 안하면 망신당하기 쉬울 거다.  그럴 바엔 그냥 처음부터 구글검색으로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뭐가 맞고 뭐가 틀린 지 모르면 결국 다 점검해봐야 하니.




(2) 공산주의의 시초(?): 칼 맑스


공산주의 측의 칼 맑스는 어떨까?

(카를 마르크스라고 표기하는게 정석인 것 같은데 타자수를 줄이기 위해 '맑스'로 쓴다)

카를 하인리히 맑스는 (Karl Heinrich Marx)는 1818년 5월 5일에 태어났다.

(한국의 어린이날이라 정겹긴한데, 년도가 참… /중국에선 6월 1일이  아동절(어린이날)’이다. )  

아버지는 잘 나가는 변호사, 아버지 집안 선조들은 랍비들이었다. 교육배경을 살펴보니 학부생 때는 법학도, 박사학위는 철학. 공산주의 혁명가, 철학자 까지는 맞지만 과연 경제이론가로서 호칭이 적합할지는 의문이다.


그의 저작물 중 가장 유명한 건 공산당선언. 그 중 마지막 문구가 아마 가장 유명할 것으로 생각된다.


”프롤레테리아 (무산계급)이 잃을 거라곤 쇠사슬 뿐이고 얻을 수 있는 건 이 세상 전부이다.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The proletarians have nothing to lose but their chains. They have a world to win. Working men of all countries, unite!"

( 프롤레테리아는 한자어로는 무산계급이다. 재산의 '산'이다. 사무직이든 생산직이든 월급노예로서 살아가는 이들, 요즘 용어로 바꾸어 제일 와닿을 단어는 ‘무주택자’가 될까? )


그런데 바로 그 위 문단은 이런 문구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견해와 목표를 숨기기를 경멸한다. 그들(공산주의자들은)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목적이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폭력적으로 전복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The Communists disdain to conceal their views and aims. They openly declare that their ends can be attained only by the forcible overthrow of all existing social conditions


모든 ‘사회적 조건’? 폭력적 전복?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포함되는 걸까.


자본가와 무산계급(無産階級) 사이에서 내 위치를 적으라고 하면 아마 난 무산계급이다. 하지만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폭력적으로 전복함(forcible overthrow)으로 달성해야 한다면?


그런데 칼 맑스가 노동자 출신이었을까?  

그는 평생 노동자로서 살아본 적 없다고 알려졌다.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받다가, 나중엔 유산, 그 후에는 엥겔스가 ‘스폰서’이자 수입원이었다. 미국 신문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특파원으로 저널리스트 활동한 것 외에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본 적이 없고, 저술활동 외의 노동환경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적어도 나에겐 이 지점이 ‘위대한’ ‘공산당선언문’에 담긴 그의 선동이 ‘탁상공론‘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게 하기도 했다.


혁명가이기 전에 맑스는 시인이자 극작가였다.

맑스 전기를 쓴 사람들 대부분은 그의 유명 저서 외의 글에는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한국에 유통되는 칼 맑스 관련 모음집에서도 편지나 문학창작물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그가 쓴 시에서 그의 내면세계가 드러났다고 해석하는 소수도 있었다.

마침 시 공부도 해야하니 (번지수를 잘못 찾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칼 맑스의 시를 읽어보기도 한다.

편지는 더더욱 관심이 간다.

개인적으로는 공적으로 쓴 글 만큼이나 사적으로 쓴 글이 한 인간으로서의 내면을 드러난다고 각하기에 덜 알려진 글들에서 칼 맑스를 살펴보게 되었다.




4. 시인 맑스: 잘 알려지지 않은 글들을 살펴보다


히틀러, 스탈린, 역사인물에 대해 많은 전기(biography)를 쓴 영국인 작가 로버트 페인(Robert Payne/파리대학)은 1971년 <The Unknown Karl Marx>란 책을 통해 알려진다.

(그전에도 그의 시들은 맑스의 전기 작가 Franz Mehring에 의해 발견되었다. ‘마르크스 주의자‘들 중 이걸 발견했지만 공산주의 국가나 맑시스트는 당연히 숨기고 싶어했다고 한다.)


유태인 혈통의 칼 맑스는 시를 사랑했고 당대의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가 되기를 열망했다고 한다.


맑스의 favorite quote


그런 그가 가장 좋아하던 문구 중 하나는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 Mephistopheles의 대사로 알려졌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소멸되야 마땅하다.
Everything that exists deserve to perish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의 악마)

메테피스토펠레스가 상징하는 것은 anti-being, '안티-존재' 이고 생명에 대한 부정인 anti-life로 이어진다.




Poetry is the music of the soul.....

-Voltaire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볼테르(Voltaire)는 시가 영혼의 음악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적절한 문구이기에 인용해본다.


칼 맑스의 영혼에선 어떤 음악이 흘러나왔는지 들어보자.


1) 청년 맑스의 시


(1) 1837년에 쓴 The Pale Maiden 이란 시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

(번역) 그래서 난 천국을 포기했다,
거기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내 영혼, 한 때는 신에게 진심이었지만
지금은 지옥을 향해 선택 받았다.
(원문) Thus Heaven I’ve forfeited/ 
I know it full well / 
My soul, once true to God / 
Is chosen for Hell.

*전문 링크: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37-pre/verse/verse24.htm


(2) ‘절망한 자의 소환 Invocation of One in Despair'


그러므로 신이 내게서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운명의 저주와 고통 속에서.
그의 모든 세계는 되돌릴 수 없게 사라져 버렸다!
내게 남은 것은 복수 뿐이다!
(영어 번역본) So a god has snatched from me my all / In the curse and rack of Destiny. / All his worlds are gone beyond recall! / Nothing but revenge is left to me!

*전문링크: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37-pre/verse/verse11.htm 


(3) ‘인간 교만 Human Pride’

신과 같이 감히
황폐한 왕국을 승리 속에서 거닌다.
모든 말은 행동이자 불꽃이며,
내 가슴은 창조주의 것과 같다

(원문) Like unto a God I dare / Through that ruined realm in triumph roam. / Every word is Deed and Fire, / And my bosom like the Maker's own.

**전문링크: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37-pre/verse/verse20.htm


(4) 헤겔에 대해 쓴 산문인지 시인지 알 수 없는 초기 글에는 이런 문구도 있었다.


내가 가장 높은 것들과 그것들의 심연의 깊이를 찾았으니
신처럼 무례한 나는 어둠에 둘러쌓인 신과 같다.

Since I have found the Highest of things and the Depths of them also,

Rude am I as a God, cloaked by the dark like a God.

From 'II, On Hegel, <Early works of Karl Marx: Book of verse>

**전문링크: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37-pre/verse/verse15.htm


그의 창작은 1840년대에 가장 왕성했다.


(5) The Fiddler/ The Player


다음은 바이올린니스트에 대한 시 The Fiddler (The Player 로 번역되기도 함) 이다. 연극처럼 대사를 주고 받는 형태의 시인데 바이올린 연주자와 한 여성과의 대화이다.


첫번째 부분에선 이런 대화가 있다.


여성은  연주자에게 왜 바이올린을 키는 지 묻는다. (이하 "질문자") 그러자 연주자가 대답한다.


(연주자)

"내가 왜 연주하느냐고?
아니면 왜 거친 파도가 울부짖느냐고?
파도가 바위 해안에 부딪히게 하기 위해서이며
눈이 멀게 하기 위해서이고,
가슴이 멍들게 하기 위해서이고,
영혼의 외침을 지옥으로 끌고 내려가기 위해서 "

(여성)

"연주자님, 당신의 마음을 경멸로 부수고 계시군요.
찬란한 신(radian god)이 당신의 예술을 빌려준 건,
선율의 파도로 눈부시게 하고 하늘의 별들과 춤을 출 수 있게 하기 위해
 날아오르게 하기 위해서죠"

(연주자)

"그럴리가! 난 실패 없이 뛰어들지,
내 검은 핏빛 칼을 당신의 영혼에 깊숙이 꽂기 위해.
신은 그 예술을 모르고 원하지도 않아
그것(예술)은 지옥의 검은 연기에서 뇌로 뛰어오른다.

