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회복되는가: 치료인가, 치유인가? (V.2)
-주의사항:
(1) 이미 정신과에서 처방한 약을 복용 중이신 분들에게는 이 글을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단, 오랜 기간 동안 치료의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겐 의미 있는 질문을 던져드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추천드립니다.
(2) 지난 연재글보다 깁니다. 50시간 이상 조사한 정보를 담은 글이라 그 중에 건져가실 만한 내용이 있을 거라 기대해봅니다.
(3) 현장에서 환자의 치료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시는 정신과의사선생님들이나 심리치료사의 노고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 ‘사회 트렌드’로서 대중이 받아드리는 시선에 대한 글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실 수 있는 분은 이 시대에 흔치 않은 ADHD가 100% 없는 분이실거라 예상합니다. 본의 아니게, ADHD진단기능을 지닌 글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집필스타일이 ADHD스럽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이번에 살펴 볼 오해: 마음의 상처엔 꼭 약을 먹어야할까요?]
<목차>
1. 프롤로그: 장래희망
2. 사회인으로서 마주한 정신건강
3. 심리치료에 대한 토론
4. 군대에서 만난 상담심리학
5. 미국에서 경험한 치유
6. 아빠이자 남편으로서
7. ‘정신질환’의 보편화와 심리치료의 부작용
8. 세계관에 내재된 근본적 한계
9. 양육자가 적용가능한 부분
10. 에필로그: “환자”로서의 나의 감사와 후회
초등학교 때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고 그림을 그린 기억이 있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유년시절의 장래희망이다.
중국으로 간 후, 과학과 멀어지고 친해진 건 농구공이었고, 그 다음은 기타였다.
둘 다 직업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낭만도 열정도 없던 중학생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의례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질문에 대해 뚜렷한 답을 찾지 못했다.
“넌 꿈이 뭐야?”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넌 비전이 뭐야”
(…… 비전이 정확히 뭔데?……?)
늘 추상적인 답변이 있긴 했다.
-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
그게 좀 더 발전(?)하여 나중에는 ’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하며 나도 행복할 수 있는 삶‘이 되었다.
그러다가 인생 영화 TOP10에서 내려와본 적이 없는 영화 두 편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는 <패치 아담스>, 또 다른 하나는 <굿 윌 헌팅>.
영화 <패치 아담스>에서는 환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정신의학과 의사’를 보았고, 그 환자가 의사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보았다. <굿 윌 헌팅>에서는 심리상담가 (혹은 심리치료사)가 학대 받으며 자란 천재적인 청년이 사랑 받는 법과 도전하는 법을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 묘사되었다.
마침 내 삶 속에서도 반복되던 패턴이 있었다.
해외생활 속에서 만난 중,고등학교 친구들이 나에게 본인의 문제에 대해 나누고 상담하고 피드백을 받고자 했던 것.
확신할 수 없지만 이 두 가지가 영향을 미쳤던 걸지도 모르겠다.
경제적으로 내 미국 유학을 지지해줄 수 없던 가정 형편.
패기는 중국으로 이주(?)하며 상실한 ‘비자발적으로 소극적이고 염세적인 운명론자’가 된 고등학생. 그렇게 아주 쉽게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절망을 얻고) 미국에서의 삶을 포기했다. 중국에서 고3 생활을 시작하면서 기존 학교의 복학(?)조건은 북경대학교, 청화(칭화)대학교에 지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학교생활을 3년, 그 이상 해온 학생들의 기회를 뺐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보고, 한국에서 반년정도 더 준비해서 다음 해 대학입시에 도전하게 되었다.(중국은 9월이 새학기 시작이다)
...
전공을 정해야 하는데, 돈에는 관심이 없으니 인기 많은 경영이나 경제는 관심이 없었고, (아버지가 포기시킨) 음악을 전공으로 하자니 입시준비로 음악 레슨을 받아본 적도 없고……그렇게 '파랑대학교'와 '남색대학교'에 지망할 때, ’심리학‘을 선택한다.
지금 돌아보면 절대로 ’굿 윌 헌팅‘의 잔향효과였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기여하며 나도 행복해지는 일‘이란 낭만적인 표현으로 심리학과 상담학이란 학문에 대해 아주 자의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었던 거다.
어쩌면 어머니께서 두 자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대학원에 도전하시면서 상담학 석사를 하신 것도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거실 책장부터 밥상에서 쉽게 심리학과 관련된 서적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대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인이 될 무렾, 박사논문도 통과하셨다. 노년(?)까지 학구열을 불태우신 긍지의 한국인. 가족들이 어머니께서. 포기 하지 않도록 응원했다.
수험생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하지만 낭만적 인간의 관점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난 1지망 파랑대학교도 2지망 남색대학교의 진학도 실패한다. (내가 수학을 ’과외‘해준 한 살 아래 친구도 남색대학교에 진학한 것이 비교가 되어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큰 좌절 없이 바로 사고의 전환이 있었다.
사실 ‘블루계열’ 두 학교를 고려할 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이런 걱정이 있었다. ‘명문대 타이틀로 내 가치를 과대평가 받고 학교이름에 대한 선입견의 영향을 받는 미래’가 우려 됐었다. (초등학교 때 외모로 호감을 얻고 사랑 아닌 호감에 데였던 기억이 작용했는 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중,고등학생이 되며 ‘리즈’시절은 사라졌다.)
‘학벌’로 나를 바라볼 시선, 그게 나라는 사람에게 느낄 호감에 작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했던 그 누구가 봐도 ‘이솝 우화의 포도 못 먹은 여우’의 어설픈 정신승리로 보이겠지만, 그게 정말로 ‘이상한 나’의 생각이었다.
다른 사유로는 면접 때 만난 파랑대학교 심리학부 교수님이 질문을 하시는데, 자기가 무슨 질문을 하는 지 모르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 빙빙 돌았다. 컨디션이 안 좋았을 수도 있는 건데 막연히 가지고 있던 교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오만한 고등학생 같으니라고)
자유전공학부의 1학년과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많은 영어수업이 매력적인 3지망의 대학.
대학생이 되어 정말 별 생각없이 순수한 탐구의 목적으로 많은 개론수업을 들었다. 심리학 개론, 상담학 개론, 사회복지학 개론, 교육학개론, 사이코드라마,공간학 입문, 생물학…등.
하지만 막상 심리학 수업을 듣고나니, 이 길을 걷고 난 후의 내 모습이 ‘굿 윌 헌팅’의 로빈 윌리엄스가 아니라, 로빈 윌리엄스가 만난 ‘환자와 눈 한 번 안 마주치던 정신과 의사’가 될 것 같다는 걸 직감했다.
어떤 것이 직업이 되면 사무적이 될 거라는 예견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학년 때는 사이코드라마 수업에 참여하면서 숙제로 받은 피상담자의 사례들을 읽는 게 정서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들의 아픔이 내 기억이 되고, 내 아픔이 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런 걸 이겨내고 직업으로서 해내야 한다면, 감정을 더 무디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러면 공감능력이 내려가고, 그건 환자와 ’라포르(Rapport)’ 를 구축하는데 또 문제가 될 것 같았다. 결국 ‘일을 일로 봐야하는 게 정답인데, 그게 ’사무적‘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삶에 대한 애착이 부족했던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상처를 다루는 일을 하고 살아가게 되면 내가 ‘식스센스’의 ‘브루스 윌리스’(아동 심리치료사)가 될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어렴풋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어디까지나 과거를 회상하는 ’지금의 나’의 생각이다.)
극중에서 심리치료사의 환자가 목숨을 끊는 사례가 나온다
무엇보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의 친구가 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만으로도 치료에 버금가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 사람를 치유할 수 있는 건 우정이고 사랑이라고.
내가 그렇게 내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 내 안의 아픔을 이겨냈듯이.
여기까지가 나와 '상담심리학'의 짧은 과거이다.
※이상하게도 의사가 되고 싶었던 생각은 없었다. 당시의 내 기준으로 너무 무거운 책임이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대학교 때 들었던 심리학개론 수업에서 교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을 선택하는 건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배우는 과정 속에서 자신에 대해 더 알아가게 되고, 궁극적으로 ‘자기를 먼저 치유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상담학부에서는 묘하게 많은 커플들이 생겨났던 기억이 있다. 마음을 열고 나누다보니 가까워진 걸까.)
전공으로서의 심리학은 궤도에서 사라졌지만 학문으로서의 관심은 유지되어왔다.
고등학교 때 읽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대학생이 되어 읽은 <사랑의 기술>부터 <사랑이라는 이름의 중독>을 거쳐, 어머니께서 읽으시던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원제: Crazy Like US> 까지.
회사원이 되고난 첫 1년 간은 수면시간 5시간 외에는 계속 업무가 이어졌다.
1년차인 신입에게 이미 시동이 걸린 ㅇㅇ억원의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임무가 주어졌고, 미국 쪽 파트너, 영국 쪽 파트너와 촉박한 일정으로 업무를 진행해야 했다. 내가 회사에서 퇴근할 무렵, 영국은 출근을 했고, 그들이 퇴근할 무렵 내가 잠들고 일어나면, 미국에서 출근을 했다.
심리학에 대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물론 2년 차가 되고, ‘나를 선택해준 고마운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정상화‘되고, 회사 돌아가는 상황이 눈에 돌어온 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군대를 가보니 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서 더 이상의 다양성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회인이 되어보니 인간성에 대한 극단적인 다양함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정말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인걸까?
이런 질문을 하게 하는 상급자들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심리학적 관점에서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성적 힘이 되었다. 이해는 용서 (혹은 무시)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한편 10년동안 직장생활을 하고 돌아보니, 사회의 트렌트가 달라지는 것도 경험했다.
신입 일 때는 ㅇㅇ부장, ㅁㅁ팀장이 노래방에서 만취해서 노래를 부르다가 여자동기들을 붙잡고 춤을 추려해서 그 사이로 뛰어들어 춤사위의 대상이 되었던 기억이 있는데, 5-6년 후, 어느 덧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하면 정직을 당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바람직한 미투운동의 여파.
당연했던 부하를 향한 정서적으로 둔감한 상사의 요구는 어느 선 상에선 ‘갑질’에 속하게 되었고, 몇 번의 신고와 에피소드를 통해 상사들도 조심스러워졌다.
인사팀에서 직원들의 정신건강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하자 이런 저런 사내강의나 캠페인을 했다. 건강검진 설문지에서도 업무스트레스에 대한 항목이 필수가 되었다.
그렇게 지금은 ’정상이 아니라고 확신했던 상사‘도 젠틀한 인간의 모습을 띄고 있고, 직원의 오타와 실수에 불 같이 화를 낸 적이 있던 상사는 ’코칭수업‘을 듣고 ’라이프 코치‘가 되고자 하는 목표에 부합한 온유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은 안 변한다’는 말에 늘 반문을 하게 됐다.
사람 나름이긴 하지
과거에 그들은 부하직원들로부터 미팅 후, ’미친 거 아니야?‘ 로 시작하여 ’정신병 환자’라는 비전문가집단의 진단까지 받는 경우도 흔했다.
무엇이 이 ‘정신병’을 고친 걸까?
그들은 심리치료를 받았을까?
어떤 약을 먹은 걸까?
아, 소위 ‘월요병’ (‘개그콘서트 종료 증후군’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다음날 출근할 것을 생각하면 미리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난 월요병을 경험한 적이 없다.
유튜브의 세계에서 토론 콘텐츠를 통해 깨달은 ’유식한 사람들의 대화‘가 주는 ’오락성‘.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내도 남는 게 있는 취미 생활‘이 되었다.
그렇게 ‘지식 습득‘라는 취미가 시작될 무렵, 한 대학교수가 자신의 유튜브에 대학강의를 올려 놓은 것을 보게 됐다.
유학을 가지 않아도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시대임을 감사하며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공부를 재미있게 했다. 영어로 들으니 대학교에 들었던 개론 수업보다 더 재미있었다.
역시 공부는 자발적으로 하는 게 제 맛인가보다. 글쓰기도 그렇지만
그 사이 심리학은 사회 속에서 다른 형태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고 지난 몇년 간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도 남용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 대해 얘기하는 부모들의 입에서 ‘ADHD‘가 ’우리 치킨 시켜먹을까’처럼 보편적이 되었다.
내가 재미있게 본 헐리우드 영화 속의 상담가들은 우리나라로 넘어와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주인공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왔고, 몇년이 지나자 심지어 이제는 픽사 애니메이션<인사이드 아웃(2015)> 을 통해서도 연령층을 넓혔다. 어느 새 ’인사이드 아웃 2 (2024) 까지 나왔다.
어느 시점에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가 되었고, 십대들도 의례적으로 겪는 ‘성장통’인 것처럼 이야기 되고 있었다. 당연히 집중력이 부족할 나이의 아이들에게 부모들은 ‘ADHD‘란 이름표를 붙이려 하는 게 보였다.
학업을 중요시 하는 부모들은 아이들의 학습능력에 연관된 능력을 높여준다는 상품들을 구매한다. 예전부터 이름만 들어본 적이 있는 ‘엠씨스퀘어’라는 기기부터 (2023년에는 LG전자에서 ‘브리즈‘제품도 나온다), 감옥의 독방인지 공부방인지 알 수 없는 ’독방‘ 같은 밀폐형 독서대도 있다. 소위 ‘ADHD’치료제를 ‘공부약’인 것처럼 사용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도 있을 거다. (그게 공부능력을 향상시켜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부작용을 겪거나 그런 약물이 ‘게이트웨이gateway 약물’로 작용하기도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즈 갬빗>에서도 드러났지만 약의 부작용은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보편적인 항정신성의약품들을 남용하는 사례는 종종 유명인의 몰락과 연관된다.
그런데 인류는 아직 Mind-Body 인터페이스, 정신과 몸의 관계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분명 생화학적 불균형으로 발생하는 정신병리학적 현상도 존재할 거다. 하지만 정신의학회, 심리학회에서도 인지하듯이 심리적, 사회적, 도덕적 요인 등도 영향을 미친다.
그 외 영양학적이나 유해한 환경오염 등의 더 복잡한 요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사람에 따라 ‘몸과 정신’ 외에도 영혼(spirit)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용인할 수 있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또 다른 차원이 하나 더 추가 되서 또 다른해석이 존재하니, 단순히 ‘생화학적 무언가’ 때문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해석하고 치료하려고 면 그건 과도한 단순화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이 트렌드인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잡한 걸 싫어한다. 그런 트렌드는 디자인 뿐 아니라 대중 음악을 거쳐 철학, 즉 삶의 태도에도 적용됐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아주 복잡한 문제‘를 ’가장 간단해 보이는 방법‘으로 치료하고 하는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수년 전 시작된 긴 탐구의 시작점엔 이런 질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비물질적인 정신적인 문제를 약으로 치료할 수 있을까?
자료조사 중, 심리치료학 관계자들*의 컨퍼런스에서 진행한 토론*을 들어봤다.
이 글에서 명칭 구분에 대한 설명:
의대 교육을 거쳐 의사면허가 있는 Psychiatrist는 정신과의사.
심리학 석,박사 과정과 1-2년의 클리닉 훈련을 받고 될 수 있는 Psychotherapist는 심리치료사로 부르고 있다. 정신과의사는 약을 처방할 수 있고, 심리치료사는 그렇지 않다. (미국기준) 두 직군이 함께 협업하여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울증 환자로서 정신과 치료와 심리상담을 경험하신 작가님께서 정신건강의학과와 심리상담에 대해 잘 소개한 글이 있어 링크를 남긴다.
https://brunch.co.kr/@fcdf994cbb234dc/85
어떤 치료가 다른 치료보다 더 효과적인지, 왜 그런지.
무엇이 치료를 효과적이게 하는 지 여러 주제를 가지고 토론이 이어졌다.
(참고자료) Psychotherapy debate with Peter Fonagy and Bruce Wampold at the Nordic Conference on Mental Health https://youtu.be/U5fhhAZnduU?si=chUBO8-Oe8fd5cZG
40여년간 이런 컨퍼런스를 참가했다는 학자(Bruce Wampold)*는 이런 의문이 있었다고 한다.
(Bruce Wampold: 윈스콘신-메디슨 대학 상담심리학 석좌교수)
왜 우리는 늘 새로운 치료법이 생기고 소개하는지?
왜 데이터를 보면 심리치료사들이 경험이 쌓일수록 치료의 효과가 떨어지는지?
왜 심리치료/정신과치료가 보편화 될수록 미국인들의 정신건강은 악화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심리치료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현 문제점에 대해 다른 답변을 제시한다.
한 학자는 어떤 치료를 적용하는 지에 대한 연구보다, 효과적인 실적을 내고 있는 심리치료사들 자체를 연구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는 심리치료사들이 연륜이 쌓일수록 환자들을 증상으로 분류한 후, ’증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환자와 심리치료사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치유의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경우) 일단 면허를 취득한 후, 어떤 피드백이나 감독/슈퍼비전이 필요없는 현 체계 속에서 필요한 건 기존 전문인력들의 정기적인 ‘연습/훈련practice’라고 해결책을 제안한다.