(영어 번역본)
How so! I plunge, plunge wihout fail
My blood-black sabre into your soul.
 That art God neither wants nor wists,
 It leaps to the brain from Hell's black mists.
마음이 마법에 걸리고 , 오각이 놀랄 때까지:
나는 사탄과 계약을 했다.
그가 신호를 그리고,
내게 박자를 맞추고,
나는 죽음의 행진을 빠르고 자유롭게 연주하지

(영어번역본) Till heart's bewitched, till senses reel:
With Satan I have struck my deal.
 He chalks the signs, beats time for me,
 I play the death march fast and free.

—연주자, 1841

시 전문: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37-pre/verse/verse4.htm


위는 맑시스트 아카이브의 영어번역본을 한글로 번역한 거고, 아래는 다른 전기에 인용된 영어 번역본을 번역 한 것이다.


보라, 나의 검붉은 핏빛 검은 그대의 영혼 깊숙이 꽂힐 것이다...
지옥의 증기가 솟아올라 뇌를 가득 채운다,
내가 미쳐 내 마음이 완전히 변할 때까지 .
이 검을 보라—어둠의 왕자가 나에게 팔았다.
그가 시간을 맞추고 신호를 보낸다.
점점 더 대담하게 나는 죽음의 춤을 춘다."

—연주자, 1841

원문) “Look now, my blood-dark sword shall stab
Unerringly within thy soul…
The hellish vapours rise and fill the brain,
Till I go mad and my heart is utterly changed.
See the sword—the Prince of Darkness sold it to me.
For he beats the time and gives the signs.
Ever more boldly I play the dance of death.”

—The Player (or The Fiddler) , 1841


**맑시스트 아카이브에선 '사탄과 계약을 했다' 라고 번역되었고, 다른 위인전의 번역본에선 '어둠의 왕자 (The prince of darkness)가 나에게 팔았다고 번역되었다.


1부는 The Fiddler 연주자, 2부는 Nocturnal Love로 구성 되어있다.

그리고 2부에선... 독약을 먹고 둘이 같이 죽는 이야기를 묘사한다.


맑스의 시 <연주자 the fiddler>


(6) 울라넴 Oulanem


다음은 극작품을 보자. <오울라넴>은 칼 맑스가 20살 때 썼던 연극이다.

이 극작품의 주요인물은 독일인 여행자 오울라넴, 비아트리스, 루신도 이다. 오울라넴은 <임마뉴엘>을 역으로 배열해 만들어낸 단어이고 극중 등장인물 Lucindo (루친도/루신도)는 '루시퍼Lucifer' 를 연상시킨다.


오울라넴의 대사를 살펴보자.

(이하 오울라넴의 대사)


"모든 걸 잃었다.
주어진 시간은 끝났고,
시간이 멈췄다.
이 작은 우주는 무너진다.
곧 나는 영원을 붙잡고

인류의 거대한 저주를 귀에 울부짖을 것이다.

영원! 그건 영원한 고통, 상상할 수 없고 측정할 수 없는 죽음!
우리를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악한 장치,

우리는 시계장치, 눈먼 태엽장치에 불과하다.

시간의 달력의 바보가 되기 위해.

(생략)

그들은 자신의 죽음의 장송곡을 울부짖는다.

그리고 냉혹한 신의 유인원들은 여전히 소중히 여긴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슴 위, 격렬한 고통을.

독사의 관능적 온기,

그건 전세계 보편적인 자세로 일어선다

그리고 높은 자기 자리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우리 귀에 모든 혐오가 다 불타 없어질 때까지

지친 포효의 파도는 앞을 향해 넘실거린다.

자, 어서. 주사위는 던져졌고, 모든 건 준비되었다.

저주가 낳은 것은 저주가 끝낼 것이다."


(영어 번역본)

All lost! The hour is now expired, and time
Stands still. This pigmy universe collapses.
Soon I shall clasp Eternity and howl
Humanity's giant curse into its ear.
Eternity! It is eternal pain,
Death inconceivable, immeasurable!
An evil artifice contrived to taunt us,
Who are but clockwork, blind machines wound up
To be the calendar-fools of Time;
...
And howl the burial song of their own death.
And we, we Apes of a cold God, still cherish
With frenzied pain upon our loving breast
The viper so voluptuously warm,
That it as Universal Form rears up
And from its place on high grins down on us!
And in our ear, till loathing's all consumed,

The weary wave roars onward, ever onward!
Now quick, the die is cast, and all is ready;
Destroy what only poetry's lie contrived,
A curse shall finish what a curse conceived

...

전문링크: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37-pre/verse/verse21.htm (1837)

아쉽게도 맑시스트 아카이브에서 1막까지만 확인할 수 있었다. 1막까지만 쓰여졌다고 하는데, 그 뒤 2-4막까지 있는데 공산주의애호가들이 어떤 이유에서 숨기고 폐기한 건지 모르겠다.



맑스가 쓴 시와 극본들은 악마 (혹은 악마에 상응하는 문학적 캐릭터), 지옥이란 표현을 애용했다.


어설프게나마 그의 시적인 대사를 번역하다보니, 왜 학자들 이 창작물들을 맑스의 공산주의가 사회에 미친 영향과 연관짓는지 어렴풋이 공감이 되기 시작했다.


이 정도만으로도 반공주의에 확실한 입장, 혹은 사회주의에 경계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맑스는  청년시절부터 파괴적인 사상 (혹은 상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물론 창작물의 모든 캐릭터가 작가의 사상을 반영한다고 하기엔 극본이나 소설에선 여러 역할을 하는 캐릭터가 나온다. 하지만 시가 조금 더 본질적이지 않을까? 시가 자신의 영혼을 탐구하고 그 중에 표현된 거라면?


한 사람이 쓴 시가 그의 영혼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여기서 공산주의의 창시자가 사탄숭배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건 현재의 우리가 사자의 신념을 추론해야 하는 영역인만큼 확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공산주의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난 일들과 연관지으면 왜 어떤 이들에게 그런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도 있을 지 이해가 된다.



(2) 편지: from Marx & To Marx


그럼 보다 직접적인 의사표현 수단인 편지에서는 어떨까?

한국에 출간된 맑스의 저술을 담은 책들에는 시와 극작은 물론 편지도 제외한다. 난 찰스 다윈의 편지들을 통해 다윈에 대한 신화를 벗어버린 경험이 있기에 그의 편지에도 궁금해졌다.

경매에 올라온 칼 맑스의 편지 - 악필로 유명했다

1843년에 독일 철학가 Arnold Ruge에게 쓴 편지의 내용을 보자.


우리가 미래 건설이나 그것이 어떤 시대에도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조직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임무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무자비한 비평. (무자비하다는 건) 권력의 충돌이나 이런 발견으로부터도 사그라들지 않을 무자비함(을 말합니다.)

 If we have no business with the construction of the future or with organizing it for all time, there can still be no doubt about the task confronting us at present: the ruthless criticism of the existing order, ruthless in that it will shrink neither from its own discoveries, nor from conflict with the powers that be.

전문링크: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3/letters/43_09-alt.htm)


1844년에 쓴 유대인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담긴 에세이 'On the Jewish Problem' 에선 이런 이야기를 한다.      


유대인들의 세속적 종교는 무엇이냐고? (물건을) 파는 것이다. 그들의 이 세상 신이 무엇이냐고? 돈이다. 돈이 이스라엘의 질투의 신이고, 다른 신은 존재할 수 없다. 돈은 인간 안의 모든 신을 저하시키고  상품으로 만든다. 지폐의 교환이 유대인들의 진정한 신이다. ....키메라와 같은 유대인의 국적은 상인의 국적이고, 보편적인 돈에 속한 인간(Man of money)이다.                          

What is the worldly religion of the Jew? Huckstering. What is his worldly God? Money.…. Money is the jealous god of Israel, in face of which no other god may exist. Money degrades all the gods of man – and turns them into commodities…. The bill of exchange is the real god of the Jew. His god is only an illusory bill of exchange…. The chimerical nationality of the Jew is the nationality of the merchant, of the man of money in general.


칼 맑스는 1846년 러시아의 비평가 파벨 안넨코프에게 미국의 노예제도에 이렇게 편지를 쓴다.


노예제도에 대해 무엇이 나쁜지 말할 필요는 없다. 설명이 필요한 건 어떤 면에서 좋은 지이다. 난 간적접 노예제도, 무산계급의 노예제도 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직접적인 노예제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거다. 수리남, 브라질, 북아메리카의 남쪽의 흑인들을 의미한다.

As for slavery, there is no need for me to speak of its bad aspects. The only thing requiring explanation is the good side of slavery. I do not mean indirect slavery, the slavery of proletariat; I mean direct slavery, the slavery of the Blacks in Surinam, in Brazil, in the southern regions of North America.



직접적인 노예제도는 현재의 산업주의가 기계나 신용 만큼이나 주축이 된다. 노예제도가 없이는 면/솜이 없을 것이고 면직물이 없었을 것이고, 면직물 업이는 현대 산업이 있을 수 없다. 노예제도가 식민지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식민지가 국제 무역을 만들어냈고, 국제 무역은 대규모의 기계 산업에 필수조건이었다. 결과적으로 노예무역 이전에는 식민지들은 '구세계'로 아주 적은 생산물 밖에 보내지 않았고, 세계에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제도는 경제 카테고리 안에 최고의 중요성을 지닌다. 노예제도 없이는 가장 진보적인 국가인 미국은 족장시대의 나라로 변할 것이다. 북 아메리카를 지도에서 없애야만 우리는 무역과 현대 문명의 완벽한 쇠퇴인 무정부상태anarchy를 얻을 것이다.


Direct slavery is as much the pivot upon which our present-day industrialism turns as are machinery, credit, etc. Without slavery there would be no cotton, without cotton there would be no modern industry. It is slavery which has given value to the colonies, it is the colonies which have created world trade, and world trade is the necessary condition for large-scale machine industry. Consequently, prior to the slave trade, the colonies sent very few products to the Old World, and did not noticeably change the face of the world. Slavery is therefore an economic category of paramount importance. Without slavery, North America, the most progressive nation, would he transformed into a patriarchal country. Only wipe North America off the map and you will get anarchy, the complete decay of trade and modern civilisation. But to do away with slavery would be to wipe America off the map.

- a letter to Pavel Vasilyevich Annenkov, 1846.-


칼 맑스는천재로 추앙 받기도 하지만 경제적 선견지명은 없었나보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이나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이 보면 콧방귀를 칠 예견을 남기고 말았다.


노예제도가 사라진 북 아메리카는 아직도 건재하다. 영국도 마찬가지이다. 윌리엄 윌버포스를 주축으로 많은 크리스천들이 정치적으로 참여하여 예견된 경제적 파탄을 감수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3) 맑스의 ‘친구들’


맑스는 혈통으로는 유대인이다. 맑스의 아버지는 기독교(루터교)로 개종했고, 맑스도 어린 나이엔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그가 무신론으로 전향했을까?

(엄밀히 말하면 악마에 관심이 있으면, 무신론, 신이 없다는 걸 믿는 쪽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는 하다.)


프레드리히 헤겔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이도 있고 어떤 저자는 그가 본 대학교에서 친하게 지낸 브루노 바우어 교수를 시작점으로 추측한다. 많은 대학생들이 그렇듯.


1) 브루노 바우어

그런데 이 이름 어디서 들어본 바가 있는 인물이다.

찾아보니 성경 속 예수가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예수신화설/그리스도신화설'에 대해 조사할 때 알게 된 이름이었다.

https://bitl.tistory.com/44


그는 마르크스와 함께 독일의 유대인 문제에 대해 기고를 한 바가 있기도 하다. 그 역시 반유대주의적 입장의 소유자였다.


브루노 바우어가 본 대학에서 쫓겨난 후에도 두 사람은 친분을 이어갔다. 알려진 일화 중 하나는 어느 ‘Palm Sunday’에 두 사람이 당나귀를 타고 나타나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 흉내를 내고 교회에서 회중석에서 큰 소리로 웃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가 언급되지만 원본 문서는 찾기 어려웠다)


2) 미하일 바쿠닌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한 때 친했다가 등을 돌렸다고 하는 미하일 바쿠닌(Mikhail A. Bakunin )과 상관이 있었을까?


바쿠닌의 책 <신과 국가 (Dieu et L'état) > (영어: God and the State)를 읽어보자:


..하지만 여기서 사탄이 개입한다. 그 영원한 반역자, 첫 ‘자유사상가free thinker’ 이자 이 세상의 해방자. 그는 인간의 짐승같은 무지와 복종을 부끄럽게 여기게 해주었다. 그는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와 인간성의 도장을 이마에 찍어주며 반역하고 지식의 열매를 먹게 했다. <God and the State >

But here steps in Satan, the eternal rebel, the first freethinker and the emancipator of worlds. He makes man ashamed of his bestial ignorance and obedience; he emancipates him, stamps upon his brow the seal of liberty and humanity, in urging him to disobey and eat of the fruit of knowledge.

God and the State, Mikhail Bakunin-
** 음, 집을 건 집고 넘어가자면, 성경의 창세기 이야기 속 아담과 하와가 먹은 과일의 이름, 나무의 이름은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이다.  (창세기 3:16-17) ”다 먹어도 되는데 이건 먹지마“ 하며 지목한 나무의 이름을 직역하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아마 한글에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번역한다.
이걸 좀 더 의미있게(?) 해석하자면, 인간이 스스로(임의로)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지 말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아무튼, 바쿠닌은 슬쩍 중요한 부분을 빼먹고 ‘지식’을 제한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3) 프레드리히 엥겔스


맑스의 가장 유명한 ‘친구’는 엥겔스다.

중국 검색엔진에서 ‘맑스와 앵갤스’까지만 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두 사람의 ‘우정’이다. 엥겔스는 맑스의 ‘제2바이올린 연주자 (Second Violinst)’라는 별명도 있고, 그걸 자청했다는 의견도 있다.


가족들도 포기한 맑스의 생활비를 제공했던 건 그였다. 그가 하녀 렌첸과 사생아를 낳았을 때, 그걸 거둬준 것도 엥겔스다. 임종이 되서야 엥겔스가 그 비밀을 공개했다고 알려져있는데, 맑스주의자들은 그런 증거가 없다며 논쟁하는 부분이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1300여통이 넘는다는데, 그런 엥겔스의 몇 마디도 남겨본다.


다음 세계대전은 반동계급과 왕조 뿐만 아니라, 모든 반동분자들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질 겁니다. 그것 역시 앞으로 내딛는 한 걸음일 것 이다.

"The next world war will result in the disappearance from the face of the earth not only of reactionary classes and dynasties, but also of entire reactionary peoples. And that, too, is a step forward."

-<The Magyar Struggle> -1849, Engels


그렇다. 맑스주의를 도입한 국가들에서는 정말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한편, 21세기 미국에서 알려지면 ‘캔슬’당할 표현 내용도 편지에는 담겨져 있다. 엥겔스와 맑스가 주고 받은 편지에는 쿠바 출신 맑스의 사위 (Paul Lafargue)에 대해 ‘흑인+고릴라’를 조합한 언어를 사용하며 이야기 한 편지도 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현재 맑시스트 아카이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려진 편지내용은 이렇다.


그는 흑인(n****)으로서 우리보다 '동물의 왕국'과 한 단계 더 가까우니, 의심할 여지가 없이 그 구district의 대표를 하기에 가장 적합하지.
Being in his quality of a n*gger, a degree nearer to the rest of the animal kingdom than the rest of us, he is undoubtedly the most appropriate representative of that district."


일부 편지들은 이들의 편지을 출간한 출판사가 저작권을 주장하여 삭제했다는 안내가 있는데, 이 편지는 아카이브에 엔트리조차 남아있지 않다.



(4) 칼 맑스의 사생활


우리나라 언론기사엔 칼 맑스가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다고 하지만 ‘바이오그래퍼’들의 글을 살펴보면 장례식도 불참했다고 하고 그 이유에 대해 아버지에 대한 증오 때문인지 날씨가 안 좋아서였는지 이야기를 한다.