두 학자들의 토론 속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어떤 증상에는 어떤 치료'가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그런 비교연구에서 실제 치료효과를 도출하는 원인이 간과되어 있다는 의견이었다. 즉 실제로 어떤 게 환자를 치유한 건지 명확하지 않다는 말이다.
환자가 겪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환자가 처한 병리학적 현상 자체라기 보다는 사회적 불편에서 오는 것이고 그 불편에서 유발된 단절이 환자에게 고통의 요인이 된다는 해석을 했다. 그래서 환자가 심리치료사를 신뢰하고, 구축된 ’라포르‘ 위에서 상대방(치료자)를 ‘배울 구석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가 제시하는 치료법의 효용성에 대해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이걸 위약효과, ’플라시보 이펙트‘ 와 관련지어 환자를 치유하는 게 ‘특정 방법론‘이 아니라, 환자가 치유에 대한 믿음(?)이 있는 지 역시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한다. (어떤 심리치료법을 적용하는 것보다 심리치료사의 '실력'과 (그걸 바탕으로 구축된) 환자와 심리치료사의 관계가 차이를 만드는 것일 수 있다는 의견)
토론이라고 하기엔 학계 내의 내부자들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전제는 서로 부정하지 않았다. 심리치료는 (그렇지 않은 사례도 있지만) 유효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의 저자 Ethan Watters는 2010년에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한국엔 2011년 번역본이 나왔다) 그는 대기업(제약회사), 대중매체, NGO 인도주의단체(자원봉사단체) 등이 약물과 치료의 전파자로 작용하는 것에 대해 비평했다.
책에서 저자는 쓰나미 후의 스리랑카에서 현지 문화를 무시한 '자원봉사 투어리즘 (Voluntourism)'을 비평한다. 현지언어도 사용할 수 없는 자원봉사자들을 보내 미국의 '트라우마'에 대한 이해를 심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 Stress Disorder/PTSD)' 라는 진단명을 '홍보'했다고 비평한다. 현지에선 물과 기본적인 약이 필요했는데 '심리치료'를 제공했다는 거다.
홍콩의 대중매체가 거식증환자(Anorexics)를 화제성 있는 대상으로 다루며 거식증이 증가한 현상.
일본의 '비애melancholy'가 서구화된 '우울증depression'이 된 것도 다룬다.
고민해봤지만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감이 안 서는 단어이다. '증상 선택지'?
한 시대에 사회,문화적으로 수용되는 질환이 그 범위가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특정 증상이 특정문화, 특정사회에서 자주 보고 되는 현상을 설명할 때, 그 증상이 선택되는 범주를 뜻한다.
최근 현대 사회에서는 문화의 영향을 받는 '불안'과 '우울'이 있고 그 전 세대에서는 '만성피로'라는 것이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19세기의 혼절하는 '히스테리아' 가 있겠다. (한국 고전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쓰러지는 여성 캐릭터가 겹친다.)
대한민국에는 지금 그 Symptom Pool 안에 우울증, 산후우울증과 함께 ADHD가 들어있는 것 같다.
어찌보면 당연한 중독성 있는 디지털기기 사용의 '부작용'임에도 본인의 상태에 병명을 붙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과거에 약물처방을 받은 이력이 있거나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호르몬에 영향을 미치는 화학물에 노출된 바가 있다면 생화학적 작용이 미친 영향으로 실제로 외부환경이 아닌, 신체 내부의 상태로 인한 문제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물론 배제할 수 없다.*
이런 Symptom Pool이 존재한다는 걸 인지하면 이런 비평이 여러 개 존재한다:
- 환자의 상태에 대해 환원주의적 과도한 단순화가 적용되어 개인차이를 간과할 수 있음
- 일반적인 행동에 병명을 붙여 병리화 할 리스크가 있음
- Symptom Pool 밖의 다른 질환에 대해서는 간과하기 쉬움
이 책을 낸 후, 2014년 저자는 캐나다의 TV채널 TVO에서는 저자와 3명의 정신의학과 교수(정신과의사) 4명과 약 40분짜리 토론을 한다. 비평가와 내부전문가의 비율이 1대 4인 뉴스 토론이다.
(참고자료)TVO https://youtu.be/QQOSVqBUncw
요약을 하자면 이 주제를 둘러쌓고 인간의 '정신질환'에 대해 국가와 문화별로 달리 해석해야 한다는 '문화적 상대주의'와 모든 인간, 범문화권에 통용된다는 보편주의(universalism)가 대립하고 있었다.
뉴스진행자의 한마디가 웃음을 자아냈다.
이 책을 내신 후에도 아내분께서 작가님과 말을 섞고 계신가요?
Is your wife still talking to you after the book?
Ethan Watters의 대답을 통해, 그의 아내가 정신과의사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정신의학과/심리치료라는 분야에 대해 비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학계에서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한 의견을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네, 아직 대화하고 지냅니다.
Yes, she's still talking to me.
정신과의사/교수들 중에서도 Ethan Watters의 비평에 동의하는 부분들을 일부 소개한다.
토론토 대학의 정신과 교수이자 여러 센터장을 맡고 있는 Kwamee Mekenzie 교수는 산후우울증을 대하는 다른 문화권의 연구를 이야기했다:
"서양에서는 10~20%의 여성이 산후우울증을 겪는데, 우리는 심리치료와 약으로 그들을 도우려합니다.
하자민 중국이나 홍콩, 아프리카의 국가들, 피지를 보면, 아주 적은 사람들만 산후우울증을 겪습는다.
그걸 분석해보면, 영국이나 미국과 캐나다를 보면 아이들이 태어난 후, 그 케어의 초점이 아이에게 맞춰집니다.
...(생략)... 하지만 산후우울증이 적은 지역에서는 초점이 엄마에게 갑니다.
엄마가 '옳은 일'을 할거라고 믿고, 모든 도움은 엄마에게 갑니다.
가사노동을 하지 않고, 요리를 해주고, 엄마를 돕기 위한 사람들이 와줍니다.
이걸 영국의 West MidLand로 도입한 후, 산후우울증은 50% 감소했습니다. "
다른 교수는 우리가 어디에 선을 긋는지 진단의 범주(DSM)가 중요하다며 질문을 던졌다.
'담배를 피는 건 정신질환일까요?'
토론 말미에 2008년에 방영된 30초짜리 공익광고 영상이 나온다.
참고자료 https://youtu.be/Btp3FdtOuwM?si=lnwdXxsuTCGYtpGH
사무공간의 프린트실에서 한 여성이 일을 하고 있다.
갑자기 한 남성이 나타난다.
둘의 대사는 이렇게 흘러간다.
여성: I didn't see you come in.
들어오는 걸 못 봤는데요?
남성: most people don't.
대부분 그렇습니다.
여성: who are you?
누구신데요?
남성: i'm depression, and I've come for you,
전 우울증입니다. 당신에게 왔죠.
여성: (chuckles) i'm not depressed
(웃으며) 전 우울하지 않은데요?
남성: schizophrenia, anxiety disorders, eating, mood disorders?
정신분열증, 불안장애, 식사나 기분 장애 없어요?
(수첩을 확인한다)
oh, my mistake,
오, 제 실수네요.
it's next Tuesday that you lose your job, and your boyfriend leaves you.
당신이 일자리를 잃고 남자친구가 떠나는 건 다음 주 화요일이네요.
마지막에 이런 텍스트가 뜹니다.
Change the way you think
(정신건강에 대해) 생각을 달리 해보세요.
뉴스앵커는 이 광고 후,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정신질환의 피해자라는 것 같군요.
저자는 이렇게 마무리 한다:
" America Mental Health Institute 에서는 매해 미국인의 25%가 진단가능한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건 문화적 트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전세계로 수출하는 것에 대해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심리치료 토론’에서도 그런 질문이 있었다.
왜 유방암 때처럼 사람들의 인식이 올라간 후 발병율이 낮아지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는데 더 많은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게 된 걸까요?
4. 군대에서 만난 상담심리학
다시 내 삶을 돌아보니 대학생활과 직장생활 사이의 심리학과의 역사 중, 별말 없이 넘어간 구간이 있었다.
군대라는 폐쇄된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여성들이 그렇게 싫어 한다는 군대이야기이라, 여성작가님들께 일단 양해의 말씀을…)
난 우리 학부의 트렌드였던 학사장교를 고민하다가 4학년 1학기가 되어서야 어학병 시험을 보고 공군에 입대했다. (비행)단본부 소속이었는데 앞 사무실에는 감찰실이 있었고, 반대편 복도 저쪽에는 단장실이 있었다. (내 근무처는 슬쩍 생략한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도 참 다양하다고 생각했지만, 군대에는 정신병리학적으로 분류해도 좋을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선임은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다니다가 바로 입대를 한 9X년생이었다. 열 살 어린 한 기수 위 ‘맞고참’인 거다. 부대배치 첫 날, 어둑한 세탁실에서 그는 나와 동기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군입대를 빨리 한 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X 하고 싶어서다”
(참고로 둘 다 일병이 되고 나서야 친해졌고,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나의 동기는 정말 ‘성인이 이렇게 어리버리해도 되는건가?’ 라는 질문을 하루에 다섯번은 하게 했던…… 착하고 순수하지만 같이 전장에 나가고 싶지 않은 녀석이었다. 약간의 스트레스도 이 녀석을 ’정지‘시켰다.
(오죽하면 전역 후, 다른 선임들과는 식사도 하고 연락도 종종했지만, 이 녀석에게는 한 번도…… 뭔가 반성…) 샤워을 할 때 보니 큰 샴푸를 다섯 번 펌프질해서 어마어마한 량으로 머리카락 길이가 1.5cm 겨우 넘을까 말까하는 머리를 감는 등 특이한 녀석이었다.
또 다른 선임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입대 했는데, 계급을 정말 훈장인 것처럼 여기는 ‘놀이터 골목대장’이었다. 열등감이 가득한 여린 자아가 여러 가지 상황에서 그를 불안정적이고 늘 폭발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일일이 소개하자면 참 개성넘치는 부대원들이지만, 그 중에서 심리치료나 정신과와 관련된 인원이 있어 군대 얘기로 넘어온 거다.
본부에 있다보니 부대 내에 일어나는 여러 소식들이 오갔는데 뜬금없이 소속을 옮기게 된 사병들의 사연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중간에 내가 일병-상병 무렵 우리 본부로 ‘편입’된 두 ’관심병사‘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이병으로 우리 본부 소속으로 배치 받았을 때, 난 이미 ’자리를 잡아‘ 이병 때부터 계획한 ’개혁‘을 진행 중이었다. 기존에 존재하던 악폐습*을 위, 아래로 설득하며 바꿔나가고 있었다. 자기들도 결국 안 좋은 경험을 하고 그걸 답습한 그들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것도 과한 것 같았고, 신고로 선임들을 영창 보내는 혁명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병 이하는 식사시, 숫가락을 쓰면 안된다거나. 이병은 TV를 보면 안된다거나, 독서실 사용을 제한한다거나, 선임의 빨래를 대신 한다거나 하는 쓰잘데기 없는 계급 권위의식이 반영된 그런 것들이다.
사례 1
선임들은 그를 ‘다크나이트’라고 불렀다.
그는 기존의 ㅇㅇ대대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비난’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군대 특성상 언어폭력과 물리적 얼차려도 혼재되었을 거다.
그 이유는 잘 때마다 엄청난 비명을 지르기 때문이다. 비단 불침번 교대를 위해 깨울 때만이 아니라 거의 매일 밤 꿈 속에서 무슨 일을 당하는 건지 걱정될 필사적인 비명.
나중에 들어보니 자칭 시골 출신으로 정말 죽어라 공부를 하며 정신적인 압박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후, ’남색대학교‘에 갔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벨트로 맞는 등 안 좋은 관계도 털어놓았다. 그리고 군대에서도 새로운 환경 속 새로운 압박 속에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발현되고 있었다고 한다. 처방을 받아 약도 먹고 있다고 했다.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니 1인 8실(?) 생활관에서 그와 같은 방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배치 받은 후, 선임들은 방 구성원을 짜는 것에 엄청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와 같이 자는 건 ‘벌칙’처럼 여겨졌다.
그 '친구'가 왔을 때, 난 더이상 이병이 아니었고, 일 잘하고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나이값하는 일병이 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 상병이 되니, 일부 권한이 넘어왔다. 생활관원 배치를 할 때
잘 때 사격용 귀마개를 끼고 자는 방법을 같은 생활관원들에게 대안으로 권유하고 그가 우리 생활관에 배치되는 걸 수용했다. 그리고 줏어읽은 심리학적 지식들을 섞어 부대원들에게 이야기했다.
‘자기가 소리지르는 걸로 스스로도 통제가 안되서 스트레스를 이미 받는 상태일테니,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의식하지 않도록 우리가 배려해주자.‘
이 친구 받는 스트레스가 우리가 자다가 듣는 비명으로 이어진다는 설명도 추가했다.
그렇게 이병 때 매일 소리를 지르던 그는 상병이 되면서 점점 소리지르는 날이 줄어들고, 병장이 되자 ’다크나이트‘가 되는 날은 극히 드물었다.
사례 2
공교롭게도 이 친구도 ‘남색대학교’ 출신이다.
키가 작았던 위 이야기의 병사와 달리 키도 크고 체격도 좋다.
겉으로 보기엔 젠틀한 친구였다. 배려심도 깊고 상냥한 편.
자각몽(Lucid Dream)에 대해 막대한 관심이 있었고 자기 실험을 이야기해주는 걸 좋아했다. 종종 타로카드로 이런 저런 점(?)도 보며, 이건 주술적인 의미가 없이 재미로 한다고 했다.
그 역시 전 소속대대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부대 문화‘ 속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관심사병이 되었던 것 같다.
상담자격증도 없지만 그의 상담 요청에 생활관 한 구석에 있는 ‘체력단련실’의 독서대에 앉아 다른 사병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들어줬던 기억이 있다.
특별히 CBT(인지행동치료)라든가 상담심리학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도입해서 접근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한 지성인과 지성인으로서 그의 관심사에 공감을 하고,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그가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특히 이 친구는 원래 교회를 다녔다고 하는데, 부대에서 "짬이 차지 않아" (=아직 계급이 높지 않아) 종교의 자유도 박탈 당한 채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우리 본부로 온 후에는 그런 일도 없으니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종교활동 속에서 점차 더 자주 웃고 덜 고민하는 사람으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이 친구와는 전역 후에도 따로 만난 적도 있다. 그 시절 고마웠던 사람이라며 쑥쓰러운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고, 당시 고민 상담하던 것처럼 앞으로의 진로, 전공변경에 대한 상담을 하기도 했다. (내가 뭐라고…) 결국 도전하고자 하던 도전을 하고, 지금은 유학 생활 중에 대학교수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까지 기억난다.
이런 두 친구들 모두 군 생활 중, 삶을 포기하려 했다. 다른 한 친구도 있지만, 그 친구는 좀 더 유명한 사례라 나와 그의 익명성 보장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생략한다.
약 2년 안에 끝나는 것이 예정되어 있는 군생활 때문에 남은 여생을 포기한다? 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머리로는. 나에게 언어폭력을 하던 부당한 대우를 하던 시간이 지나면 끝날 거라는 게 사실. 버텨내면 그 사람이 전역할 것이라는 것도 사실. 내가 신고를 하면 그 사람을 곤란하게 할 수 있다는 최후의 수단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적었다. 그걸 사용한 사람들이 다른 부대로 편입된다. 관심사병이라는 딱지와 함께)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다. Mentalization.
이것의 인지여부는 타인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넌 왜 그래?! 넌 왜 그것 밖에 못해?“
라는 짜증 섞인 반응 안에는 이런 게 숨어 있다.
‘나라면 이렇게 할텐데’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다.
그 시절 그런 극단적인 시도를 거쳐 나와 만나게 된 ‘친구’들을 통해 깨달았던 점이 있다.
사람마다 다 ‘한계점’이 다르다는 것.
난 정신력이 강한 편이라서 의도적으로든 무의시적으로든 괴롭히는 사람들의 ‘공격’을 잘 방어해내는 편이지만, 모든 사람이 나와 비슷한 강도의 정신력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는 건 큰 오류가 될 수 있다.
(결혼생활 속에서도 자주 스스로를 상기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 시절 그런 친구들을 대하는 것에 대해 타 병사들에게 주의시키던 표현이 떠올려본다. 대충 이런 문장이었던 것 같다.
사람마다 한계치가 달라서 어떤 사람은 10으로 맞아야 죽는데, 어떤 사람은 1로 맞아도 죽을 수 있어. 그러니깐 그 1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참고로 상병, 병장이 된 그들은 약을 먹지 않게 되었다.
그들을 치료한 건 처방전이었을까?
아니면 달라진 환경이었을까?
2009년, 군대에서의 나는 본의 아니게 치유와 가깝게 있었지만, 9-10년전의 과거로 더 돌아가면 미국에서 나는 치유 받는 쪽이었다. 유년시절 겪어야 했던 친구들과의 단절과, 새로 쌓은 관계를 다시 한 번 잃어야 했던 절망, 그 후의 무기력. 새로운 도시에서 다시 시작되었던 우정이 악의적인 친구들의 조롱으로 다시 한 번 끊어내어야 했던 우정. 그래서 '도전의 탈을 쓴 도피'로 내 주변 환경을 바꿨던 것이 미국 교환학생 생활의 시작이었다.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용기가 아니라 삶에 대한 애착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난 아무 것도 소중하지 않은데요?'
그럼 사실 그 이면에는 '자아'라고 하는 '나', '내가 가장 소중한데' 나를 위협하는 외부의 것들이 두려운 거일 경우에 속할지도 모른다.
난 그런 가장 기본적인 자기애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한국학생들이 전형적으로 겪는 '부모를 위해 사는 삶'을 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부모님께서 내가 해외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 힘들어 하실 것 같아서 '배려차원'에서 내 힘듦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무튼 그런 마음 속의 이런 저런 상처가 미국 생활을 통해 치유되었던 것 같다.
호스트패밀리의 사랑을 받아 그런 건 아니다.
자신들을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해서 나와 독일학생을 받아드렸다는 노 필리핀이민자 부부.
나와 독일 학생 모두 개신교에 익숙했는데 호스트패밀리가 다니는 성당 출석을 강요 받았다. 처음엔 우리를 머물게 해주는 것이 감사해서 장단을 맞춰주었지만,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회로 초대를 받아 방문하고 싶었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호스트 패밀리의 어머니는 이런 말을 했다.
너희가 성당을 가지 않으면 우리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선행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아무튼 우리 둘은 이걸 종교자유의 박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이런 상황을 '교회 다니는 친구들'에게 말하게 됐다. 그리고 절차를 밟아 호스트패밀리를 바꾸게 되었다. 독일친구는 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집으로, 나는 듣던 수업의 선생님 집으로.
한국에서도 끊임없는 이사가 있었는데, 1년도 안 되는 미국 생활에서도 그렇게 2번째 이사가 있었다. 마침 아들이 대학교에 진학해서 빈 방이 있다고 한 'Food Science and Techonolgy'란 '쉬운 과학 수업'*의 여선생님이셨다. 이 분은 미국 '제일침례교회'를 다니는 개신교신자였다.
*선택지가 화학, 물리학, 생물학, 그리고 식품과학이었는데, 패기도 도전 정신이 없었던 나는 안전빵을 선택했다. 돌아보면 물리학을 고르지 않은 게 아쉽다.
미국 영화에서 나오는 예쁜 잔디밭과 차가 들어오는 길에 있는 농구골대.
건너편엔 농구팀 코치의 가족이 살고 있었다.
이 선생님은 나중에, 내가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주최하는 단체에 참가비를 냈고, 자신들에겐 그런 돈이 전혀 지원되지 않음을 알고 부당함을 느꼈는지, 다른 지낼 곳을 알아보라고 했다. 마침 아들이 미국의 길고 긴 크리스마스 방학을 앞두고 있을 무렵, 그렇게 나는 같은 농구부 소속 브라질 이민자 친구들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세번째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남은 6개월을 보냈다.
그 집의 어머니는 브라질에서 이혼 후,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고, house-cleaning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계셨다. 그런 경제적 상황에서도 두 아들들이 서로 협의해서 방 하나를 나에게 비워주고 둘은 이층 침대에서 자기로 자처한 거다.
나를 '거둬준' 두 호스트패밀리를 통해 받은 사랑은 분명히 있었다. 그런 자기희생을 경험하고 그런 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건 축복이었다. 연휴기간이 되면 그 둘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집의 낙엽을 함께 쓴다거나, 어느 자동차 샵의 자동차 부품을 정리하는 일을 했다. 그렇게 700달러를 비상금으로 들고 미국에 왔었는데 900달러를 가지고 귀국하게 되는 이상한 현상도 있었다.
지금 보면 교환학생으로 가서 여행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고등학생이라 어려서였는지, 그런 가정형편의 학생들과 살면서 여행이 사치라서 기회가 없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에서도 방학에 여행가는 문화가 없었던 가정에서 자랐고, 여행에 대한 의지가 없었기에 그런 걸 다른 친구들과 추진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도 있다. 지금 돌아보면 ... 비행기값이 아깝네.
내가 겪은 미국 텍사스의 친구들은 굉장히 너그럽고 따뜻했다. 걸핏하면 안아주려 했고, 어깨동무를 했다. 동방예의지국의 양반정신을 가진 아버지 밑에 자라 공산/사회주의국가를 거쳐 자본주의 국가의 상징적인 미국에 왔으니, 그 온도차란...
(중국에서도 친했던 한국인 친구가 새벽에 농구하고 돌아가는 길에 어깨동무를 하면 키가 작은 그 친구는 어깨동무가 되지 않아, 허리에 손을 얹고는 했는데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
처음엔 그게 너무 어색했지만, 한 계절을 함께 하고 나니, 그게 너무 좋았다.
(TV유치원 '뽀뽀뽀' 멜로디로)
만나면 반갑다고 hug hug hug
헤어질 땐 아쉬워서 hug hug hug
시험성적이 잘 나오면 hug hug hug
슬픈 일이 있을 때도 hug hug hug
(노래 끝)
다른 친구들끼리 hug 하고 있으면 그냥 얹혀서 '나도, 나도, 끼워줘' 하며 멋모르고 Group Hug에 동참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
당시엔 고작 컴퓨터를 키면 냅스터 (한국의 '소리바다') 같은 서비스를 통해 TV에서 들은 음악의 MP3를 받는 게 고작이어서 학술자료 같은 걸 검색해본 적도, 신문기사를 찾아읽지도 않았다. 어른이 되서 알고 보니 '허그'와 '정신건강'에 대한 연구도 꽤 많이 있었다.
단순하게 요약하면 그런 신체접촉이 옥시톡신의 생성을 촉진하는데 그게 좋다는 거다.
그건 부부를 대상으로 이뤄진 실험*에도 드러난다.
참고자료) Influence of a "warm touch" support enhancement intervention among married couples on ambulatory blood pressure, oxytocin, alpha amylase, and cortisol - https://pubmed.ncbi.nlm.nih.gov/18842740/
비단 '포옹' 뿐만이 아니다.
포괄적으로 '신체접촉'은 인간의 생명유지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할 때 언급되는 (비인도적인) 실험이 역사 속에 있다.
FREDERICK'S EXPERIMENT
13세기 독일의 역사 속에 이런 실험이 이뤄진 적이 있다. '프레드릭 실험(FREDRICK's Experiment)로 알려진 프레드릭 2세는 언어습득에 대한 "과학적" 호기심으로 아이들이 사람의 언어를 듣지 않고 자라면 무슨 언어를 사용하게 될지 실험을 한다.
영아들은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간호사들이 관리하는 환경으로 옮겨져 관리되었다.
두 가지 규칙이 있었다.
첫째, 간호사들은 아이들에게 말을 하면 안된다는 규칙. 두번째 규칙은 아이들을 만지면 안된다는 거였다.
실험결과, 아이들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말을 할 나이까지 자라지 못하고 죽었다.
영아들은 만져지지 않으면 죽었다.
HUG를 통해 치유 받은 나......?
난 그렇게 나와 다른 인종의 사람들의 따뜻함에 '만져져서' 다시 살아난 걸 지도 모른다.
(중국으로 돌아와 다시 한국생활을 할 때, 그 따뜻함이 결여된 문화 속에서 한동안 그걸 굉장히 그리워했다. )
이 신체접촉과 관련하여 알게 된 충격적인 실험은 위 '프레드릭 실험' 뿐만 아니다.
육아를 하게 되면서 알게 된 애착이론과 맞닿는 부분이다.
트라우마 전문가 가보 마테의 강연과 책에서 얼핏 드러났던 부분이다.
(참고자료) Gabor Mate: The Childhood Lie That's Ruining All of Our Lives
https://youtu.be/uPup-1pDepY?si=5rWwC63KfO2ZxFsG
독일 나치정권에서는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정서적 필요 (emotional needs)를 무시하도록 권유했다. 그게 강인하고 복종하는 군인을 양성할 거라는 생각에서 였다.
당시 중용된 의사 Johanna Haarer는 소아과 전문의가 아니었던 폐질환 의사였다. 하지만 나치로 인해 육아전문가로 사회에 알려진다. 이 의사의 책 <The German Mothers and Her First Children> 는 '제국의 어머니의 훈련프로그램'으로 사용되고, 1934년에 쓰여진 이 책은 1943년까지 최소 300만명의 독일여성들이 교육을 이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게 지금의 독일의 노년층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참고자료)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harsh-nazi-parenting-guidelines-may-still-affect-german-children-of-today1/
이런 추세가 있었던 것은 독일 뿐만 아니다.
미국에서도 1910년에서 시작되어 1930년대에 의사와 심리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안아주거나 뽀뽀해주는 것을 지양하라는 조언을 했다. 그런 행동이 아이들이 유약하고 의존적으로 자랄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참고자료) https://www.popsci.com/1950s-experiments-attachment-unethical/
육아공부를 하던 아빠로서도 종종 듣던 '아기가 손 탄다며 안아주지 말라' 고 떠오른다.
나는 '신체접촉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기도 때문에, 아이를 안아주고 싶은 부모의 본능이 틀린 게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새겨듣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행동주의적 접근은 하버드 대학 심리학자 B.F 스키너에서 시작되었다.
(이번에 그가 자유의지가 착각이라고 믿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정환경에 적용을 하니, 부모로부터 강제적 분리가 아이들이 미래에 독립적인 성인이 될 것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론이었다. 부모는 사회구조를 제공하고 필수적인 음식만 제공하면 되는 모델이다.
다행히 1940년 후 2차대전이 끝난 후, 의사들이 이 추세에 대한 '반격을 개시 했다.
대표주자는 벤자민 스팍(Benjammin Spock)박사.
1946년 <Baby and Child Care>을 통해, 그는 행동주의 이론을 반박하며 아이들은 신체적 애정표현을 포함한 케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후발주자는 독일의 정신의학과 의사이자 발달 심리학자존 보울비(John bowlby).
장기병원입원부터 고아원의 어린이들에 이르러 '시설에서 자라는 것'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로 명성을 얻은 이 분도 이 흐름에 동참한다.
그는 1951년에 WHO에 이런 보고서를 전달한다.
"부모로부터의 박탈(분리)는 극심한 불안, 사랑에 대한 과도한 욕구, 강한 복수심, 죄책감과 우울증을 가져온다"
(참고자료)Maternal care and mental health: a report prepared on behalf of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as a contribution to the United Nations programme for the welfare of homeless children
https://iris.who.int/handle/10665/40724
그런데 신체접촉의 결여가 어린아이와 부모 사이에서만 문제를 야기할까?
나는 과도한 단순화와 사례별 특수성을 구분하지 않고 적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치유의 효과'와 아이를 키우며 적용하고 있는 이 이론이 겹쳐지며 또 다른 공명이 생기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우울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날 따뜻하게 안아줄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 개인(?)에게 적용하자니, 쉽다면 너무나 쉽고 어렵다면 너무나 어려운 부분이란 건 알겠다.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이나 그에 준하는 신체거리를 중시하는 유럽의 특정국가들에서 우울증이 더 많이 발생하는 건 아닐까? 어설픈 가설이라 통계자료를 찾아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억지로 우기면 만들 수 있는 가설로 사용해볼 수 도 있을까? 반박당하기 너무 쉬운 주장이 될 것 같다. 북유럽은 날씨의 영향도 있고, 일본은 폐쇄적인 사회가 있고, 독일과 영국은 서로 다른 이유로 신체접촉에 대한 경계가 다르니 말이다.
하지만 부부의 경우, 가족의 경우 다르다.
충분히 큰 위험 부담없이 적용해도 좋을 거다.
꼴보기 싫어도 안아주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어디 문 밖에만 나갈 때도, 밖에 나간 사이에 창 밖으로 떨어진 화분에 맞아 생애를 마감할 가능성, 운전 중에 사고를 당할 가능성을 억지로 떠올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0이 아님을 기억하며 ... 아이를, 아내를, 남편을 안아줘 보는 거다.
너무 단순한 제안이지만, 적용에 난이도가 높은 건 각 개인별로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나이키 광고문구는 이럴 때 유용하다.
JUST DO IT
JUST HUG HIM/HER
(그냥 안아주세요)
다른 글에서 언급한 사례이지만, 임신초기부터 아이가 3살이 된 지금까지 주 4일 외지 출장을 가는 남편이 있는 지인이 있다.
당시 그녀는 우리 부부에게 그런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알게 된 그녀가 겪고 있는 문제들.
2022년, 그 지인은 남편과 싸우던 중, 산후우울증이 아니냐는 말에 쉽게 폭발하는 화, 다스리지 못하는 말 등을 '증상'으로 병원에 갔고, 병원에서 의사는 처방전을 줬다고 한다.
난 처음으로 우울증 약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그 부작용을 찾아보고 경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의사선생님이 있을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 설명해줬는지 물어보니 아니란다.
(이래도 되는 건가...?)
이 글을 통해 부작용을 나눠본다.
이건 정말 먹을만한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고려하지 않는 게 더 건강할 것 같다.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해서 생각해봤다.
우울해서 약을 먹었는데, 악몽에 불면증이 온다.
잠을 못 자는데 식욕부진이 오니, 밥도 잘 안 먹는다.
먹었는데 위통에 복통, 변비도?
영향불균형이 이어지겠지.
머리도 아프다.
가끔 숨 쉬기도 곤란한 것 같다.
여기 저기 아프다.
무기력하다.
중간에 병원에 가서 이런 증상들을 얘기하면 또 거기에 맞는 다른 약을 주고, 그런 약에도 다른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이 약은 정말 우울한 내 지인을 구해줄 수 있는 약이었을까?
엄청 가까운 사람도 아니고 내가 의료진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약을 먹지말라고 조언할 수 없었다.
다만 부작용을 알려주는 최소한의 소임을 다했을 뿐이다.
다행히 지인은 자신이 겪고 있는 부작용이라며 불면증과 악몽 등을 이야기 하며 복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난 불면증에 좋다며 반신욕을 추천했고, 한 번도 반신욕을 해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그녀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는 얘기도 들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녀는 남편과 교회 목사님과 부부상담(?)을 하고, 남편과 사이가 많이 개선되어가면서 더 좋은 상태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정신과의사는 환자의 삶에 있는 문제를 다 알지 못한다.
환자가 알려주고 싶은 것만 들어야 하는 심리치료사도 마찬가지다.
환경적, 사회적 요인에 대해 해결해 줄 수 없다.
(위 언급한 심리치료학자들의 토론에서 언급된 것처럼)
다친 마음을 찍는 엑스레이가 없는 만큼 환자의 표현에 전적으로 기대야 한다. 개개인별 언어표현능력에 기대야 하는 상황도 많을 거다. 혈액검사나 뇌파 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다행이다. 설문조사지 형태의 검사지를 환자의 주관을 통해 진행하고, 정신과의사는 환자가 진실한 사람인지 바로 알아내기 어렵다.
혼자 하기 어려운 육아를 혼자 해야 했으니 우울했고, 그런 남편이 미워지니 남편이 집에 올 때마다 쌓아둔 화를 표출한다. 화를 내는 아내에게 살갑게 고개를 숙이며 꽃을 내밀 수 있는 건 작가명에 '천재'를 붙일 정도의 내공이 있는 남편이어야 할 수 있는 건데, 그녀의 남편은 모태솔로였다.
주4일 출장을 가는데, 애가 한 살도 안된 육아기의 아빠가 주말에 친구와 낚시를 간다고 할 정도이니 어느 정도 센스가 부족한지 감이 오지 않는가.
아내 입장에서 미운 사람을 안아주고 싶을리도 없고, 남자도 자기에게 싫은 소리만 해대는 여자는 아무리 예뻐도 다가가기 싫을 거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손을 대지 않고 출산 후 부터 아이가 만 2살이 될 때까지 싸우며 살아왔던 거다.
(가끔 미혼 남성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네가 아이유랑 사귀게 되어도 아이유가 너한테 매일 잔소리, 비난, 폄하하면 안 예뻐보일 껄?' )
삶 속에 상황적 문제가 있었고, 그 상황을 해결하는 것 대신 약으로 기분을 좋게하는 선택을 할 옵션이 있었던 거다.
(물론 이 해결법엔 '행복'은 '세로토닌'이라는 환원주의적 사고가 숨어있다. )
우리 부부와 비교해보자.
난 좀 극단적으로 아내를 케어했다.
아내는 출산과 겹쳐 코로나19를 맞이했고,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은 우리에게 모자동실의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장모님은 한국에 오지 못했고, 우리가 갈 수도 없었다. 아내에겐 나 뿐이었다.
나를 믿고 한국에서의 삶을 선택했고, 모국에서의 일하던 대학교에도 퇴직서를 제출했다. 아무리 나를 알기 전에 내 부모님을 먼저 알고 4, 5년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해도, 자국 언어습관을 적용해서 시부모님을 '아빠, 엄마'로 호칭 해도, 아직까진 '내 가족'만 하지 못할 거다.
새로 태어난 아이도 중요했지만, 아내가 우선이었다.
아내를 우선으로 하다보니 아이를 더 많이 돌보게 된거다.