맑스가 받은 편지 중


여러 자료 등에서 칼 맑스가 아버지한테 늘 돈을 보내달라고 했다는 내용을 볼 수있었다. 실제로 그런 걸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이 아버지의 편지에 종종 드러났다.


아버지의 편지 중엔 이런 말이 있다.


 그렇다. 남자는 자기 나이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을 위해 거대한 희생을 한 여자(아내)와 그녀가 버려야 했던 사회적 지위와 빛나는(부유한) 상황을 버린 그녀를 위해 더더욱 성스러운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녀는 불확실하고 암울한 미래의 젊은이에게 자신의 운명을 옭아맸으니.
 그렇다. 그는 (칼 맑스를 3인칭으로 표현한다) 갚아야할 빚이 있다. (자신을 선택한 아내에게)
뜨끔.


1837년에 아버지가 쓴 편지에선 돈을 많이 쓴다고 혼난다.

부자들이 1년에 500 탈러 이상 쓰지 않는데, 약속을 어기고 1년에 700 taler 이상 쓴다고..

(원문): "...As if we were men of wealth, my Herr Son disposed in one year of almost 700 talers contrary to all agreement, contrary to all usage, whereas the richest spend less than 500..." )(편지 2, 1838년)


아버지가 버는 돈 이상을 학교에서 먹고 마시는데 썼나보다.

아버지는 합리적인 답장을 받는 기쁨을 누린 적이 없다며 불평한다.

그게 곁에 없는 것에 대한 위로가 되어야 하는데 편지가 오더라도 앞선 편지에 대한 내용과 이어지지 않는다며.


We have never had the pleasure of a rational correspondence, which as a rule is the consolation for absence. For correspondence presupposes consistent and continuous intercourse, carried on reciprocally and harmoniously by both sides. We never received a reply to our letters; never did your next letter have any connection with your previous one or with ours. (편지 1중)

엥겔스에게 쓴 편지(1855년) 에 인용된 어머니의 말도 웃프다.

'칼(맑스)가 자본에 대해 쓰는 것 대신 자본을 좀 만들었으면..!! '
(=> 돈에 대해 쓰는 대신 돈 좀 벌었으면 좋겠네요! )


요구가 많은 부모 밑에서 억압 받으면서 자랐던 사람이 편지를 보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겠지만, 효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칼 맑스의 아버지가 쓴 편지를 보면 참 속을 많이 썩인 자식이란 인상을 받았다.


아버지의 편지 중에는 아주 충격적인 내용도 있다. 1837년 3월 2일의 편지 내용이다.

“때때로 나는 너와 너의 미래를 생각하며 마음이 즐거워진다. 그러나 가끔 나는 슬픈 예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치 번개에 맞은 것처럼, 이런 생각들이 나를 엄습한다. 네 마음이 네 머리와 재능과 조화로울 수 있을까? 이 고통의 골짜기에서 감정이 풍부한 사람에게 본질적으로 위안이 되는 세속적이지만 부드러운 감정들을 네 마음에 담을 수 있을까? 네 마음은 명백히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어떤 악마에 의해 움직이고 지배되고 있는데, 그 악마는 천상의 것일까 아니면 파우스트적인 것일까? 너는 과연 진정한 인간적이고 가정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이 내 마음의 가장 고통스러운 의문이지만, 너는 과연 너의 주위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까?

“At times my heart delights in thinking of you and your future. And yet at times I cannot rid myself of ideas which arouse in me sad forebodings and fear when I am struck as if by lightning by the thought: is your heart in accord with your head, your talents? Has it room for the earthly but gentler sentiments which in this vale of sorrow are so essentially consoling for a man of feeling? And since that heart is obviously animated and governed by a demon not granted to all men, is that demon heavenly or Faustian? Will you ever -- and that is not the least painful doubt of my heart -- will you ever be capable of truly human, domestic happiness? Will -- and this doubt has no less tortured me recently since I have come to love a certain person like my own child -- will you ever be capable of imparting happiness to those immediately around you?“


이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도 칼 맑스는 돈 좀 보내주세요- 라고 편지를 보낸다.




위생상태에 대한 언급


아버지의 편지에서도 얼핏 드러낫지만, 그를 수식하는 단어 중 disorder 무질서가 대표적이었다. 폴 존스이라는 역사학자의 책 The Intellectuals 란 책에서 인용된 칼 맑스를 감시하던 프러시안 경찰의 보고서에서는 칼 맑스의 거주공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씻고, 머리 빗고, 속옷을 갈아입는 등의 일들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술 취하는 것을 즐겼다….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을 정해 놓지 않았다…한 마디로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그의 거주공간에서 어딘가에) 앉는다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 되었다.
 “Washing, grooming, and changing his linens are things he does rarely, and he likes to get drunk…He has no fixed times for going to sleep or waking up….everything is broken down… . In a word, everything is topsy-turvy. To sit down becomes a thoroughly dangerous business.”

(Prussian police Report 1853_  quoted in The Intellectuals,  Paul Johnson)

잘 씻지 않았다는 그런 그의 위생습관과 연관지어 이런 문구도 확인된다.


어떤 시점에서는 맑스는 그의 파트너 엥겔스에게 자신은 (성경의) 욥처럼 신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자신이 그 전염병의 대상이 되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At one point, Marx joked to his partner Friedrich Engels that he had become “the object of plagues just like Job, though I am not as God-fearing as he was.”


일반적으로 비위생적인 생활 때문에 (씻지 않아서) ‘종기boils‘ 가 생겼다고 알려져있는데 편지들을 통해 그가 가지고 있던 병이 화농한선염 (hidradenitis suppurativa) 이라는 추론을 한 논문도 찾아볼 수 있었다.

(링크 https://pubmed.ncbi.nlm.nih.gov/18489595/ ) 맑스를 옹호하는 미국의 맑시스트의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드니 어떻게 봐야할 지 더 복잡해진다.




5. 공산주의와 종교


공산주의는 무신론이 시작하는 곳에서 시작한다
Communism begins where atheism begins

- Karl Marx (The Communist Manifesto)


어떤 의미에서는 늘 존재했던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립.

신이 선과 악의 기준이었고 의미의 근원이었다.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외치는 학자들이 생겨난다.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통치계급에서 민중을 지해하기 위해, 등 여러 이유를 들이댄다.


19세기,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과학과 철학은 신이란 단어를 오려내기 시작한다. 빈자리를 허무주의와 공산주의가 휩쓸고 간다.


허무주의란 이름이 허무주의란 이름의 시작은 18세기 유럽이지만, 아시아에선 불교에 관한 기록(1)에서도 있고, 중동지역에서 유대인 경전 '타나크' (기독교 성경의 구약)의 '전도서'(2)에도 그런 태도를 볼 수 있다.

(1)  부처는 당시의 '허무주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했다고 전해진다.
- 나눔, 기부가 아무 선한 결과를 창출해내지 못한다
-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도 아무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다
- 죽음 후에 '존재'는 현세나 내세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 이 세상에서  '존재'가 이 세상 혹은 다른 세상으로 환생한다는 걸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없다. (Apannaka Sutta)

그리고 이런 관점을 가진 이들은 정신적, 언행의 선함이 미덕이라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한다.
(2) 이스라엘의 솔로몬왕 (970-931 BCE)의 글을 포함한 성서의 '전도서' (기원전 3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글까지 포함됨 )에서도 표면적으로는 허무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1:2-4 KRV)

미우라 아야꼬의 자서전 성격의 <길은 여기에> 란 소설에서 주인공은 성경의 전도서를 제일 처음 읽고 전후 일본을 휩쓴 자신의 허무주의와 비슷한 소리가 종교경전에 쓰여진 걸 보고 놀랜다.


아무튼 그렇게 인류는 신을 ‘죽였다’.


아니, 신이란 존재가 있다면 물리적으로 죽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닐테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람들의 인식 속의 신’을 대상으로 수 차례 살인미수의 끝에 이번엔 깊은 치명상을 입혔던 것처럼 보일만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전 시대에 중세기독교는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개신교는 ‘로마카톨릭’이라고 선을 긋겠지만)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했다.  

이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듯 하지만, 그 이전에 이슬람국가가 전쟁으로 차지한 영토가 훨씬 광대하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7-9세기 중국 서북부부터 북 아프리카까지 이른다)

7-9세기 이슬람 정복

출처: https://www.worldhistory.org/image/14212/islamic-conquests-in-the-7th-9th-centurie

13세기 이슬람

회개의 종교 기독교에서 지성을 키운 유럽과 미국은 가혹한 자기반성적인 자아성찰을 진행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또 외부에서도 자아비판이 이루어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그런 자료들을 활용하여 종교의 반대편에 있는 학자들은 역사 속의 전쟁의 원인을 종교적인 요소로 해석을 하는 단순화가 진행되었다.


인류는 ‘미개한 종교’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계몽주의와 공산주의를 통해, 세계 1차 대전, 공산화, 2차 대전이 일어난다.



아무튼 역사 속의 공산주의는 종교를 탄압하기로 유명하다.


내가 살았던 중국은 물론이고 공산주의를 도입한 국가들은 ‘반종교정책’을 폈다.


미국이 시작되었을 때의 ‘정교 분리’ (政敎分離/seperation of the church and the state)가 아닌 종교축출을 목표로 했다.


공산주의는 대중들로부터 영혼의 ‘아편’을 몰수하기 위해 수 많은 교회와 성당 건물을 파괴하기도 한다. 역사 속의 공산주의는 모두 종교를 탄압했다.


**맑스는 원래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라고 할 때, 마약의 개념으로 이야기 한게 아닌데, 레닌이 그걸 단순화 시켰다고  맔시스트들은 말한다. 그 앞 문장을 쭉 읽어보면 맑스이 뉘앙스와 레닌의 뉘앙스는 180도 다르다.


"(번역) 종교적 고통은 일종의 진정한 고통에 대한 표현인 동시에 진정한 고통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억압 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마음없는 자들의 마음이며, 영혼 없는 조건의 영혼이다. 그건(종교) 민중의 아편이다.

민중의 행복의 허상으로서 종교의 철폐는 그들의 진정한 행복에 대한 요구이다. 민중에게 그들의 (허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대한  허상을 버리도록 불러일으키는 거다. 그렇기에 종교에 대한 비평은 종교가 '성스러운 빛'인 이 눈물 가득한 세상에 대한 비판이다."


(영어번역본)
Religious suffering is, at one and the same time, the expression of real suffering and a protest against real suffering. Religion is the sigh of the oppressed creature, the heart of a heartless world, and the soul of soulless conditions. It is the opium of the people.
The abolition of religion as the illusory happiness of the people is the demand for their real happiness. To call on them to give up their illusions about their condition is to call on them to give up a condition that requires illusions. The criticism of religion is, therefore, in embryo, the criticism of that vale of tears of which religion is the halo.

*그 위 문단에서는 종교는 국가가 만들어낸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문단이다.



소련의 사례

구소련에서 볼셰비키 혁명 이후, 첫 5년 간, 28명의 주교들과 1200여명의 러시아 종교 사제를 처형했고, 많은 이들을 감옥에 수감하거나 추방했다. 2차 대전 시절에는 개신교인들은 정신병원으로 강제입원하고 재판 후 수감되었다.

러시아는 1917년에서 1921년까지, 또 1921년에서 1928년까지 반 종교 캠페인을 했다.


레닌 이후 차기 리더인 조세프 스탈린도 강력한 무신론을 대중에게 강제했다.

러시아 혁명 후, 4.6만개의 교회 중 200개의 교회만 남게 되었다.


‘신이 없는 5년 계획 Godless Five-Year Plan ’을 통해 종교를 해체하고자했다.

종교지도자들은 ‘반혁명’이라는 명목하에 처형되거나 수감되었다. 국가를 지지하는 종교지도자들만 남게 되었다.


1929년에는 유대기독교 세계관의 주7일제 대신 주말없는 주5일제를 도입해서 노동의 개념을 개혁하는 시도를 한다. 목적은 금,토,일을 없애서 이슬람, 유댁, 기독교인들의 예배일을 없애고자 했다. 부작용이 심해서 유지하지 못한다.


(Article 13 )러시아 공산당은 착취계급과 종교 프로파간다의 고리의 완전한 파괴를 목표로 한다. 노동자계급을 종교적 편견으로부터 실질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을 도우며 광범위한 계몽교육과 반종교 프로파간다를 조직한다.


그런 소련은 교회나 유대교 회당, 모스크는 ‘무신론 박물관’으로 바뀐다.



유물론사상을 기초로한 공산주의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종교를 탄압했지만, 공산주의 아래 목숨을 잃은 생명의 수는 세계 1,2차 대전의 숫자를 훨씬 상회한다.


가장 극단적으로 종교를 배제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그래서 지배계급으로 규정했던 교회로부터 뺐은 재산을 민중들에게 주었을까? ’신이 죽었으니‘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하나 했더니 ’신이 없으니 모든 게 다 허용되었다. 러시아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은 여러 수단을 통해 사라졌다. 그런 수단은 아직도 여러 공산주의국가에서 활용된다. 민주주의 정신을 이식한 홍콩에서도 언론자유를 표방하며 입과 손을 잘못 놀렸다가 행방불명이 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왜 종교를 탄압했나?


그런데 왜 그렇게 종교를 탄압하고자 한 걸까?

중국에선 봉건주의 미신으로부터 사람들의 사상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란 말을 했다.


검색이 가장 쉽고 자료도 많은 영어 성경 관련 자료를 검색해봤다.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는 자연을 숭배하는 걸 금한다.


유대교는 그 먼 옛날부터 자연숭배라는 미신적 종교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동물들은 물론 해와 달, 별을 숭배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1:출애굽기), (2: 신명기)


그런 유대기독교 세계관 덕분에 기독교 유럽에서 이론 과학이 발전했다는 분석을 본 적이 있는데, 이는 꽤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연애대상도 마찬가지겠지만 숭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자연을 신과 동일하게 여기는 자연숭배가 흔했다.


(1) 너는 하늘이나 땅이나 땅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의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에 절하거나 그것을 섬기지 말아라...... (생략) (출애굽기 20:4)
 You must not make for yourself an idol of any kind or an image of anything in the heavens or on the earth or in the sea.  You must not bow down to them or worship them....(Exodus 20:4-5)
(2) 그리고 하늘의 해나 달이나 별을 보고 매혹되어 경배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온 세상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신명사 4:19 KLB)
And when you look up to the sky and see the sun, the moon and the stars—all the heavenly array—do not be enticed into bowing down to them and worshiping things the Lord your God has apportioned to all the nations under heaven. (Deutoronomy 4:19)


종교로부터 억압받는 이들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에서 공산주의가 탄생했다고 주장하지만, 찾아보니 약자에 대한 배려 역시 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다.  당시의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를 탄압하지 말라고 한다. 그게 그들의 율법 안에 있다.


제도적으로 도입된 유대인들의 율법에서는 수확할 때, 지금처럼 깔끔하에 모든 걸 주인이 가져가지 않고 일부러 남겨둔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foreigner)를 위하여 버려두라 (생략) -레위기 12:22-

When you harvest the crops of your land, do not harvest the grain along the edges of your fields, and do not pick up what the harvesters drop. Leave it for the poor and the foreigner living among you. (Leviticus 23:22)


유대인들의 지혜서인 잠언에서도 명시적으로 사회정의에 대해 이야기 한다.


너는 벙어리처럼 할 말을 못하는 사람과 더불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송사를 변호하여 입을 열어라. 너는 공의로운 재판을 하고 입을 열어 억눌린 사람과 궁핍한 사람들의 판결을 바로 하여라. (잠언 31:8-9)

Open your mouth for the mute, for the rights of all who are destitute. Open your mouth, judge righteously, defend the rights of the poor and needy. (Provers 31:8-9)


공산당이 주장한  사유재산의 폐기. 가난한 사람이 없는 ‘유토피아’, ‘코뮨’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먼저 있었던 것 같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삶을 묘사한 구절에 드러난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 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사도행전 4:32-35)

(32) All the believers were one in heart and mind. No one claimed that any of their possessions was their own, but they shared everything they had. With great power the apostles continued to testify to the resurrection of the Lord Jesus. And God’s grace was so powerfully at work in them all that there were no needy person among them. For from time to time those own land or houses sold them, brough the money from the sales and put it at the apostles’ feet, and it was distributed to anyone who had need.  
(Acts 4:32-35, NLT)


자, 공산당선언이 표방하는 것들이 종교경전의 가르침과 겹치는 건 왜인가?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탄압을 받던 소수종교였던 시대를 거쳐 종교지도자들이 국가권력층이 된 로마카톨릭의 중세유럽까지 가는 어느 시점부터 부패한 권력이 된 게 아닐까. 종교지도자가 된 이들이 권력을 잡자 ‘성경’이 아닌 ‘권력욕‘을 따른 거다.