그래서 아이와 더 유대감이 쌓이게 되었고, 그게 아이가 아빠를 많이 좋아하게 한 부분도 있을 거다.
아이가 아빠를 좋아하니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육아 분담 과정 중, 산후조리원을 가지 않았음에도 산모의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었던 상황으로 이어졌다.
공부하다 알게된 (지금은 그 유효성을 반박하는 연구결과도 있는 것 같지만) 오메가3가 산후우울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적용하여 그냥 영양보충인 것처럼 '꼬드겨' 오메가3 캡슐도 챙겨서 먹게했다.
가격대비 면적이나 새 집, 예쁜 집을 찾기 보다, 회사 근방에 가격대가 맞는 집을 찾아 신생아와 외국인 아내를 반경 700m 안에 두고 문제가 있을 때 마다 나타났다. 아이들의 모든 예방접종 때, 내가 안고 있었다. 본가가 2km 거리에 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아내는 세 번의 출산을 겪으며 산후우울증이 없었다.
아니, 부부사이의 문제로 티격태격한 날 굳이 검사를 받았으면 우울증으로 판명됐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검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진단명이 없었다. '남편과 싸운 우울한 날'이 있었던 거고, 남편이 잘해준 날은 기분 좋은 날로 돌아설 수 있었던 거다.
부부 사이가 안 좋으면 기분이 안 좋은 게 당연하다.
매일 싸우고 그게 1년 내내 이어지면 그 관계가 문제가 있는 거지, 그 관계 속에서 내가 느끼는 정서(우울 혹은 무기력)가 병이 아닌 거라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
물론 산모에게 생화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미치는 영향도 있고, 심지어 한국의 산후관리체계에서는 산모를 위한다며 출산 후 초기에 영아와 엄마를 분리시켜 '케어'하는 문화도 있다.
산후 아이와 엄마의 신체접촉이 '옥시톡신', '도파민' 시스템에 작용*하는데, 그 둘을 분리시켜 놓으니 나중에 'SSRI (세로토닌 재흡수제)'를 먹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참고자료) The Role of Affectionate Caregiver Touch in Early Neurodevelopment and Parent–Infant Interactional Synchrony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7873991/
위 사례의 지인은 아이를 육아가 힘들어서 최대한 빨리 어린이집에 보냈다.
아이와 있을 때, 아이가 우는 게 듣기 싫으니 늘 핸드폰을 쥐어주고 '아기상어' 영상을 보여줬다.
(난 아기상어 노래를 제법 싫어한다)
남의 육아방법에 간섭하는 건 실례이다.
개인의 정신건강을 더 우선시 하는 한 성인의 선택은 존중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댓가가 따르기도 한다.
경험상, 주로 '지금 편하고자 하는 선택'은 나중에 고생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예인 쪽쪽이가 그렇다. 물려주는 동안 잠잠해지고, 쪽쪽이가 빠지면 울고, 쪽쪽이 떼는 시기를 놓치면 치아발달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식사 시간에 우는 걸 자주 봤는데, 그건 핸드폰을 뺐을 때였다. 결국 핸드폰을 보며 밥을 먹는 만 한살 반, 만 두살의 그 아이를 봐았다. 언어발달이 또래에 비해 많이 늦기도 했다. (요즘은 다행히 말을 조금씩 하기 시작해서 걱정이 줄어들고 있다.)
올해 오랜 만에 연락을 하게 된 친구는 실연 중*이었다.
(교정교열가는 어색한 표현이라고 지적하겠지만, 실제로 ING형태였기 때문에 이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는 이별의 원인을 찾느라 열심히 노력 중이었다.
자신의 ADHD 때문에 대화가 산만하고 상대방에게 집중을 못하던 걸 이유로 들었다.
난 유튜브에서 들었던 모 교수의 강연 중 “most people don’t have ADHD“ 라는 내용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던 터라, 10분 정도의 편집된 클립 영상을 전해보았다. 서로 어느 정도의 신뢰관계가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도전이었다.(하지만 내가 겪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진단받은 ‘질병‘을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교수의 이름을 보자마자 "이 사람은 뭣도 아니야" 라며 부정했다.
아무래도 내 친구는 그 교수를 왜곡된 내용에 노출되어 있을 거라 예측하고 더 이상 그 주장을 설명하지 않았다.
자신은 원래 어렸을 때부터 ADHD가 있었을텐데, 조기 발견하지 못하고 어른이 되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난 속으로 스마트폰을 달고 사는 21세기 성인 누가 'ADHD환자'의 특성을 공유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근거없이 반박을 하기도 싫었고, 이미 자신을 자신의 증상과 동일화 하고 있다는 게 보이니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한편 베스트셀러 심리학자이자 구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방문교수, 토론토 대학교 교수였던 B*는 검사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며 다음과 지적한다.
"신경증을 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성격 테스트 NEO PIR은 신경증의 하위 집합으로 자의식(Self-Conciousness)을 포함시킵니다. 즉, 자의식이 강한 것과 우울하고 불안한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해석입니다. 자의식과 우울증이 (그저)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동일한 게 됩니다.
그리고 환자가 치료를 받으러 가면, 얼간이 치료사는 당신이 스스로를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질문들로) 자기를 의식하게 만듭니다."
The personality test used for assessing neuroticism, the most common one the NEO PIR has self-conciousness as a subset of neuroticism. So that means there’s no difference between self-concious and being depressed and anxious. They’re not (just) linked, (but) they’re the same. So now you go to therapy and the halfwit therapist does not thing but make you self-conscious.
위에 언급한 Ethan Watters의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를 주제로한 TVO토론에서 정신과의사가 말했던 바와 겹치는 부분이다.
“선을 어디서 긋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자기를 의식한다는 게 병적인 스펙트럼과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건강한 영역의 구분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어떤 질문들을 통해서 자신을 엄청 의식하게 되면 진단지 상으로 ‘신경증’환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본문 중간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났지만, 지난 수년간 대중화된 심리치료의 효과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심리치료사들간의 토론에서도 넌지시 언급하며 나오는 주제였다.
심리치료의 효과와 효율에 대해서도 심리치료학계 밖에서는 다른 의견이 있지만 우선 외부비판 보다 학계 내부비평을 다시 참고해보자.
효용성을 주장하는 연구와 효과가 적다는 걸 주장하는 연구가 모두 존재한다.
대표적인 두 연구에서는 우울증, 불안, PTSD 등의 광범위한 정신건강 이슈에 대해 메타분석을 한 결과를 인용하며 '증거와 결과'에 바탕한 효율을 주장한다.
(참고자료)연구1: Smith, M. L., & Glass, G. V. (1977) - "Meta-Analysis of Psychotherapy Outcome Studies"
(참고자료)연구2: Wampold, B. E. (2015) - "The Great Psychotherapy Debate: The Evidence for What Makes Psychotherapy Work"
또 서로 다른 치료 방법들을 가지고 상황에 맞는 치료를 제안해서 광범위한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장점으로 주장한다. 또 환자 개인이 심리학적 기술을 발전시켜 스트레스와 인간관계 개선, 개인적 목적 달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심리치료가 유연한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도 효과가 있다는 쪽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참고자료) Hayes, S. C., et al. (2006) -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An Experiential Approach to Behavior Change"
그럼 그 반대는 어떨까.
2007년에 나온 비평은 효용성을 주장하는 증거로 사용되는 것들이 연구방법론 상의 문제와 성과의 가변성을 지적한다.
(참고자료) Lilienfeld, S. O. (2007) - "Psychotherapy Research: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또 심리치료사와 성립되는 관계(친분)로부터 발생하는 플라시보 이펙트, 위약효과가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그리고 단기적으로 보면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그 성과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 반론에 사용된다. (외부에서 심리치료의 효용성에 대해 비판할 때, 단기적 효과에는 동의하는 바인만큼, 일정기간 동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
문제의 유형과 개인차가 크겠지만, 내부 토론에서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은, (미국의 경우) 심리치료사로서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 별도 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외부 비평에서는 환자가 완치되면 인센티브가 사라지는 구조도 외상에 대한 치료와 달리 가시적인 검증이 어려운 심리적 요소에 대해 관리 소홀이 되기 쉽다는 점을 지적했다.
2021년에 A*라는 저널리스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 옥스포드 대학을 거쳐 예일대학교 법학박사 출신 독립 저널리스트다.
그녀의 책은 The Economist의 '2020년의 책 (Books of The Year)'에 포함되기도 한다.
(ADHD를 겪고 있다는 친구의 반응을 보고, 특정 인물에 대한 편견을 예방하고자 문서 최하단에 별도 표기 하려한다.)
지난 15년 간 미국에서 1개 뿐이던 '젠더 클리닉'이 15년간 100개가 되었다. 그리고 근 5년 사이에는 일부 주에서 십대 소녀들이 부모의 동의 없이 남성호르몬을 처방받거나, 화학적 거세에 사용되는 호르몬 약(루프론)을 부작용에 대한 주지 없이 사춘기 성징을 억제해주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 중 일부는 유방절제수술 등을 거쳐 트렌스젠더가 되기도 하는데 이게 전대미문의 사회현상으로 십대소녀들 사이에서 퍼져가고 있는 현상을 주목하고 조사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책을 통해 아이들이 학교와 시설에서 받는 심리치료와 SNS가 이 현상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 책에는 그런 '성전환' 후 후회하는 이들의 내용이 담겨있다. 현재 미국의 정당이 충돌하는 이슈 중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경고와 함께.
물론, 심리학회 측에선 이 책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쏟아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심리치료사는 정신과 의사와 달리 ‘치료의 부작용’을 추적하거나 관리해야 하는 의무가 없다고 한다.
게다가 미국의 경우, 일부 주state에서는 수년전부터 ‘affirming care’라는 ’예방적 치료‘라는 개념을 적용했다.
예를 들어 유치원생 남자아이가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해서 진단을 받으러 왔다면, 심리치료사는 법적으로 그 아이의 주장을 인정해주고 긍정해줘야 한다. (주에 따라 다른 부분도 있다)
과거에는 부작용이 있는 성호르몬 치료나 유방절제술 (자신이 남자라고 믿는 여아/청소년의 경우) 를 받는 걸 결정하는 대신 ‘wait out/기다리기’ 가장 보편적인 선택지였다. Gender Dysphorira는 대부분(70-80%) 사춘기가 지나간 후에는 사라진다고 한다. (자신의 생물학적 성을 받아드리지 않는 일부의 경우, 트렌스젠더가 아니라 동성애자라고 선언하는 경우로 이어진다고 한다.)
미국의 일부 주와 캐나다의 경우, 성호르몬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미성년‘환자’가 자신은 ‘non-binary’라고 주장하면 심리치료사나 정신의학과의 진단서 없이도 남성호르몬제를 처방받을 수 있다.
만약 심리치료사가 아이의 '성별불쾌감(gender dysphoria)'를 긍정하지 않아 환자나 환자의 부모로부터 민원/항의를 받으면 클리닉/상담소를 폐쇄해야 하는 경우로 이어지질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실제 발생한 사례이다. 차별방지법(anti-discrimination law)의 포괄적 적용으로 ‘형사책임‘을 물어야 할 가능성은 덤이다.
한편, 캘리포니아 주에선 $950이하의 절도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으로 이민간 중국 중학교 동창이 알려줘서 알게 되었다...
기존 디즈니와 헐리우드 콘텐츠를 통해 널리 퍼진 문화 속 철학 위에 법제도 이러니, 심리치료사가 ’Follow Your Heart’라는 가이드라인을 과거에 존재하던 임상데이터를 우선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한편, 이 주제는 미국에서는 현재 정치적으로도 대립하는 주요이슈로 대두되기 때문에 그저 학술적 견해 차이가 아닌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의심도 근거없는 주장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이슈의 이면에는 복잡한 것들이 숨어있으니.
선생님이 학생들의 사회 통념적으로 잘못된 행동의‘교정’이나 비평이 불가능한 학교를 상상해보자.
학생이 수업시간에 책을 찢으며 던져도 그 아이와의 면담과정에서 그 학생의 잘못된 행동을 혼내거나 언급할 수 없고, ‘우쭈쭈’만 해야하는 상황.
미성년의 아이가 (초등학생으로 가정해보자) 방과 후 하루 12시간 핸드폰을 시청하고 새벽 3시에 잔다. 그런데 부모가 잠든 사이 시청하는 콘텐츠 중에는 폭력적인 요소를 수반한 수위 높은 음란물이 포함된다고 해보자.
그런 콘텐츠의 영향으로 모든 성행위가 폭력적이라거나, 남성이나 여성에 대해 왜곡된 성관념이 생길 수 있다는 가정이나, 그게 자신이 성인이 되면 이런 남성/여성이 된다는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런 행동을 교정하고 싶은 부모와의 핸드폰을 뺏기고 싶지 않은 아이 사이에는 당연히 갈등이 발생할 것이고, 이걸 문제삼아, 결국 제3자의 개입을 결정하여 아동심리치료사를 만나게 되는 시나리오이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우울증이나 기타 ‘질환’을 의심받아 심리치료사를 만나는 청소년들이 겪는 면담의 프로토콜이 부모와의 관계를 묻고 바로 다음이 ‘젠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만족도에 대한 질문이 두 번째라는 인터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잘못된 행동을 교정해야 하고 싶어 인지행동치료를 기대하고 아이들을 클리닉에 데려갔다고 치자.
그런데 아이들을 '긍정affirm' 해야 하는 '의무 아닌 의무'가 있는 심리치료사들은 아이가 부모가 과도한 통제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 그걸 긍정해야 한다. 그 다음엔 그 행동의 원인이 ‘출생시 병원에서 정해준 성에 대한 불만족’으로 삶 전반적으로 불만이 생겨 ‘자아 실현’이 되지 않아서 (혹은 성정체성의 혼란으로) 이런 문제행동이 야기 됐다는 시나리오를 따라야 하는 거다.
그렇다면, 이 일련의 ‘치료 과정’ 중, 자신의 문제의 근원을 ‘자기의 정체성을 몰라주는 부모’를 첫번째 원인으로 하고, 두번째 원인으로 '자신의 진정한 성(gender)에 반대 되는 '생물학적 성별(sex)'을 '입고 있어 억압바고 있는 자신의 진정한 성정체성‘이라는 가설이자 결론을 내기 쉬운 상황이 된다.
무엇보다 심리치료사들은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성정체성에 의문을 갖으면 그걸 인정해줘야 한다는 법제적 의무가 존재하는 상황이다.
심리치료사들이 100년 간의 연구결과를 근거로 다음의 위로(?)를 해 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Hey, Kid. You’ll grow out of it
얘야, 어른이 되면 괜찮아질 거야
생업유지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엔 의료체계가 중앙관리가 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가 없고, 유사한 문화 흐름이 존재하는 영국의 경우, 4000%의 성전환 “ㅇㅇㅇ”의 증가가 있었고, 이 대부분은 10대 소녀였다는 통계*도 있다.
(참고자료)Written evidence submitted by Transgender Trend (MISS0046)
https://committees.parliament.uk/writtenevidence/7947/html/
이런 흐름에 우려를 표하는 것은 일부(소수) 의료인들과 정치적으로 분류하면 보수파에 속하는 이들이다. 주류 언론은 대부분 ‘진보’성향을 띄기 때문에 이런 우려에 대해 ‘우파의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경향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난 글의 공산주의에 대한 조사 경험으로 보면 그 역시 '음모론이라는 역정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뉴스와 SNS속에서 살아가는 시대의 우리들.
개인이 아니라 사회단위에서 미치는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전철 자살율을
당시 보도지침은 이렇게 내려왔다고 한다.
- 가능하다면 자살에 대해서 보도하지 않음.(보도해야 한다면 자살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 것)
- 헤드라인에는 자살이란 단어를 노출시키지 않음.
- 자살의 상세한 방법을 묘사하지 않을 것
- 보도 방향은 자살의 해결방안으로 잡아야 하고 자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 것
그 결과 6개월만에 80% 감소*했다고 한다.
(참고자료)(1) "Preventing Suicide by Influencing Mass-media Reporting. The Viennese Experience 1980–1996" by Etzersdorfer, E., Voracek, M., & Sonneck, G.
(2) "Effect of media reporting on suicide: Integrative review of the evidence" by Pirkis, J., & Blood, R. W.
(3) "Role of media reports in completed and prevented suicide: Werther v. Papageno effects" by Niederkrotenthaler, T., et al.
우울증에 대한 보도는 어떨까?
빈부격차나 학급내 따돌림은 어떨까?
부동산 관련 기사를 비롯해서 언론기사들를 통해 보도되는 '신조어'.
정말 현장에서 사람들이 쓰는 단어를 보도 한 건지, 보도부에서 단어를 만들어 내는 건지 그 기발함에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그 신조어들을 별 생각없이 유행어로 쓰는 사람들.
벼락거지, 금수저, 흙수저 등 경각심을 일으키기보다 사람들에게 널리 그 개념을 알리게 되고, 보편화 시킨 건아닐까?