 

공산주의는 문제를 종교로 봤지만 사실 문제는 인간이 아니었을까?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그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위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노예해방 전쟁 전의 미국.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제도를 폐지했음에도 사회에 인종차별이 만연했다. 그 때 마틴 루터킹이 흑인해방운동을 어떻게 했을까? 종교인들이 흑인을 차별하니 종교를 없애자고 했을까?

아니다. 마틴 루터킹 (주니어)는 목사였다.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살라고 도전했다.

 



공산주의가 종교를 가장 두려워 했을 정치적 이유


(1) 종교인들에겐 국가 이상의 최고지도자가 존재한다. 신이 인간 정권 위에 존재한다.

정권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제공했다.

성경 속의 최고권력자 위에 신이 있었고 그런 최고권력자를 비판할 수 있는 선지자가 있었다.


(2) 국가의 법령을 초월한 도덕적 기준을 제공했다. 그걸 기준으로 목적을 위해 모함하고 살인하는 것이 나쁘다고 판단할 근거가 있었다.


(3) 전쟁을 위해 ‘강한 멘탈’이 필요한데, 기독교는 약자에 대한 연민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약함이 곧 강함’이다라는 해괴한 이야기까지 한다.

장애인은 군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치가 없으니 낙태를 해야하고 (그걸 권리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거나 추방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의 환경은 정신병자나 범죄자와 다르지 않았다. 시베리아로 보내지기도 했다. 레오니드 자코브스키의 휘하에, 파시스트 조직을 운영했다는 누명을 씌워 처형하기도 했다. 34명의 청력장애자, 170명의 시각장애와 폐렴, 심장질환환자를 처형하기도 한다.

출처: Beyond Russia  https://www.rbth.com/history/334286-why-were-disabled-people-persecuted-ussr



공산주의는 여전히 종교를 싫어한다. 중국에서도 국가원수가 어떤 도시를 방문한다고 하면 일단 교회에서의 예배를 폐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공식적으로 러시아는 공산주의가 아니지만, 푸틴이 러시아정교 아니냐고 묻는다면 이건 그리스정교로 보는 것보다는 ‘정치의 정’을 붙인 ‘정치적 교회’로 보는 게 더 맞겠다. (푸틴은 미신적 신앙을 가지고 있고, 그게 우크라이나 침공일을 결정한데 작용했다고 분석하는 내용을 들은 기억이 있다)




6. A Total Life Inspection: 문장 하나 말고 철학자의 삶을 살펴보기


멋있는 글귀 하나가 우리 가슴을 울리는 경우가 종종 있을 거다.

몇 개 나열해본다.


우리는 견뎌낼 힘이 있고 일어난 모든 일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힘이 있다

- 세네카


당신은 이 시대의 도덕에 맞서는 영웅이 되어야 한다.

- 미쉘 푸코


자유란 우리의 사슬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이다.
난 평화로운 노예보다 위험을 수반한 자유를 선호한다.

- 장 자크 루소-


난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프랑수아즈 사강


마찬가지로 사회적 약자에 속한 계층에서 살아온 사람에게는 분명 공산당선언문을 읽으며 ‘감동’을 받을 여지가 있을 거다. (꼭 전문을 다 읽어보자)


이 긴 글을 통해 제안하고 싶은 건 이거다.

동전의 양면을 알아야 그 다음에 옆면도 볼 수 있다.


어떤 철학을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과 적용을 하고 있다면, 그 철학자의 삶을 꼭 알아보자.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죽음을 맞이 하는지. 물론 그를 추앙하는 이들이 적은 미화된 일대기만 읽지 말고, 그를 비평하는 이들이 쓴 글도 읽어보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의 명언엔 동의하지만, 세네카는 자살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말 확실히  멋있다. 하지만 그는 AIDS로 죽는다.

(10세 전후 아동을 상대로 동성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폭로도 있었다. 물론, 이를 반박하는 옹호론자도 봤다.)


혹시 아동중심의 교육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한 <에밀>의 장 자크 루소에게 감동했던 적 있는가?

는 자신이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다며 다섯 명의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냈다.


동양에선 성선설을 맹자가 주장했다. 아마 맹자는 육아는 아내에게 맡기고 사유를 하다가 중간 중간 애가 기분 좋을 때만 봤나보다.


참고로 칼 맑스의 사인은 기관지염이다. 음주와 흡연을 사랑한 이의 사인인만큼 그의 철학이 병을 낳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삶 전반에 ‘무질서‘가 가득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런 그의 ’기호품‘이나 생활습관이 영향을 미친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역시 사강의 ’자신을 파괴할 권리‘라고 주장하면 그 역시 멋지게 해석될 수 있으려나.


글로서만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읽으면 주관적이며 낭만적 관점을 갖을 수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라는 철학을 도입한 국가의 역사와 현실을 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이론으로 보고 이상적으로 감상하며 미화할 수 있는 거다.

만약 민주주의국가가 공산주의가 ‘이견’을 다뤘던 태도를 가지고 ‘이견’을 탄압한다면 인권존중은 없다. 체제안정이 우선이고 언론의 자유 따윈 아무도 외치지 못한다. 비평의 자유 역시 민주주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다. ‘사회주의를 옹호하면 반체제주의자로 낙인찍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야’ 공산주의 스타일이다.


공산당선언을 다시 살펴보자. 멋있는 마지막 문구만 기억하면 안된다.


(1) 맑스와 엥겔스는 브루주아 가족 구조를 비판하고 그게 자본과 사유재산의 근거가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북한 같은 국가에서는 정치 권력이 세습되고, 중국에서는 헌법을 수정해가며 장기집권을 한다.


(2) 이들이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노동착취를 당한다고 하며 사회가 가정 교육을 대체한 것을 비판한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건 지배계층의 영향이 담긴 교육으로부터 '교육'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실은 어떤가? 지배층이 달라졌을 뿐이다. 공산당 역시 지배계층으로서 모든 단계에서 사상교육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치고 있는 (중국) 중학교 동창은 법을 가르쳐야하는데 주석의 사상교육만 하고 있어서 가르치는 재미가 없다고 토로한다. 학생들도 토론이나 비평은 할 줄 모른다고 한다. 그 친구는 결국 3년을 기다려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윈스턴 처칠이 맞는 것 같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통치형태이다.


하지만 그게 지금 인류가 가진 최선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대한민국의 경우 다수결에 의존하는 투표형식인데, 다수가 파멸을 선택하면 파멸로 가야하는 게 민주주의의 함정이다.

대중의 지성에 영향을 받는다.



자본주의? 문제가 분명히 많다.

(비판적 사고에 익숙한 내가 주제를 '자본주의'로 삼으면 1만자 이상의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문제와는 비교할 수 없다.

어떤 철학이 '남용' 또는 왜곡 된 것으로 초래한 효과와 그 철학을 순수하게 혹은 완벽하게 도입했을 때 초래한 효과를 비교하는 것은 다를 수 밖에 없다.



7. 에필로그: 우리 삶에 녹아든 철학


관심은 두 종류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지식을 쌓는다. 반대로 싫어하기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국가라는 틀을 넘고 시대를 초월하여 세상을 두 집단으로 나눈 이력이 있는 강력한 철학이다. 보편적으로 이데올로기이란 단어를 쓰지만 그 역시 특정 세계관이 반영된 선택이다. 철학은 인생의 모든 영역에 대한 질문을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인류와 문화에 대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것만 다루는 것처럼.  ‘ㅇㅇ주의’를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때,  정치X경제적인 것만 다루는 것처럼 포장한 용어의 정의가 적용된 거다. 종교는 배제해야 학술적 가치가 있는 시대 속에서.


그 전 세대에선 인구증가가 식량부족으로 이어져 위기를 맞을 거란 경제이론이 있었다. 서구사회를 주목하던 사회주의국가를 표방한 초기 중화인민공화국도 이걸 듣고 있었다. 실패하는 정책 속에 식량위기를 경험한다. 전쟁으로 죽은 이들보다 인재로 분류해야하는 기근이 중국을 휩쓸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거다. 공산주의 국가 답게 한 가정 당 한 명만 낳도록 정한다.


농업과 관련 기술의 발전을 고려하지 않은 근시안적인 전망 뒤에는 비관론이 숨어 있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인구감소’를 위기로 바라보고 여러 대응책을 고안해내야 하는데 말이다.



시대배경을 2020년 전후로 돌려보자.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역사 속에 있는 YOLO[욜로]. 카르페 디엠은 조금 더 낭만적이고 인생은 짧으니 최선을 다해서 즐기는 느낌이었다면, 욜로는 대중이 그냥 여러 분야의 마케팅 전략에 혹해 미래의 자신으로부터 돈을 빌리고 ‘지금 당장 누리자’가 된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은 에피큐로스라는 옛날 사람의 ‘쾌락주의’의 현대판으로 느껴진다. ‘지금’이 중요하고 ‘지금 느낄 수 있는 만족’을 우선시 한다. 시대 배경상, 그럴 수 밖에 없는 허무주의적 요소도 가득하기에 때문에 철학이 혼재되어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요즘은 MBTI의 "T"로 표현되기도 하며, 철학적 차원이 아니라, 그저 유형분류로 단순화된 그 대항마(?). 스토아주의(Stoicism)은 표면적으로나 단순화된 버전에서는 좀 더 건전하고 지혜로운 삶을 이끌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한계점을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현실과의 괴리가 있다. 감정은 생물학적 인간에게 내재된 부정할 수 없는 속성 중 하나이다.


십대시절부터 지혜가 뭔가 하며 살아왔다. 행복한 인간이 되고 싶었던 무지한 시절도 스쳐지나 갔지만, 궁극적으로는 ’지혜로운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을 부정하는 삶은 궁극적으로 지혜로운 삶과 멀어진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이성적 기독교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스토아주의와 비슷하기도 하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측면에서.



공산주의는 그저 경제이론으로만 실패한게 아니다. 인류학적으로도 실패한 거다.

유물론적 사상으로 세상의 ‘비물질적인 것’에 대해 부정하고 모두 다 같은 월급을 받으며 살면 평등이 이뤄지고 그러면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오해. 이건 착각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자본주의를 공산주의로 전복시키고 대체하려고 하는 거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자가 되면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프레임 안에서 그저 다른 위치에 있으면 달라질 거라는 전제를 하고 있고 더 깊은 질문은 생략되었다. 인생을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게 되는 거다. 인생은 경제가 결정하는 거라고.


RAT RACE나 DOG RACE나...

RAT RACE, '쥐들의 경주'라는 표현을 차용해보자.

여기서 일등하는 법을 알았다고 더 이상 쥐가 아닌 게 아니다. 그 프레임 밖에 나온 게 아니다. 여전히 RACE 중인거다. 쥐가 아니게 되었지만 DOG RACE를 계속하게 되는 거다.


하지만 인생은 과연 그런 걸까? 철학적 질문이 필요한 순간이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 인생의 95%를 쏟아붓는다고 하자. 그래서 정말 한 인생이 얻을 수 있는 부의 10000%로를 달성했다고 하자. 청춘을 쏟아부어 50대에 달성했다. 그런데 51세가 되는 날, 건강검진을 받아보니 암이다. 쉼없이 살아온 스트레스가 세포에 미친 영향인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사용한 술과 담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남겨진 건 남겨줄 유산 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인생의 95%를 일에 쏟고, 그 외의 것들은 방해물로 보다보니 인생의 반려자도 자식들도 없다. 남은 건, 버켓리스트를 만들고 호화유람선을 타고 여생을 보내는 걸까? 좀 더 의미있는 일을 하고자 재단을 만들고 후원회와 무상으로 다닐 수 있는 경제학 학원을 설립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인생의 마지막에 여한이 없을까.


그걸 개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확장시켜도 마찬가지이다. 얻은 지식과 그 지식으로 극대화 시킨 부. 이건 후손에게 꼭 축복의 특성만 갖을까?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유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은 ‘왕조’라는 이름을 가진 가족안에서나 ‘재벌’이라는 카테고리 속의 가족에서나 비슷하게 일어난다. 그걸 아니깐 워렌 버핏이 자신의 유산을 자식들에게 직접 주는 게 아니라 복지의 목적을 갖은 재단에 기부하는 형식을 취하는 거다. (경제만능주의적 시선을 적용하면 그 역시 절세가 목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자동차의 비유

의인화된 자동차의 비유를 해보자,

이번엔 유종을 하나로 국한한다. 가솔린을 넣어야 차가 굴러가는 걸 알게 되었다. 차를 운행하다가 연료가떨어지면 다시 주유를 한다. 차를 계속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연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전재산을 다 휘발유를 사는데 투자한다. 자동차는 달리는데 의미가 있고 거기서 가치가 창출된다고 생각한다. 아는 게 연료로서의 ‘기름’밖에 없어서이다.


그런데 자동차엔 다른 오일이 필요하다. 엔진오일이 있고 미션오일이 있다. 연료가 에너지원이라면 이 두 오일은 윤활유로서의 작용을 하여 자동차 기관의 성능과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


개인이 경제적 우월적 지위에 서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게 그런 건 아닐까? 




공산주의가 경제적 평등을 목적으로 삼는 게 그와 비슷하다.

있는 자들로부터 뺏어서 없는 자들에게 나눠준다?

로빈후드. 멋있다.

하지만 자신이 얻은 게 아니라 빼았는 것의 동기는 '시기 envy'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노력과 성과가 일치하지 않는 삶이 불평등한 건 맞다. 그런데 만약 일을 하나도 안하는 사람과 일을 아주 열심히 하는 사람과 똑같은 급여를 받는다면?

대학교에서 과제를 할 때 ‘free-rider’, 즉 아무 것도 안하고 학점을 챙겨가는 친구에게도 분노하는 인간이다.

하루 두세시간 자가며 일주일을 외과 수술실에서 보내고, 그 와중에 당직도 서야하는 의사들과 9시 출근해서 커피 마시며 1시간 ‘소통’시간을 보내고, 11시에 밥 먹으러 나가는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과 동일한 급여를 받는다면 그건 평등인가?


공산주의선언문에서는 그 사상을 유럽을 떠도는 '복수의 유령의 일종인 spector'라고 표현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건강한 개인주의를 넘어 요즘은 나르시즘과 니힐리즘이 혼합된 하이브리드 철학이 날아다닌다.


쇼펜하우어

스멀스멀 인기를 누리는듯한  쇼펜하우어가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삶의 무게를 고려했을 때 즉 아이를 낳는 것에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한다.


노력해서 뭐해, 인간관계 피곤한데 유지해서 뭐해- 하며 사람들을 현혹하며 외로움의 길로 대중을 현혹한다.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로 혼자서도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대의 우리들을 더 단절로 몰아갈 수 있는 추천이다.


환경보호론

한편 한 때 나의 지대한 관심사였던 환경보호라는 영역에서도 이 '모든 존재에 대한 부정'을 마주하게 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보호하는 것과 인류를 지구의 '암癌적 존재'로 보는 건 다르다. 극단적인 환경주의는 그 이면에 '인류의 멸절'이 지구가 번영하는 거라는 위험한 '반反존재 (anti-being) '태도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지구'의 편에 서는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이 가춰지는 순간, 동참하지 않는 이들을 부도덕하다고 평가하며 내려다보기도 한다.


쇼펜하우어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애도 없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님께선 배우자가 있고 육아의 경험도 있으신가?

그럼 홉스, 로크, 흄,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같은 유명 철학자들보다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수 있다. 다 미혼독신으로 사망했다.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결혼을 권장한 이유 중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수 있다' 역시 무시하자.)


 멋진 글귀는 참고만 하자.