미국의 청소년들의 ‘연약해진 정신’에 대한 비평을 하며 ‘정신치료’가 교육체계 및 사회시스템 전반에 퍼져나간 걸 주요 이유로 하는 심리학자* 및 저널리스트* 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이 한 세대를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 목적을 가지고 행동수정기법으로 전략을 짜야한다면, 지금 미국 교육계가 받아드린 것들을 시행한 것과 같을 거라고.
조나단 하이트 (Jonathan Haidt): 미국 사회심리학자, New York University Stern School of Business의 석좌 교수이다.
그렉 루키아노프 (Greg Lukianoff): 미국 변호사이자 저널리스트이다.
두 사람은 <The Coddling of the American Mind>라는 책을 함께 썼다.
미국 사회가 받아드린 ‘위대한 비非진실(the Great Untruth)’가 세 가지 있다.
- 안 좋은 경험을 모두 피하게 한다.
- 이성보다 감정을 신뢰하게 한다.
- 세상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이분화된 것으로 이해하게 한다.
- 그 위에 심리치료를 통해 의존성을 키우고,
- 나르시즘/자기애를 키운다.
이 주제에 대해 여러 저널리스트에게 의뢰했지만, 현 사회트렌드에 반하는 것이라 잘못하면 사회적 매장을 당할 것을 두려워 해서 아무도 나서지 않아 자기가 나섰던 저널리스트 A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 학교에서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들은 ‘Social-Emotional Learning (사회적- 정서적 학습)’으로 가이드 하고, 감정 ‘체크-인’을 합니다.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How are you feeling?
지금/요즘 기분 어떠니?
이건 아이들에게 우울증과 불안을 유발하게 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교사들이 계속 물어보죠.
안타깝게도 부모들은 아이들을 이런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그렇게 하죠.
부모들도 (아이들의 감정을) 계속 확인 합니다.
양육의 주도권을 되찾는 대신 심리치료사들이 육아/양육을 가이드하게 합니다.
-저널리스트 A*-
한국은 너무 무심했던 편이라 공감이 안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미국의 트렌드는 헐리우드나 디즈니를 통해 우리나라로 넘어오는 경향이 있다.
미국유학파 교수들이 많은 것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신과 의사와 심리치료사의 차이는 약물처방 가능 여부에 있다.
약물에 대한 부작용은 임상실험을 통해 드러나고 관련 규제에 의해 표기해야하는 의무가 생기기도 한다.
물론 의사나 약사가 처방시 강조를 해주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참 고마운 상비약인 해열제 '타이레놀'(아세트아미노펜)도 부작용이 있다.
그러면 심리 치료는 어떨까?
개인적인 경험에서 돌아보면 약물에 대한 의존만큼 상담자에 대한 의존도 경험한 바 있다.
직장인이 된 내게 종종 연애상담을 했던 친구가 있다.
지난 글들에서 충분히 드러났겠지만 난 연애의 대가도 전문가도 아니다. 최종 면접 당시 단점이 뭐냐는 질문에 ’연애를 잘 못합니다’란 대답으로 면접장소를 웃음으로 채웠던 이력이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질문 받은 상황에 분석적으로 장점, 단점, 위기, 기회 등 회사에서 배워 온 SWOT 분석부터 여러 가지 모델을 적용해서 선택에 참고가 될 만한 분석과 선택지를 제공했다. 내가 추천하는 방향은 없었다. ‘네 삶이니깐, 네가 선택해’ 는 기본.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가다보니 그 친구는 내게 ‘사고의 외주outsource’를 하는 것 같았다.
의존성이라고 할까.
항정신성 약물치료에서 어쩌면 가장 드러나지 않는 부작용이 의존성일지도 모른다.
의존성을 포착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라든가, 환자가 스스로 그걸 인지하기 어렵고 (자기합리화가 있을테니), 그 의존성을 의사가 추적해서 관리하는게 용이 하다고 하기 어려운 것 같다.
연구1
2017년 스톡홀롬 대학의 연구에 대한 요약을 인용하여 답을 해본다.
우울과 불안으로 고통 받는 (일부)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자/심리치료사를 만나는 것으로 도움을 받지만, (다른 일부) 그 외 사람들은 증상이 완화되지 않거나 더 악화된다. 심리학적 치료도 어느 약물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효과를 끼칠 수 있다.
(참고자료) Ground-breaking research on the side effects of therapy
https://www.sciencedaily.com/releases/2017/02/170207092804.htm
연구2
2018년 Charité 베를린의 의대* 에서 심신재활(Psychosomatic Rehabiliation) 연구 그룹의 발표자료는 이렇게 주장한다.
43%의 CBT(인지행동치료)의 환자들이 ’제대로 진행된 치료에 대한 부정적 반응으로서 부작용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Psychosomatic Rehabilitation Research Group at Charité University Medicine Berlin-
연구자들은 오래 전부터 심리치료가 긍정적인 결과가 있는 만큼 부정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리치료의 부작용 발생율을 5%에서 20% 사이이다. 증상의 악화는 약 3~10%의 환자들 가운데 발생했다.
심리적 고통과 결혼/가족 갈등은 치료의 두 가지 일반적인 부작용이다. 다른 류에는 새로운 증상의 출현, 자살 충동, 낙인, 환자의 사회적 관계의 긴장이나 변화가 포함된다.
(참고자료) https://www.madinamerica.com/2018/08/new-study-investigates-negative-side-effects-therapy/
좀 더 수치가 두드러지는 연구도 있다.
연구3
2024년 ‘사이코다이나믹, 인지행동치료의 부작용’이란 제목의 연구가 게재된다.
샘플수가 적긴하지만, 61.4%에 해당하는 170명의 환자에게서 468개의 ‘원치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치료)사례 중 33.2%가 적어도 한 개의 부작용을 보였다. 가장 흔한 부작용은 ‘가족 관계 내 긴장‘
- Journal of Contemporary Psychotherapy: On the Cutting Edge of Modern Developments in Psychotherapy. -
참고자료: Side effects in psychodynamic and cognitive behavior therapy
https://psycnet.apa.org/record/2024-44009-001
앞서 언급한 The Great Psychology Debate이란 제목의 심리치료학회 토론(2014년)에서도 부작용을 인지하는 이들의 의견이 오갔다.
그 때 (심장) “우회수술”도 부작용이 있다며 모든 치료에 수반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비침습, 칼을 대지 않는 ‘대화 위주의 치료’가 흉부를 절개해서 갈비뼈를 벌려 놓고 하는 수술과 동일시 하는 게 합리적인지 고민이 되는 대목이었다.
물론 영어로 마음mind을 이야기 할 때, heart라는 단어를 사용하긴 하니, 그게 자연스러운 걸까.
(이건 문학적 상상력으로 연관짓고 있는 거다)
Heart심장을 ’열고‘ 하는 수술과
Heart마음을 열고 하는 대화(치료).
그렇게 비교할 거면, 부작용을 강조하고 싶은 사람들이 심장수술만큼이나 조심해야 하는 비슷한 리스크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물론 다소 억지겠지만.
내가 경험한 상식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인 부작용인 ’의존성‘은 꽤 쉽게 설명 가능하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상대방의 의견을 구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거겠다. 그래서 많은 사안에 대해 스스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 대신, ’사고의 외주화‘는 물론, ’의사결정권‘을 양도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을 거다.
외부에서 얼핏보면, 정상적인 정신건강을 가진 사람이 타인의 의견을 구하는 것과 비슷해보이지만 치료 중인 환자에게 심리치료사는 권위를 갖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심리치료사의 말은 ’참고해야 되는 의견이나 조언‘이 아니라 ’행동지침‘으로 받아드려질 가능성이 아주 높을 거다.
원래 자아가 ’약하거나‘, 자신감이 없거나, 확고한 자기철학이 없거나, 자신감이 없거나, 귀가 얇거나, 분석적 사고력이 뛰어나지 않거나, 깊이 고민하는 걸 힘들어 하거나, 어떤 사안에 대해 능동적으로 고민할 의지가 없거나 (무기력) ……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왠지 심리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증상이 되고, 결국 다수의 환자들이 겪을 수 있는 문제가 된다.
환자가 어리면 어릴수록 이런 현상을 두드러질 거다.
어른들은 치료 과정 중에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너무 가신 것 같은데요? / 확대해석에 가깝네요..‘ 라며 반박을 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어른, 특히 '의사'(격)의 사람에게 그런 반박을 하는 게 더 어려울테니.
이건 연구 결과가 아니라 내 추론이다.
그런데 알려진 부작용에서 ’증상의 악화‘과 ’가족관계 악화‘가 보편적이라고 했다.
증상의 악화에 대해서는 ’원래 악화되고 있던 걸 치료를 통해 호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반론을 펴볼 수 있겠지만, 그건 결국 치료의 무용성을 드러내는 게 되니, 굳이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뜬금없이 ’가족관계 악화‘는 왜 튀어나온 걸까?
왜 가족관계 악화가 심리치료의 흔한 부작용일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접한 고정관념을 대입시켜보자.
심리치료사와 환자가 대화를 나누고 주로 과거의 사건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트라우마로 규정하고 그 사건의 주인공들 속에서 환자를 ’피해자‘로 상처를 제공한 사람을 ’가해자‘로 구분하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개인적으로 심리치료를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관찰결과는 아닌만큼,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온 장면의 한계가 있을 것 같다. (고증을 잘한 창작물을 본 거라면 또 다르겠지만)
그런데 실제 치료를 심리치료를 경험한 이들이 작성한 글에서도 어렴풋이 그런 양상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어머니/아버지/배우자 때문에 힘드셨겠군요.’
현재의 문제점을 과거에서 찾는 것.
내가 가진 지금의 문제를 과거의 타인으로부터 찾는 것.
심리학적 분석에서 흔히 보이는 패턴이다.
일단 법정재판에서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로 나오면 원고와 피고가 되고, 승소와 패소라는 제한된 결과가 선택지가 된다. 보험사고에서처럼 책임율 몇% 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원고(환자)의 변호사(심리치료사)는 원고를 위해 싸운다.
원고가 피해자인 상황이고 고객이다. 승소에서의 인센티브는 없지만, 소송(치료)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인센티브가 있는 계약관계이다.
일단 ’피해자‘가 되면 단기적으로는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찾은 기분이 찾아올 거다.
’아, 그런 사건을 겪어서 내가 이렇구나‘
문제발생의 이유를 찾은 ‘이성’이 얻을 수 있는 정신적 평화이다.
’ㅇㅇ 때문이구나‘
문제제공자를 찾은 ‘주관적 나’의 고민이 사라졌다.
객관적으로 ‘가해자’는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많은 문제가 그렇듯이 마음이 편해졌다고 해결이 되는 건 아니다.
남의 책임이 되고 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일단 문제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건, 양날의 검이다.
‘내 책임이야’ 라는 무거운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좋다.
하지만 ‘내 책임‘이라면 내가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힐링의 시대’, ‘위로의 시대’에서는 특히 드러나지 않겠지만, 내 책임이어야 해결 가능한 문제들도 있다..
하지만,
타인이 문제제공자가 되고 피해자인 나는 늘 ’반응적‘인 수동적인 존재가 되기 쉽다.
타인의 변화가 내 정신상태의 핵심이 된다는 건 꽤나 위험한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의 변화로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 ’가해자‘를 특정하면서 문제해결의 가능성이 타인에게 넘어가버린 게 될 수 있다.
물론 단순화 시켜서 모든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폭력이 연관된 학대나 학교에서의 따돌림 등의 상황에 대입시키지 않길 바란다. 명백한 피해자 가해자가 구분되는 사례도 존재한다.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고 현재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별도의 문제겠지만.
잠시 다시 내 삶 속의 사례로 넘어가보자.
본의 아니게 주선한 모임에서 국제커플이 탄생한 적이 있다.
그와 그녀로 구분해서 부르겠다.
그는 나와 오래 알고 지낸 동생이고 사회초년생이다,
그녀는 나의 아내와 알게 된지 1년이 안되는 대학원생.
그는 한국어와 영어를 할 줄 알고, 그녀는 중국어, 한국어, 영어를 할 줄 안다.
(가장 먼저 언급된 언어가 모국어이다.)
남자가 한국인이니 한국어로 소통을 하다가 종종 영어로 보충하는 모양으로 연애를 했다.
그 둘은 싸우게 되면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내가 한국어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게 중국어로 들어 진상을 파악한다.
재밌는 건, 같은 사건을 묘사하는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다.
연애 초기였던 만큼 그는 그녀가 요구하는 걸 모두 다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바란 건 그게 아니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그는 자신을 이 연애관계 속의 ’피해자‘라고 규정하는 것 같았다.
여자친구의 걱정어린 조언과 건설적인 제안 모두 통제로 느끼기 시작했고, 그녀는 남자친구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기에게 맞춰줘야 하는데 노력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노력의 부족은 사랑의 부족이라고 생각하는 로맨틱한 그녀였다.
결국 그는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하고 연애종결을 선언했다. 모태솔로 였던 그의 첫 연애였다.
그 상황이 안타까웠다.
(언어)재능기부를 해서 서로의 진심을 ‘번역’해서 전달해줬고, 헤어졌던 그들은 다시 결합했다.
그 둘은 그 고비를 넘기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원래 마음이 안 가던 그의 열렬한 구애에 마음을 조금씩 열던 과정이었고, 그의 프로포즈(구혼)에 응해 대학원 졸업후 해외취업이 되었는데 퇴사하고 한국에 온 상태가 되었다.
자기 입장에서는 남자를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한국에 왔는데, 남편될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남자에게 마음이 가면 갈수록 드러내는 마음의 바람(want/wish)가 많아졌고, 섬세하지 못한 언어를 사용한 소통 속에서 오해가 쌓여갔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고, 무시한다고 까지 생각했다.
두 사람의 연애 속에서 소통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두 사람 사이의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두 사람을 잘 아는 제3자의 입장에서는 사실 두 사람의 문제점은 간단히 요약가능했다.
부족한 언어(외국어)능력에서 발생하는 잦은 오해. 그리고 서로 인지하고 있지 못한 자기애에서 비롯된 자기중심성.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걸 어려워했다.
아무리 설명해줘도 그 때 뿐이었고, 비슷한 상황에서 또 비슷한 충돌이 발생했다.
결국 둘은 실연&파혼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녀도 일종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 '상담 아닌 상담'에서도 어떤 상황에 마주할 때마다 내 의견을 구하는 ’의존성‘이라는 부작용이 포착되었다. 첫째 아이를 재우고 두 사람의 전화나 카톡에 응답하던 수면부족의 시절...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둘 있는 상황.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관계 속, 어느 한쪽만 문제를 제공하고 있을리가 없다.
다만 내 문제는 작아보이고 상대방의 문제는 커보이는 게 당연한데 그걸 인지하려면 또 요즘은 흔치 않은 덕목인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내가 틀렸을 수 있고, 내가 잘못했을 수 있고, 내가 문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할 수 있는.
물론 예외적인 상황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두 사례를 들자면 아동의 경우와 성폭행 피해자의 경우가 되겠다. (한 사례에서 두 가지가 겹치면 최악이니 그런 사례는 정말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좋겠다.) 이건 명확히 피해자가 잘못해서 발생한 일이 아니다.
위 두 상황을 제외하고 나면 그게 1%이든 10%이든 50%이든 ‘기여도’를 따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부부관계, 연인관계부터 상황에 따라서는 가족 관계나 교우관계에서 발생하는 건 상호작용이 있고, 그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심리치료사는 환자의 ‘편’이다. 대부분 환자가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이 있다면 그게 피해망상의 단계가 아니고서야 그걸 부정하는 쪽의 입장을 취하진 않을 거다.
한국의 사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엔 좀 더 쉬운 원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 잘못, 내 책임이 없는 ‘긍정’치료는 큰 위로가 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굳이 심리치료라는 분야가 아니라 일상생활으로 장르(?)를 바꿔 보면 그 한계가 명확해진다.
자주 찰과상을 입는 아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아이는 장소와 날씨를 고려하지 않고 늘 뛰어다니는 습관이 있다. 비오는 날은 미끄러워서 넘어지고, 바닥이 울퉁불퉁한 지상주차장에서도 넘어진다. 다친 아이에게 약을 발라주는 건, 상처의 감염을 막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부주의하게 달리는 아이의 습관을 고쳐주지 않으면, 아이는 계속 다치기 쉽다.
부부상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위에 언급된 산후우울증 복용을 고민하던 사례에서도 ‘객관적’으로는 분명 배려가 필요한 시기의 아내를 ‘방치’한 남편의 과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고충을 늘 짜증과 분노로 표현하는 대신 유한 언어나 정제된 글로 표현하는 성숙함이 있었다면, 관계 개선이 더 빨리 이루어졌을 지도 모른다.
학자들의 토론에서는 사회적, 관계적 요인 등을 고려하며 이야기 했지만, 문화트렌드에 영향을 받은 최근의 ‘환자’들과 심리치료사들은 많은 경우 환자의 ‘정신적’인 것, 즉 환자 내부의 일로 단순화 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 심리치료를 ’비지니스 모델‘로 분석하면 ‘(그 중에서) 제일 멀쩡한/건강한 환자가 최대한 긴 기간동안 방문을 해야 경제적 인센티브가 있다는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비평도 있었다. (승소할 경우 발생하는 인센티브가 심리치료 중에도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 지 모르겠다.)
상처가 물리적으로 확인가능한 외상과는 달리 ‘환자’와 ‘치료사’의 주관적 견해가 일치해야 ‘완치’판정이 가능한데, 앞서 말했듯이 ‘의존성’이 발생하는 게 부작용 중 하나니 완치가 멀어지기 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심리치료로 발생하는 부작용 중, ’증상의 추가‘ (혹은 없던 증상의 발현)라는 이상한 부작용도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이런 해석이 와닿았다.
끊임 없이 ‘감정’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 수 있다는 비평이다. 가슴 아픈 과거에 대해 반복적으로 질문하는 것만으로도 그 상처의 ‘유효기간’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건, 내 삶을 통해 체특한 것이기도 하다.
‘건강염려증’이라는 한국어로 번역된 단어로는 정확히 전달되지 않아 아쉬운 HyperCondriac이라는 증상이 있다. 의학적 검사로는 드러나지 않는 통증이 있다고 호소하는 환자를 묘사할 때 사용된다. 마이클 조던의 차세대 주자로 주목 받았던 ’페니 하더웨이‘의 무릎통증을 그렇게 해석하던 사람도 많았다.
이 hypercondriac을 연구한 학자의 의견을 빌리면, 일반적인 (혹은 작은) 물리적인 통증에 대해서 과도한 집중을 하면 강도 높은 통증으로 느껴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알게 되었다.
이걸 심리적 상처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상처에 숫자를 대입해서 고통을 표시하는 것에 대해 늘 의문이었지만) 강도 2 정도의 상처인데도 그 상처에 집중시키는 것을 5-9의 강도로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가설이 수립된다.
증명하기 어려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전제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있다.
미국의 경우, 2차 대전 이후, PTSD를 경험한 참전용사들에 대한 지원이 시작되고, 그 다음 단계로 ‘예방적 care’ 가 시행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게 나중에 교육시스템과 사회복지시스템에 퍼져나갔다.
‘심리적 트라우마’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가며 아이들이 성장과정 중에 겪는 여러 가지를 ’트라우마‘로 규정하며, 아이들의 ’정서‘에 막대한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교사상에 근본을 둔 동아시아의 국가에서는 서구사회만큼 극단적이진 않지만) 현실 교육환경에서 지적이나 훈계는 터부시 되는 추세가 있었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이해해주는 게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는 육아철학이 득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배려의 의도가 낳은 부작용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유약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트라우마를 겪지 않게 하는 것이 육아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 온실 속의 화초, 유리 덮개 안의 장미 같은 아이들을 키워냈다는 비평이 있다.
‘기후 불안’, ‘여름 불안 (방학에 친구들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사 불안’ 등 과거 세대에겐 당연한 것들에 ‘불안’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케어’헤주려 한다.(미국 비평을 인용 중이다)
혹시라도 ‘어려움을 겪은 아이들’을 대상으로는 ‘예방적 케어’ 혹은 ‘트라우마 이해기반 돌봄’라는 이름으로 접근한다. 아동과 청소년을 심리치료를 하지 않으면 ’트라우마가 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일상적 어려움‘ (과거 기준)을 극복해야 될 대상으로 본다.
인간이 상처를 받으면 의료적 개입이 없으면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과연 그럴까?
위약효과에 대해 두 학자가 의견을 교환할 때, 그들은 환자가 치료될 것을 ’믿는지‘, 호전을 기대하는 지가 영향을 미쳤다는 말을 했다. 그들의 언어 속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저변에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 외의 다른 ’치료‘가 일어나는 알 수 없는 매커니즘으로 분류하는 것 같았다.
약물이 효과가 있거나, 환자의 '의지' 혹은 '의식'이 영향을 미치거나.
동전에는 앞면 뒷면 만 있는 게 아니라, 옆면도 있다.
세상이 불필요한 이분법을 강요할 때, 적어도 세번째 선택지를 생각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 연재북을 연결하는 핵심개념이다. 작가명을 '동전의 옆면과 빙산의 전부'로 하고 싶었다.
간과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라는 소프트웨어는 육체라는 하드웨어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
그리고 우주와 우리 몸의 신경망의 유사한 점이 있는 것*만큼이나 신기하게도 하드웨어의 특성이 소프트웨어에서 유사점을 보일 때가 있다.
(참고자료) The Quantitative Comparison Between the Neuronal Network and the Cosmic Web
https://www.frontiersin.org/journals/physics/articles/10.3389/fphy.2020.525731/full
우리 몸에 상처가 생기면 그 다음에 일어니는 일은 무엇일까?
혈소판, 백혈구, 진피 재생 복잡한 매커니즘은 생략하고 결론으로 넘어가보자.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살아있는 한, 그게 생명체의 특성이다.
(더 빨리 아무는 나이대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나이대가 있어 속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약이 보편화 되어 ‘약을 발라서 상처가 나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시대가 되었지만, 많은 경우, 약을 바르지 않아도 상처는 아문다.
심리학적으로 그런 ’재생‘은 무엇일까?
최근에 유행하기 시작한 ’resilience’ 회복탄력성이 가장 멋드러진 단어라고 생각된다.
특별히 약을 먹지 않아도 시간이 약이 되기도 하고, 달라진 환경이 상처를 아물게 하기도 한다.
우리의 정신, 우리의 마음에도 회복탄력성이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리적 상처의 종류에 따라 외과적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 있는 것처럼 심리학적 상처에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정신병리학적 진단’의 대중화는 더 큰 문제로 이어지지 않을까?
한편, 프로이트는 심리학의 이름으로 신을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필수적인 존재‘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으로 ’증명‘해냈다는 오해를 널리 퍼뜨렸다. 마치 복잡한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많은 해석 중 한 가지 해석이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 것 같은 오해지만, 인문학계에선 프로이트(1856~1939)가 공산주의의 칼 맑스(1818-1883)와 니체(1844-1900)) 만큼이나가 신에 대한 한 방을 날렸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시대 배경상, 찰스 다윈(1809-1882)의 진화론(1859)이 인간의 ‘발현’을 설명하려는 시도와 엮여 상승효과를 일으켰던 것 같다.
1939년은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지만, 우연히 (1차 세계 대전을 겪은) 프로이트가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칼 맑스와 니체를 통해 ‘신의 죽음’을 겪은 준비한 이 세계는 1차 대전(1914-1918)을 맞이했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이 창조한 고결한 존재’가 아니라 ‘신을 만들어 낸 존재‘이자 ’온갖 명분으로 동족을 대량 살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시대정신'이 스며든 자연과학계에서도 아이작 뉴턴(1643~1727), 마이클 페러데이 (1791-1867), 제임스 맥스웰(1831-1879)이 살아있었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었을 현상이 퍼져갔다. (적어도 redshift의 발견, 허블 망원경, 제임스 웹 천체망원경을 통해 빅뱅이론이 점점 더 그 위치를 확고히 하기 전까지는)
그 추세는 칼 세이건이나 리처드 도킨스가 보편화 시킨 ‘과학자의 철학계 진출의 시대’까지 이어져, 무신론이 이 시대의 ‘디폴트’인 것처럼 서구문화에 퍼져갔다.
그게 심리학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심리치료와 관련해서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천체 망원경을 통해 관측가능한 우주는 점점 더 광활해졌다.
우주는 날이 갈수록 넓어졌고, 빅뱅이론이 이 시사하는 바는 그 우주의 기원에 대한 해석이기도 했지만, 우주의 궁극적 미래에 대한 절망적 예측으로 이어졌다.
이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우연히 시작된 우주에서 우연히 시작된 생명체들이 우연히 진화하게 되어 발생한 ‘지성’을 갖게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 관측력은 점점 발달하여 우주는 해가 갈수록 광활해지니 인간이 우주먼지가 아니라, 지구 자체가 ‘우주먼지’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쉬웠다.
물리적인 크기에서 오는 자각이 존재론적 크기에 영향을 미치게 된 걸까?
깊이 생각해보면 의미와 중요성은 ’크기‘와 반비례하는 경우도 많은데, 표면적인 단순사고를 통해서는 그게 논리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관측을 통해 자신의 ’작음‘을 인지하게 된 인간이 '존재론적 위기감'을 느끼는게 오히려 논리적이라는 오해가 당연시 된 거다.
이 시공간을 비롯한 이 우주의 모든 걸 시작한 초월적 존재 (a.k.a 신)을 믿는 이들은 다르다. 그런 우주의 물리속성 속에서 신의 설계를 보며 ‘미세조정이론’이나 우주의 물리상수들을 통해, 인간이 우연이 아니며, 우주가 인류의 탄생을 위해, 지구가 인류의 생명을 지지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한다.
우주는 이렇게 넓은데, 우리 (인류)는 우연이다.
우주의 먼지들은 우주의 고아들이 되는 것과 동시에 우주의 미아가 되었다.
지구는 '우주 미아들의 고아원'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이 '고아 먼지'들에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삶의 의미를 주관적으로 부여해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세속적 우주론에 기반하여 자기의 가치나 중요성을 입증할 수 없는 우리들은 존재론적으로 미약한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강인한 존재‘가 되려면 일단 우주 단위의 현실부정을 하고, 경제적 성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게 보편화가 된다.
자산이 많으면, 소득이 많으면 자신의 ’가치‘가 증가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일부는 명예나 학업적 성과를 중시하고, 사회적 (혹은 온라인 상의) 영향력을 그 성공의 척도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니, 경쟁사회 속 특정 비율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그 지위에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방향성을 잃고 무기력해질만한 기반이 있게 된 건 아닐까?
이 역시 나의 추측이다. 근거로 내세울 연구결과가 없는.
설상가상으로 지구온난화/기후위기설이 상식이 되어가는 마당에 ’불안‘하지 않으면 오히려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미국에선 '기후불안'으로 '고통 받는' Gen Z들도 많다고 들었다.)
이러니 심리학적 질환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려 하는 이들도 생겨나고, 군중심리와 ’특별해지고 싶은 심리‘가 병존하는 십대 청소년들이 학교 생활 중,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갖고 있는 ’병‘과 동일시 하게 되는 문제도 함께 발생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게 느껴진다.
정상적인 것, 보편적인 것은 특별하지 않다.
심리치료가 보편화 되고, 교육시스템의 한 구석으로 자리잡고 나니,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개성이 없는 것이고, 정신병리학, 임상심리학적의 ‘스펙트럼’이라도 하나 걸쳐야 그게 쿨 한게 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견해도 참고할 만하다.
심지어 (미국) 사회 전반적으로 암암리에 퍼져간 문화적 맑시즘(마르크스) 주의가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세상을 ‘피해자’와 ‘억압자’로 구성된 이분법적 사회로 바라보게 한다.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면 ‘억압자/가해자‘에 속하게 되는 거다.
환자는 피해자이다.
병리학적으로 가시적인 검사가 아닌, 환자의 주관적인 자가진단과 자기 인식을 토대로 심리검사를 마주해야 한다. 심지어 부모의 확신 (혹은 의심)으로 심리치료사와 스케쥴이 잡힌 아이들은 자기가 원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부모가 일종의 ‘자가진단’으로 아이에게 병명을 씌워 환자가 되었다. 그렇게 자기 아이들은 ‘ADHD 환자’나 ‘스펙트럼’으로 부르는 부모도 많아졌다*고 하니 이 역시 증상과 환자를 동일시 하는 문제가 가정 속에서 양육자와 아이에게 모두 존재하는 게 된다.
진퇴양난이다.
한국의 경우, 그게 부모의 성취욕이나 대리만족으로 아이들에게 학업성과 중시가 되고 그게 방향을 잃은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을 향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자기 감정과 자유만 존중하는 법이 강조된 양육 환경.
부모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어린 아이들끼리 살아가는 배경 속의 <뽀로로와 친구들>.
’착한 어린이는 다투지 않아요~‘ 라며 ’친구와 싸우지 않는 게 최고의 선‘인 것처럼 노래하는 뽀로로의 사회교육.
내가 가장 소중하고, 남과 다투면 안된다.
학급내에서 일어나는 따돌림을 마주할 때도.
일부 브런치작가님들이 어렵게 적어낸 그런 따돌림에 대한 글을 읽을 때마다, 그 아픔 속의 환경 속에 나를 대입해보기도 한다.
나야 외국생활 속 여러가지 이유로 ’내가 세상을 왕따‘시키는 입장을 선택하기도 했을 정도로 강해지려 노력한 특이한 사람이기도 하다. 친구가 많은 누군가의 친구가 되는 것보다, 친구가 적은 이의 친구가 되는 걸 선호하기도 했다. 다행히 지능도 근력이나 운동신경을 포함한 신체능력도 나쁘지 않다.
왕따를 겪고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의 친구가 되는 걸 더 의미 있게 생각하고, 그 아이를 지켜줄 수 있었을까. 그랬을 수 있으면 좋았을텐데.
미국의 경우,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강조된 선택의 자유가 아이들을 ’무한한 선택지‘ 속에서 방황하게 하는 것 위에 정치적 흐름 속에서 방향을 잃은 일부 학계 (혹은 대부분의 학계)가 영향을 받아, 아이들이 영구적인 결과를 낳는 선택을 일시적인 혼란이나 충동으로 손쉽게 결정할 수 있게 하는 법제도가 한 몫하니 더 난감하다. 제도적으로 환자의 ’착각‘이나 ’인지오류‘를 지적하기 어려운 구조도 한 몫한다.
한편 ‘신의 죽음’은 상처받은 인간의 회복 속에 중요하다고 하는 한 영역을 간과하게 한다.
그건 나에게 고통을 제공한 자에 대한 용서와 관련된다.
소위 ‘세속적‘ 가치관에서 용서는 선택지에 언급되지 않거나, 용서라는 것 자체를 ’불합리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나에게 일어난 부당한 일들.
그 고통을 제공한 ‘가해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어떻게 보면 ‘정의구현’에 대한 갈망으로 가장한 ‘복수심’이 남아있을 수 있다.
과거의 일에 대해 늘 분노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분노는 가해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초능력’ 대신, 피해자의 심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런 연구결과도 있다.
(참고자료) Anger and health risk behaviors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019061/
과거지사에 대해 분노를 지속적으로 갖고 살아간다면, 현재를 살아가며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를 설명할 때, 이런 예시가 활용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부당한 제약이나 억압을 받으며 자랐던 아이가 성인이 되었다. 그게 식습관, 복장, 종교생활에 대한 강요이건, 취미생활에 대한 금지이건 개인에게 다가올만한 사례를 떠올려보자.
‘난 어렸을 때 부모님이 억지로 채소를 먹으라고 하는 게 싫었어. 그래서 지금은 안 먹어도 되니깐 절대 안 먹어‘
’난 어렸을 때 부모님이 억지로 교회를 가라고 해서 억지로 다녔는데, 그게 너무 싫었어. 그래서 지금은 안가고, 내 아이들도 교회에 안 보내‘
’난 어렸을 때 부모님이 비디오게임을 못하게 해서 너무 싫었어. 지금은 독립해서 원없이 하고 있어‘
’난 어렸을 때 부모님이 염색을 못하게 해서 너무 짜증났어. 그래서 지금은 계절마다 자유롭게 머리색깔을 바꿔‘
…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 부모로부터 자유로이 살고 있는 걸까?
‘독립된 자아’로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부모가 못하게 했던 것, 하지말라고 했던 것을 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다른 관점을 얻을 수 있었다.
과거에 금지 혹은 강요 받은 사항이 ‘객관적’으로 유익한지를 고민한 후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게 아니다. 금기에 대한 반항은 어떻게 보면 아직도 금기에 대한 통제 아래 있는 게 된다.
’과거에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한다‘와 ‘과거에 하라고 강요 받기 때문에 지금 하지 않는다’ 는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이 경우에는 현재를 살고 있는 나의 의사결정이 아직도 과거의 부모의 영향하에 있다는 게 된다.
강요(또는 제안) 받던 방향의 반대로 가는 건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영향력 안에 종속 되는 거다.
반항이 통제에 대한 자유로 보일 수 있지만, 그 결과가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반작용으로 정해진 방향성은 자의적인 방향성이 아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그걸 잊고 살아가는데 나는 아직도 그 상처를 곱씹으며 (경우의 따라, 심리치료의 패러다임/프로토콜에 따라) 그 반작용이 정한 방향으로만 살아가야 할까?
‘과거에 미성숙한’ 부모가 나에게 상처를 준 게 ‘나의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당연하다, 발달과정 중 겪은 모종의 (불행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심지어 가보 마테 박사의 경우, 태아 시절, 1세 미만에 겪은 일들이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되어 세계관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그게 성인이 되어 중독자가 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예전엔 80% 수긍해서 육아 지침에 반영했지만, 지금은 조금씩 회의적으로 검토 중인 의견이다.
하지만 20년, 30년이 지난 지금.
현재에 살아가면서 나의 현재에 대한 원인을 과거로만 규정하면, 바꿀 수 없는 과거에 사로잡히게 될 수 있다. 그게 과거에서 원인을 찾는 방법 속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이다.
그 과거가 사건이건, 인물이건 말이다.