애당초 글귀 하나를 인생모토로 삼는 건, 이 복잡하 삶을 살아가는데 적합하지 않다.

책 한 권, 영화 한 편으로는 부족하다. 백권 이상은 읽어보자.

세상에서 제일 많이 팔렸다고 하는 책 성경도 사실 까보면 그 안에 66권의 책이 모여있으니, 책 한권에서 배운 걸로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건 성급하다.




맑스주의는 끝난걸까: 문화적 맑시즘의 발아發芽


A LIE TOLD OFTEN ENOUGH BECOMES THE TRUTH
자주 듣게 되는 거짓은 진실이 된다.

-  Vladimir Lenin
블라디미르 레닌



살펴보니 미국 우파는 그렇게 미국 좌파를 걱정한다.

과거의 맑시즘이 학계와 주류미디어를 장악했다고.

아니, 아이비리그에서 좌파이데올로기가 득세하여 메인스트림이 된거라면, 명문대 졸업생들이 명문(?)기업에 들어가니 그 흐름이 자연스러운 건 맞다.


칼 맑스가 '힙'해지고 있나보다. 한 때 카스트로가 유행했던 것처럼.

아마존에서 셔츠가 팔린다.


미국의 로맨스지상주의를 고려해서 책도 나왔었다. 무려 National Awards 의 Finalist 까지 올라갔다. (2011년)

Love and Capital - Mary Gabriel  (2011)


방관자이자 관찰자로서 이런 주장을 전면적으로 검증하는 건 어려움이 있겠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조사가능한 여러 수단을 통해서 확인해보면 그런 해석이 가능한 근거들은 충분하다. 챗GPT가 그렇고, 검색결과가 그렇고,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도 그렇다. 이상할 정도로 칼 맑스를 옹호하는 편향적 글이 대부분인 점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누구나 수정할 수 있다는 건 ‘대중의 백과사전’으로서 장점이 있지만, 시간 많고 열정 많은 (그 열정의 근원이 선의이건 악의이건) 사람이 더 많은 수정권한을 갖게 된다.‘귀차니즘’이 이미 한 번 휩쓸고 간 우리나라에서 세세한 조사할 필요없이 한 웹사이트에서 알고 싶은 걸 다 알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가.

현 미국좌파의 ‘leading voice’ 자칭 하는 웹사이트의 이름은 Jacobin 이다. 이 Jacobin은 프랑스혁명 때 1만명 이상을 단두대(guillotine)의 이슬로 처형시킨 그룹의 이름이다. 실제로 이케아 스타일의 단두대 매뉴얼을 포스터로 만들어서 완판했다. (링크)

단두대 포스터 -


만약 공산주의의 이면에 정말 ‘메피스토펠리스’, 혹은 ‘그 정신을 표방하는 이들의 목적’이 숨어있다면, ‘모든 사회조건의 철폐’는 대부분의 공산주의 옹호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평등을 위한 평준화가 아니다. 그건 모든 존재자체에 대한 부정, antinatalism이다. 일단 다 때려부수는 게 목표이다.


역사 속에 존재한 모든 사회에서는 국가 단위의 평등이 구현된 바 없다. 국가라는 개념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리더’가 존재해야했고, 리더는 위계질서를 뜻하며 대표이자 통치자가 존재해야한다. 그럼 통치 받는 피지배층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선동당하는 민중이 놓치기 쉬운 건, 그런 선동이 순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내가 널 지배하기 위해 네 분노와 슬픔을 좀 이용할게


그렇다고 모든 사회 전반의 위계질서를 지배와 피지배 구조로 해석하면 인생을 왜곡하게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로만 분류할 수 없는 복잡한 인생을 너무 단순화 시킨게 된다.


일론 머스크가 여러 기업의 대표이고 자산이 많다고 그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투자한 시간과 재능, 열정. 피, 땀, 눈물은?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얻은 탈모는? 부자로서 또 워커홀릭의 삶을 살면서 누리지 못한 일반적 가정의 삶은?


사회의 모든 조건을 철폐하고자 한다는 공산당선언문을 곱씹어본다.


아니, 왜. 바지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도 사회 조건인데, 왜 바지를 세 갈래로 안 나누고 그냥 뒀나. 식사를 할 때 식기구를 손으로 잡는 것도. 사회 조건이라고 하면 사회 조건인데 왜 그런 건 안 건들었을까.

물론 칼 맑스는 개인적으로 실천가능한 영역에서 그걸 실천했다. 개인위생을. 사회조건으로 보고 그걸 거부했나보다. 씻고 수염과 머리를 다듬고 하는 일련의 것을 할 수 있는 한 부정한 걸까.

브루주아계급의 폐지를 가족의 해체로 보고, 국민의 아버지를 김일성으로 두는 북한이나 (북한에선 세습이 계속되고 있지만), 가족이란 구조를 단순히 가부장적 지배자(가해자)와 피지배자(피해자)로 나누는 것엔 연속성을 부여하자면 가능하다.


철학은 글자로만 만나면 낭만적이다.


하지만 삶 속에서 적용시키면 그 결과가 삶 속에서 필연을 낳는다.



철학의 영향에 대해 인지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는 시대이다.

공산당 선언문의 시작 - 출처: marxist.org/archieve


A spectre is haunting Europe - The spectre of communism.


공산당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공산주의라는 Spectre (Spector) 가 유럽에 출현한다/배회한다/두렵게한다.  Spector는 복수를 하기 위해 사람에게 깃드는 유령이라고 한다. (그런 유령이 있다고 믿는 건 아니다.)


이 공산주의란 유령은 이름을 사회주의, 맑시즘, 메타 맑시즘, 사회적 맑시즘, 이름을 바꿔가며 대륙을 넘어 바다를 건너 계속 우리 사이에 떠다닌다. 지금은 아마 "A spectre is haunting America"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헐리우드와 미국 유학파가 많은 대한민국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 한국에 대한 조사는 하지 않았다)


우리가 갈 길을 찾는 청년이든 아이를 키우는 부모이든 이 유령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나치즘이 파시즘이 공산주의가 그 불씨를 피워내기 시작할 때, 방관한 국가들을 기억해야 한다. 스위스급의 천혜적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면 어느 개인도 ‘중립’을 유지하긴 어려울테니.


별생각이 없이 사는 건, 그 유령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이고 우리 아이를 내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Watch out. A spector of Marxism is coming

-빙산-



참고문헌:

1. Paul Kengor, <The Devil and Karl Marx: Communism's Long March of Death, Deception, and Inflitration)

2. Robert Payne ‘The Unknown Karl Marx’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1

3. Karl Marx - Selected Writing - edited by David McLellan,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4. marxists.architexturez.net

5. www.marxists.org


P.S= 드디어 끝났습니다. 정치학전공도, 철학전공도 아닌 회사원이 감히 '공산주의' 와 '맑시즘'에 대해 논하게 되다보니, 가면 갈수록 자료는 방대해지고 주제를 잘못 잡은 것 같아 그만 두고 싶었는데 또 포기하는 건 싫어해서 끝까지 왔네요. 그러고보니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었네요. 시의적절하기엔 하루만 남은 글이지만, 연재일에 맞춰 올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연재 두 번 제끼니깐 또 유혹이 찾아오는 걸 보니, 역시 약속은 어기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자료조사 때문에 완독 선물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ㅠ_ㅠ  (완성되었습니다 7/4 23:14 기준, 최하단에 추가)

마지막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일요일에 읽기 시작하신 분들, 수요일이나 목요일 쯤 되야 다 읽으실 것 같은데... 그 때 맞춰서 추가해보겠습니다.!!


임시선물로 저희 집 막내의 박수..!


**완독 선물 추가 ***

untitled (Acoustic) / Recorded in 2010

- 당시 제목은 4000이었는데, 새로운 제목을 찾고 있습니다.

- 시끄러운 일렉기타 소리 들으시느라 고생하셨던 청취자(?) 작가님들을 위해, 비트도 드럼 대신 통기타를 두드려 녹음한 곡이에요.

어쿠스틱 기타 온리의 나름 대중성(?)을 지향했던 곡 공개합니다.


https://youtu.be/CS5XYWna99Q

untitled (acoustic) - Bi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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