타인을 바꾼다는 건 굉장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데, 적절한 방법과 타이밍, 때로는 초월적 사건이 필요하다
복수심에 불타올라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복수심이 경제적 성공의 에너지로 작용하는 사례도 있지만,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는 어떨까?
그는 그 과정 중에 행복할까, 목표를 달성한 후에는 만족했을까?
유사한 경험을 한 모든 이들이 ‘상처 받은 나’와 같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까?
이게 힌트가 될 수 있다.
인종상으로 백인인 일론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랐다.
그는 학창시절에 입원할 정도의 폭력을 겪기도 했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Apartheid에 대한 반발심으로 백인차별정책 (Black Economic Empowerment BEE)도 존재했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도 책벌레로 놀림 받고,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 (Jack Ma) 역시 그 외모와 학업성적 때문에 불쾌한 학창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내가 아는 유명인들 중 가장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 하나를 고르라면 그건 오프라 윈프리이다. 가난 한 십대에 경험한 친척에 의한 성폭행, 임신 등을 겪어 유명 쇼호스트의 자리에 올라 여러 자선 단체를 설립하고 운영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시설 등에 대한 비평도 존재하지만)
물론 이런 건 가해자들의 자기합리화에 사용되면 안되고, 피해자들의 ‘재건’에 도움이 될 살로서 이야기 하는거다.
앞서 말한 건 용서의 실효성.
실용적 가치이다.
물론 용서에 대한 연구도 존재한다.
(참고자료) https://journals.sagepub.com/doi/10.1111/1467-9280.00320
하지만 용서라는 게 아무리 내게 좋다고 머리로 알고 있어도 그걸 실행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럼 용서의 근원은 뭐가 있을까?
간소화된 불교에 대한 나의 이해를 바탕으로 요약하자면 ’모든 게 허상‘이라는 걸 자각해야 ’자유‘해지는 거다. 내가 겪은 고통도,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나 감정 모두 허상으로 치부해야 하니 더 깊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실재하는 한 인간이 세상 모든 걸 허상으로 바라봐야한다는 건 허무주의와 ’유아론 solipcism 唯我论을 혼합/차용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 현실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개인들이 부정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어려움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희망 역시 허상이며, 득도하고 해탈하여 ’열반‘nirvana에 이르러야 하는 게 ’희망‘이자 자유이다.
힌두교는 어떨까?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전생의 내가 한 ‘기억하지 못하는 업보‘에 의한 거니, 내 고통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듯하다. 이번 생애에 잘하면 다음 생애에 '보다 나은 삶'을 얻을 거라고 믿고 살아가야 한다. 고통스러운 하루는 내가 감내해야 하는 ’내 잘못‘에 의한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듯하니 ‘왜?!’ 라는 질문에 대해 해소를 해준 것 같지만, 현재 (혹은 현생)을 살아가는 이로서, 알 수 없는 ‘전생’ 탓을 하고 살아가자니, 이게 인과관계인지, 검증할 수 없는 영역으로 책임전가를 하는 건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슬람교에서는 조건부 용서를 제시한다. 만약 그 사람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라고.
유대교에서도 용서의 의무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피해자가 용서의 주체가 되어야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피해자가 용서를 해야 신도 용서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홀로코스트의 경우, 피해자들이 죽었기 때문에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럼 기독교는 어떨까.
예일대학교 신학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의견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발칸제도의 내전상황 속에서 형제를 살해당한 과거가 있다.
There are no unforgivable sins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없다.
??!!
그는 미국 사람들의 용서에 대한 관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피해자라면 누구나 (특히 미국인들은), 자신을 가해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는 것을 어려워한다. 하지만 모든 피해자들에게 그게 가장 유익한 일이다.
For any victim, particularly us Americans, it is difficult to see ourselves through the eyes of our offender. But of any victim, it is the most salutary thing to do
-미로슬라브 볼프-
기독교에서 용서는 일종의 ‘의무’이다.
용서의 근거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내가 먼저 용서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면’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타인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다.
내가 피해자이지만 복수의 주체가 될 자격이 없기도 하다.
애당초 ‘원죄’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인데, 내가 뭐라고 네 죄를 나쁘다고 할 자격이 있냐’는 논리도 존재한다.
물론 기독교세계관에선 인류의 죄를 위해 신의 화신/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무고한 죽음으로 그 댓가를 치뤘다고 이야기하는 게 가장 큰 근거가 된다. 신이 죽어야 할 정도로 ‘악한 인류‘의 구성원인 내가 감히 내가 피해자라고 ’잠재적 가해자‘ 용의자 선상에서 나를 배제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팀 켈러는 용서를 이렇게 설명한다.
“용서는 일종의 자발적 고통이다. 복수하는 대신 용서하는 것은 그 댓가를 (대신) 치루겠다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Forgiveness is a form of voluntary suffering. In forgiving, rather than retaliating, you make a choice to bear the cost
- 팀 켈러
Tim Keller-
생각해보니 그렇다.
용서는 손해를 보는 거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거다.
그게 경제적이던 정서적이던.
팀 켈러 박사가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에서 말하는 용서에 대해 알아보니, 기존에 몰랐던 점을 알게 되었다.
뉴욕에서 진행된 '용서에 대한 오픈포럼*' 을 듣다가 Q&A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다.
(오픈 포럼은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참석가능한 형태로 진행된다)
참고자료: Forgiveness: Open Forum
https://podcast.gospelinlife.com/e/forgiveness-an-open-forum/
질문: “만약 남편이 가정폭력을 행사하면 그걸 용서해야 하는 건가?”
팀 켈러 박사는 다음의 대답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던 용서에 대한 편견을 부쉈다.
(아래는 그의 언어를 번역/요약한 버전이다.)
”용서해야 한다.
하지만 용서를 한다는 것이 법적책임을 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이 감옥에 가게 하고, 그를 용서하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죄를 저지르게 방관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포용과 용납을 얘기하지 않는다."
이 입장에서 바라보면 피해자 입장에서 심리치료를 받는 환자가 ‘증상’ 혹은 ‘질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용서가 ‘환자’ 혹은 ‘피상담자’의 선택지로서 배제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이 글의 독자들이 경험한 심리치료/상담에서 이런 용서를 이야기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 지 궁금해진다. (괜찮으시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물론 용서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이라고 한다.
내가 용서한다고 말한다고 내 머리와 마음이 그 모든 걸 잊고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니.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이 용서가 더 쉬운 것 같기도 하다. 다섯살의 기억으로 아직도 친척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떠오른다. 난 기억력이 나빠서 그 사람에 비해 용서를 잘하는 건지, 용서를 해서 잊게 되는 건지 의문이다.
용서에 관한 팀 켈러의 책에서 이런 글귀가 있었다.
“Wraith*[뤠이쓰]는 과거의 유령, ’쉴 수 없는 영‘을 부르는 옛 단어였다. 전설에 따르면 유령 (한국 단어로는 ‘원혼’이 더 적합할까)은 자신이 해를 입은 장소에 머문다. 그들은 그걸 극복하지 못하거나 계속 그 순간을 ‘다시 산다 relive’한다. 만약 용서를 통해 자신의 분노를 해결하지 못하면 분노가 우리를 wraith로 만들 수 있다. 과거에 통제를 받고, 서서히 확실하게 우리를 ’쉴 수없는 영‘, ‘원혼’에 씌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참고자료) Forgive: Why should I and How Can I ? by Tim Keller
나의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경험한 여러 사례와 미국에서 대립하고 있는 심리치료의 부작용과 한계, 그리고 종교적 관점을 거쳐 다시 일상 생활 속으로 돌아와보자.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절대로 ADHD 환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자녀이다.
그리고 일부는 누군가의 부모이기도 하다.
플라시보 효과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이야기 했지만,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로서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아이들을 외부 ”전문인력“의 도움 없이는 회복의 힘이 없는 유약한 존재로 볼 것인지?
반대로 기본적으로 ’회복탄력성‘을 내제하고 있는 회복력과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 강인한 존재로 볼 것인지?
부모의 이런 태도가 아이들의 ’회복탄력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와닿았다.
이는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약물이나 상담없이도 회복 하게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혹은 ’신의 설계‘)라고 믿을 것인지, 아니면 나보다 나를 잘 알리가 없는 타인이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기해석의 권한을 양도하고 무한한 신뢰를 주면서 부작용을 감수할 것인지.
난 영화 <굿 윌 헌팅>의 심리치료사 같이 인간의 회복을 돕는 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주인공 '윌'은 고아이고, 입양된 가정에서 학대를 당한 과거가 있다.
다만 그게 꼭 박사 학위를 소지한 고학력자로 국한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전문인력의 전문성의 기준을 낮춰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들 위에 좀 뻔하지만 잊혀진 것으로 촛점을 옮겨오고 싶었다.
분명 어떤 증상, 심각한 상태의 환자들은 약물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거다.
이 글은 그런 이들을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이 글은 간과되고 있는 부작용과 ‘회복탄력성’에 대한 잘못된 ‘철학적 전제’, 그리고 현 패러다임 속 심리치료가 증상의 극복을 한 방면에서만 다루고 있을 가능성에 합리적인 의문을 던지면서 쓰여졌다.
*이 글의 기획단계에서는 용서라는 키워드가 없었다. 부작용과 개선가능한 부분 종결될 예정이었으나 자료 조사과정에서 얻게 된 관점이다.
이성으로부터 배신, 혹은 또래 친구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그 이후 모든 관계에 대한 신뢰를 잃고 불신과 염려를 하게 된 상황을 생각해보자.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넷플릭스의 ‘더 글로리’가 시청자의 시선에서는 ‘권선징악’의 스토리 전개로 다가와서 통쾌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복수를 실행하는 피해자로서의 심리는 어떤 상태일까?
중국에서 자란 나로서는 채널을 돌릴 때마다 TV에서 나오던 시대를 불문한 복수극이 연상되어 전혀 보고 싶지 않았기에 시높시스와 소재만으로 말하고 있기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독자님께서 알려주셔요. 복수에 성공한 그녀는 행복해 지나요?)
부모에게 상처를 받은 과거를 안고 성인이 되거고, 나아가 부모가 된 사람의 사례에선 어떨까?
10년, 20년, 30년의 세월에 잊혀져도 좋을 것이 ‘치료’의 이름으로 계속 ’반복재생‘된다면?
그 반복재생 속에서 마음의 상처는 옅어질까? 아니면 증폭되어 시공간을 초월한 ‘원한’에 가까월질 만큼 깊은 상처가 될까? 글로 과거의 경험을 반복적으로 쓰는 과정에서 정말 치유가 일어나면 좋겠지만,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묻혀지고 잊혀져서 상처를 극복하는 것에 방해가 될 가능성은 우려하지 않아도 될까.
심리치료 역사의 흑역사 중, 1980~1990년대에 심리치료사들이 잊혀진 기억을 복구시켜 줄 수 있다며 최면술을 썼던 활용했던 시기가 있다. Recovered Memory Movement. 나중에 False Memory Syndrome, memory distortion, psedumemory 이란 단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참고자료) https://www.nytimes.com/2022/09/27/opinion/recovered-memory-therapy-mental-health.html
이와 같이 너무 오래된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이런 ‘가짜 기억’이 생성될 위험도 있다.
어린 아이가 언어 폭력을 반복하는 부모와 살아오면서 겪게 되는 상처는 너무 안타까운 사례이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가 반복해서 ’정서적 상해‘를 가한다면?
어린 시절의 피해자였던 ’환자‘에게도 동등한 성인의 위치에서 힘의 균형이 달라진 상태이다.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을 수정/교정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기도 하다.
이번 글의 조사 중 듣게 된 사례이다.
어린 시절부터 불합리한 언어폭력이 습관처럼 나오는 부모와 소통하는 성인 자녀의 이야기이다.
그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선택한다.
”부모님이니깐 사랑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부모로서 예우를 다해 사랑하려고 합니다.. 내 아빠니깐 매주 안부 전화를 할게요. 하지만 상처가 되는 언어를 참고 듣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아빠가 폭력적인 언어를 시작하면 전화를 끊을게요. “
그렇게 전화를 하기 시작하고, 부모의 폭력적 언어가 시작되는 게 점점 늦춰진다. 통화 후, 5분 후에 나오던 언어폭력. 그러면 ’이제 끊을게요.사랑해요’ 찰칵. 그렇게 반복되는 전화통화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10분, 15분, 20분 언어폭력 없는 대화를 늘릴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이 사례에서 ‘피해자’는 기독교인으로 기독교인이 가진 용서의 의무에 대해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시도를 한다.
*달콤묘(sweet little kitty) 작가님의 연재글 (https://brunch.co.kr/@kitty/245) 을 보고 원래 기획단계에서 언급하고 싶었던 것이 떠올라 추가한다. (감사해요!!)
(독자의 항의) "퇴고는 삭제 위주로 하는 거 아닌가요?!!!"
청소년부터 부부/커플이 겪는 정신적 문제 중 간과되는 것 하나가 '야동'시청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수위에서든 성인물/야동/Pornography의 시청이 보편화된 사회가 되었는데, 어떤 의미에선 '관음증'의 대중화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야동'을 보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다가 '야동순재'를 거쳐 국민MC '유재석'을 거쳐 '정상적인 욕구해소'로 사회인식이 달라졌다. 이 역시 20대부터 30대를 지나며 주목해온 사회현상이다.
그 사이 '스마트폰'은 점점 더 어린 아이에게 주어졌고, 십대들은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개방된 성인식 속에서 한 통계*에 따르면 처음 야동을 시청하는 나이는 평균 12세까지 낮아졌고, (설문 전 1주기간 내) 75%의 아이들이 '야동'을 시청한 이력이 있고, 70%는 의도적으로 보았으며, 40%는 학교에서 본 적이 있고, 그 중 80%는 강간이나 폭력적인 형태의 영상이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New Report Finds Most Teens Watch Online Pornography
https://www.psychologytoday.com/us/blog/raising-kind-kids/202305/new-report-finds-most-teens-watch-online-pornography
통계조사- Common Sense Media (1200명 대상)
핸드폰의 빈번한 사용, 숏폼 위주의 영상시청 행위 자체가 이미 아이들의 두뇌에 미치는 영향이 있을텐데, 그 콘텐츠가 야동이라면? 도파민과 연관된 문제로 이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내가 중국 공산당에게 감사한 건, 내가 중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던 때 인터넷 관리를 엄격하게 해서 고2에 미국에 가기 전까지 그런 것에 노출된 적이 없다. (미국에 가니 첫번째 호스트패밀리 집에서 제공한 방의 소파 쿠션 아래서 잡지가 나왔고, 그 집 PC 접속이력에 성인물사이트 접속이력이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청년의 발기부전부터 성욕저하, 이성에 대한 무관심도 부작용으로 언급되지만, (당연히)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칠거다. 심리학 박사학위가 없어도 이런 추측은 할 수 있겠다.
(참고자료)Associations between adolescents watching pornography and poor mental health in three Swedish surveys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10460300/
'훅업 컬쳐(hook-up culture)', 인간적 깊이 없는 관계 속의 'casual sex'는?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기 위해 활용한 피임약은? (호르몬은 정서/기분에 영향을 미친다)
일부(1-2%)는 우울증을 경험하기도 한다.
참고자료) https://www.health.harvard.edu/blog/can-hormonal-birth-control-trigger-depression-201610172517
https://www.medicalnewstoday.com/articles/birth-control-pills-may-increase-the-risk-of-depression
주 2-3회 술을 마시고 (혹은 필름 끊길 때 까지 마시는 게 유흥으로 생각하고), 쉬는 날엔 넷플릭스 '빈지 워칭' (정주행/몰아보기), 먹는 음식은 패스트푸드나 공장에서 튀겨낸 화학물 뿌린 탄수화물에 설탕음료, 자극이 필요할 땐 '야동시청'......운동은 의사처방 받기 전엔 안하고..... 과거에 이런 생활 패턴을 이어왔다면, 정신건강에 좋을리가 없지 않는가.
그런데 정신의학과나 상담실에서 이런 것에 대해 환자와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환자 앞의 전문가는 전공영역에 대해 이야기 해야 권위가 있고, 환자는 방어기재 200% 작동중일텐데.
보지 말라는 조언을 한들 그걸 따를 수 있을까. 중독되었는데.
어쩌면 당연하게도 건강한 습관이 결여된 삶이 건강하지 않은 정신건강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겠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정신건강이 안 좋은 결과가 전부 그런 생활에서 올 가능성을 시사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생활패턴이 기여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론에서 쓰려고 공책에 적어놨는데, 마감에 쫓기다가 부족한 잠에 잊어버렸네요. 뒤늦게 수정 발행한 부분입니다.
이 글을 마무리 할 무렵 아이들의 책 중에서 곤충, 식물도감의 한 페이지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파인애플은 수많은 꽃들이 모여 하나의 열매를 만든 것이에요
지금까지 하나의 열매를 먹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개의 꽃이 모여 하나의 열매가 된 것이라면, 사실은 여러 개의 열매로 구성된 하나의 열매였던 거다.
정신건강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시절을 포함한 과거의 사건들, 현재 처해진 상황, 영양상태, 날씨, 음식, 공기, 환경호르몬, 인간관계, 근로조건, 시청콘텐츠, 좋아하는 음악, 많이 읽은 책의 저자, 개인의 세계관/철학, 음주여부, 약물복용 여부 등 수 많은 요소들이 하나의 ‘열매’처럼 보이는 거다.
그러니 그 호칭을 정신질환이라고 하던 ‘마음의 아픔’이라고 하던, 그걸 일차원적으로 뇌만의 문제, 생화학적 문제라고 생각하면 놓치게 되는 게 있을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전문가가 아닌 나의 결론은 아쉽게도 해결책이 아니라 질문이다.
아직도 인류는 인간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미지의 영역은 ‘확신이 필요한 이들’에겐 절망을 줄 수 있지만
‘불확실성 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는 이들’에겐 “가능성의 영역”이다.
나의 부모는 다행히도(?) 해외거주 등으로 발생한 것으로 해석가능한 사춘기 소년의 정서적 문제에 세세히 신경써줄 수 없었다.
특별히 그런 치료에 돈을 쓸 경제적 여유도 없었을 분더러, 중국에는 그런 게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는 세심이란 단어를 쓸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발전이 20년 뒤져있다고 보면 된다.)
지금 시대의 북미주(north America)의 아이들이라면 수많은 심리상담 세션을 거쳤을지도 모를 ‘해외 이주’경험을 거쳤다. 키가 컸고 운동신경도 좋았던 것 위에도 만만해 보이지 않는 인상 덕분에 나에게 물리적 폭력이 가해진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친한 친구를 잃었던 경험도 넓은 범주 안에서는 학우들의 악의적인 행위로 발생한 일인만큼 지금은 ‘학급 내 문제’로 해석가능하다.
그런데 난 부모의 개입, 심리치료사의 개입 없이 정서적으로 꽤나 ‘튼튼한’ 성인이 되었다.
부모님의 무심함 덕분에 (어떤 저자들이 주장하는) 아이들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하는 ‘회복탄력성’이 자연스레 발현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부모님은 신/하나님이 지켜주셨다고 얘기할지 모르겠다.
아니, 그럴 거다. 그 역시 부정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가능성 중 하나이다.
하지만 또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은 신이 지켜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으니 어디까지나 가능성.
지금 한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떨 지 궁금하다.
해외에서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녀들은 어떨지 궁금하다.
소위 Blue State에서 살아가고 계신 일부 작가님들은 어떤 소감이 있으실지 궁금하다.
사실 이번 글 속에서 언급한 의문과 의견들이 무신경하게 아픔이 될 지 우려가 많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주류 언론에서 언급되지 않은 연구결과들을 모아 이렇게 글로 발행하게 된 것은 그게 ‘진전이 없는 치료’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할 가능성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주에 거주하신 작가님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 분의 가정 속 아픔을 홍보한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알 수 없어 함부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서 차마 작가명을 거론하진 않는다)
심리치료를 통해 좋은 회복을 겪은 ‘구(ex) 환자’들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다행이다.
분명 유효한 치료방법이 있고, 유능한 정신과의사와 심리치료사도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심리치료나 약물치료에 부작용을 주목하게 되어 성급하게 중단을 결정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약물치료의 경우, 심각한 금단증상이 있기 때문이다.
왜 심리치료를 하다 정신의학과에서 받은 약물을 먹다가, 안 먹게 되는데 자살을 하고자 하는 자기 파괴적 충동이 드는 부작용이 생기는 건지 정말 알 수 없을 일이다.
약물치료를 중단하는 과정에 대해서 상담하여 진행하길 바란다.
난 심리치료를 받은 적은 없지만, 치과치료는 정말 자칭 베테랑, 프로환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많은 치료를 받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미 어금니(46번)에 ‘포스트’를 박고, 방과 후 신경치료를 받고 집에 갔다. 치과 진료를 마치고 치과에선 나에게 사탕을 줬다.
(돌아보니 …미래 고객 양성인가!)
중학교 때는 농구를 하다가 발생한 사고로 앞니 네개가 40-60% 부서져서 수개월을 마스크를 쓰고 도시락통에 스프와 밥을 가져와 먹었던 기억도 있다.
아내는 내 앞니가 가지런하고 예뻐서 좋았다고 했는데, 이 사실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부러지기 전엔 더 예뻤다고.....! 특히 부러진 위에 덮어씌워진 의치(?)의 송곳니는 내 자연치아의 날카로운 각도가 부족했다.)
그리고 연애할 때, 농구하다가 앞니들이 부숴졌다고 말했는데...!! 왜 자기가 잊고 배신감을 느낀다고 하는 건지...
오랜 시절이 지나 어린시절 포스트를 박았던 곳에는 염증이 생겼다며, 그냥 두면 턱뼈가 녹을 수 있다는 치과의사의 경고(?)에 수습기간이 끝난 첫 월급을 몽땅 들여 임플란트를 했다.
30세의 첫 임플란트라니.
안타깝게도 두번째 임플란트도 이미 있다.
30대의 끝자락을 마주하게 된 해의 일이다.
난 대학생활을 위해 귀국 후, 줄곧 같은 치과를 다녔는데 첫번째 임플란트를 한 곳에서도 정기검진 후, 엑스레이를 보여주며 이제는 나이가 지긋해지신 원장님이 말했다.
‘여기에도 염증이 생겼어요.
이거 그냥 두고 심해지면 뺄지, 아니면 지금 빼고 임플란트를 할지 고민해봐야 하겠네.
근데 오래 방치하면 잇몸뼈가 다 녹아서 임플란트 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네. ’
농구할 때 부분적으로 부러진 이빨의 잇몸 안쪽의 일이다.
첫번째 정기검진 땐, 경과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두번째 정기검진 때 또 그런 얘길 하니 걱정됐다.
리스크를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리스크를 방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 시간 나의 치아를 잘 관리해주었고, (쓸데없이) 치과의사와 '라포르'(Rapport/신뢰)가 생겨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인가, 입학전부터인가부터 취업, 결혼, 출산, 첫째, 둘째까지 18년이 넘게 다녔으니 그럴만도 하다.
바가지를 씌우는 의사도 아니었고, 불필요한 치료를 권유하지도 않아왔다.
신뢰하는 의사가 그렇게 우려의 말을 자꾸 해대니, 내 마음에도 불안이 싹텄다.
그렇게 원래 계획에 없던 방문에 나의 앞니 22번은 발치 되었다.
치아를 빼고 나니 그 전에 설명해준 적이 없었던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일단 발치한 자리가 아물고 잇몸뼈가 차오르는 상태를 보고 임플란트를 할 수 있을 지 보자고 했다.
잠깐?
예방차원에서 뽑으면 임플란트 할 수 있다고 한 게 아니었나..?!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제공 받은 탈착형 임시치아/틀니도 가관이었다.
내 이빨에 집중하는 사람이 없기야 하겠지만, 이건 …너무 불편하고 넣었다 뺐다…물에 넣어둬어야 한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냥 쓰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살았다. 어차피 아직도 코로나19로 휴가를 주지도 않는 상태이긴 하지만 마스크는 일상용품이 되었으니.
이제서야 불신이 생겼다.
뒤늦게 합리적인 의심이나 이차소견에 대한 고민이 생긴 거다.
좀 더 조사해보고 결정할 걸.
검색을 해보니 치아보존을 강조하고 현미경을 활용한 정밀검사와 잇몸 염증치료를 강조하는 치과들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기존 치과에 사후관리를 위해 간 후, 애둘러 이야기 했다. 집에서 40-50분 운전해서 이 치과까지 오는 게 힘들다고. 실제로 허리가 아플 땐 고역이었다. 지금까지 오랜 기간 와서 바꾸고 싶지 않지만, 근방의 치과로 옮기고 싶다고. 그간의 치료에 대한 감사의 편지와 소정의 후원금을 봉투에 담아 드렸다. (그 치과는 정기적으로 해외로 의료봉사를 갔다)
원장님과 사이좋게 기념 사진도 찍고, 지난 엑스레이 사진도 원장선생님 카톡으로 다 받고…
그 엑스레이 사진들을 새로 간 마포역의 치과에서 젊은 원장선생님이 말했다.
엑스레이 상으로는 안 빼도 됐을 것 같은데요?
왜 미리 검색해볼 생각을 못했을까.
정말 인생에 후회하는 순간이 몇 개 없는데 '되돌리고 싶은 순간 TOP 3'*의 두 개가 치아 관련이 되었다.
첫번째, 중학교 때 쉬는 시간에 코트 밖으로 나간 그 농구공을 쫓으러 달리지 말 걸.
두번째, 2차소견(second opinion)을 받아보고 발치를 결정할 걸.
※세번째는 잊고 싶은 과거이기 때문에 '복제본 확산 방지' 정책에 의거하여, 공개하지 않는다. 10년, 20년 후에는 잊혀질 거라 기대하며.
어떤 수술은 타임머신을 타지 않는 한, 되돌릴 수 없다.
어떤 심리치료나 상담을 통한 결정(예:성전환수술)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굳이 나의 아픈(?) 과거사를 이렇게 풀었다.
그게 약물치료일 경우, 심리치료보다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여기서 생긴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처음 나왔을 땐 괜찮다고 여겨지다가 시간이 지나 유해물질로 분류되는 것들은 은근히 많다.
담배가 처음 대중화 되던 시절 미국에선 의사가 나와서 광고를 했던 때가 있고, 비행기에서 담배를 폈으며, 임산부에게도 괜찮다고 떠들었던 흑역사가 있다.
후라이팬에 계란 눌러붙는게 뭐 그리 대수라고, Teflon (PTFE), PFOA 코팅이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사용되고, 뒤늦게 ‘forever chemical’이란 낭만적인 악명을 얻고 몸에 축적되는 특성을 발견한다. 암(신장과 고환)유발 물질이다. 모기와 싸우겠다고 쓰던 DDT도 알고보니 발암물질이었고, 인간에겐 생식능력에, 새들에겐 알의 껍질이 얇아지게 하는 영향을 미쳤다. 물병에 쓰이는 BPA(비스페놀A) 부터 항균비누나 소독제의 Triclosan도 마찬가지다. (호르몬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게 된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스포츠용 물병이나 아이들 물병소재로 사용된다. '항균'기능을 강조하며)
2013년에 이미 <청결의 역습>이라는 SBS다큐멘터리 내용으로 구성한 책에서는 저 Triclosan의 리스크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ADHD를 장내미생물과 연관지은 연구도 언급했다. 그게 벌써 11년 전이다.
참고기사: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13239
(혹시 묵PD님(https://brunch.co.kr/@mookpd)도 이 시절에 함께 근무하셨나 궁금하네요)
ADHD의 발병요인만 해도 유전과 환경이라는 잘 알려진 요인 외에도, 장내미생물이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Gut-Brain Axis 가설이라든가. 오메가3, 철분부족, 아연, 마그네슘 부족, 납에 대한 노출, 소음 공해, 운동 부족 등 덜 알려진 요인들이 있는데, 약만 먹으며 치료를 기대하는 건 어떤 결과를 나을지 우려가 있었다.
참고자료: (1) Reviewing the Causes and Evaluating Solutions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7999417/
참고자료 (2): What are the causes of ADHD?
https://www.medicalnewstoday.com/articles/causes-of-adhd
우리는 미세플라스틱이란 것에 대해 경계하기 전에 별 생각없이 사용되던 실리콘에게도 뒷통수 맞았다.
(우리 집 애들은 안 줬지만) '쪽쪽이' 어쩔 건데..!!
(참고자료) Steam disinfection releases micro(nano)plastics from silicone-rubber baby teats as examined by optical photothermal infrared microspectroscopy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65-021-00998-x
또 지금으로부터 10여년이 지나면 전자파, 블루투스 X.0, 와이파이가 'ㅇㅇㅇ에 영향' 하며 헤드라인이 뜰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코로나19이후 높아진 손소독제* 사용부터 피할 수 없는 초미세먼지까지.....
소독효과 높인다고 알콜함유량 엄청 높은 걸 사용하는 것도 신경쓰인다. 발암물질->기화->흡입->하루 N회...
브런치스토리 안에서도 성인ADHD, 우울증을 진단 받은 분들이 여럿 보였는데 이 글이 닿을지, 그 분들께 나의 글이 유용할지 … 길고 긴 이 글의 끝까지 오실 수 있으셨을지?
기타 참고자료:
(1) Media Reference :
The Great PsychoTherapy Debate
The Great PsychoTherapy Debate 2.0
Mark Manson YouTube Interview with Abigail Shrier
JBP's Interview with Abigail Shrier (교수 B: Jordan Peterson)
YouTube Channel Unherd Interview with Abigail Shrier
Chris Williamson's Interview with Abigail Shrier
이런 인터뷰영상들을 음원으로 다 두 세번 듣고 만들어진 글이랍니다.
(2) 참고자료 및 추천도서 :
- <Crazy Like US: The Globalization of the American Psyche> by Ethan Watters
*한국어 역복: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 <Bad Therapy: Why the Kids Aren't Growing Up> By Abigal Shrier (*저널리스트 A)
- <The Great Psychotherapy Debate: The Evidence for What Makes Psychotherapy Work> by Bruce E. Wampold
*한국어 역본: <심리치료 대토론: 마음의 치유는 어디에>
- <The Coddling of the American Mind: How Good intentions and Bad Ideas are setting up a generation for Failure> by Greg Lukianoff, Jonathan Haidt
*한국어 역본: <나쁜 교육 - 덜 너그러운 세대와 편협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The Anxious Generation : How the Great Rewiring of Childhood is Causing an Epidemic of Mental Illness> by Jonathan Haidt
Writer's Last Weeks
2주라는 시간을 확보해서 원고의 퀄리티를 높이고자 했지만, 여름이 되고 열대야가 있는 날이 많아졌네요. 겨울엔 엄마아빠가 피곤하면 '오늘 양치만 시키고 재울까 ? (= 씻기지 말까?)' 라는 유혹에 넘어가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땀에 끈적이는 머리칼을 보자니, 양육자의 의무를 소홀하게 되는 것 같아 매일 샤워를 시키고, 머리도 적어도 격일로 감기게 되었어요.
아내 배려 차원에서 아이들 목욕은 계속 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전 과거기준의 다둥이 아빠입니다. (저희 집은 막내가 9개월, 첫째가 만 4살이 되었습니다)
아내->아이1,2,(3). 애들 재우고 아빠 샤워의 순서인데, 애들 재우다 잠들고 새벽 2-3시 경에 깨면 무릎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샤워를 조용히 하고 머리말리는 건 생략하고 글 쓰기 좋은 시간이 생깁니다.
그런데 요즘 피곤했는지 아침 다섯시까지 자고 깬다거나, 새벽에 안 잔다고 뭐라하는 아내를 의식하여 샤워하고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말에 마무리를 할 목표였는데, 토요일 저녁엔 씻고 쓰다보니 한 시간을 못 버티고 잠이 솔솔와서... 잠시 누웠다가 새벽에 두 아이가 '아빠 어디갔어 ㅠㅠ' 하는 소리에 후다닥 패밀리 침대로 돌아갔고, 그 다음 날 저녁에는 먹성 좋은 둘째가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안아서 달래다보니 토 하기전의 '욱욱(?) 웩(?)'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조금 불안한 밤이었죠.
매실원액을 희석시켜 타 먹여주고, '이거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하고 안심시켜주고 재웠어요.
아이도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아서, 저도 안심해서 잠이....들었네요.
마침 월요일은 휴가였습니다. (연차사용촉진제가 적극홍보되며 휴가사용을 권장(강제) 하는 분위기에 대충 적어넣었던 날이 어제였어요.) 글을 쓸 시간이 있었냐구요?
낮잠을 재우다 같이 뻗어버렸고, 막내와 아내가 자는 동안, 막내의 낮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애 둘을 데리고 놀이터에 갔어요.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챙겨서.
그네 밀어주고 한 문단, 다시 밀어주고 퇴고 계속. 다행히 둘이 같이 놀이터에 가면 둘이 노는 시간이 많아 조금 더 작업이 가능합니다. 기온 30도 습도 75%의 날씨에도 아이들은 신나게 놉니다.
제가 휴가를 쓰면 아내는 '시간활용의 유용성 기준'을 집안 가구 옮기기로 삼은 건지... 또 이런 저런 "건의"를 합니다. 어제는 거실에 있는 가로 240cm짜리 기다란 어린이 책장을 옮기고, 거기에 맞춰 거실에 깔아둔 소음방지 매트를 옮기고, 그 공간 확보를 위해 소파를 옮기고... 그리고 나서야 애들을 씻기고 재웠네요. 요즘 계속 10시가 되어야 잠들어요.
네, 길게 말했지만, 이게 연재마감일을 놓친 글쓴이의 사유서 입니다.
저기요, 완독자 선물은?!!
초고 기준 약 12960 단어를 독파하셨으니 브런치에서 하루 독서량 채우시는 '노고'를 하셨는데!
연재북 글 마무리에 독자선물로 자작음악을 추가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 곡은 가사 없는 연주곡이고, 허접한 제 곡이 선물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다한’ 풍경이 선물입니다.
https://youtu.be/bgWQnNl3i-0?si=kda1wcdbqyvia95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