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빙산 Jun 22. 2024

힐러가 될 것인가? 흑마법사가 될 것인가?

On Writing (3)- what?(1) : 작가란?

글쓰기라는 ‘행위’, 동사에 대한 생각이 명사로 넘어 왔습니다.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주체가 ’무엇인가/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죠.


브런치작가로 활동하는 우리들 모두는 작가입니다.

(물론 브런치작가가 아니더라도 훌륭한 작가도 많겠죠)


작가는 한자로 作家가 됩니다.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 (출처: 네이버 사전)


지을 작作, 집 가家

한글로는 작가라고 하면서 한자가 나오니 머리 속 중국어OS는 作者(작자)를 쓰고 있었네요.
그런데 한글 독음을 찾아보니 ..' 지을 작, ........놈 자.....' (..?!! 놈..?!!!)


네이버 한자사전은 지을 작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짓다, 만들다, 창작하다, 일하다, 행동하게 하다.... a~n까지 참 많이도 나열했네요.


그래서 이 두 글자로 이야기를 풀어보려해요.




1. 작가: 만들어 내는 사람들


저희는 글을 만들어 냅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는 감정과 생각을 불러 일으키죠.

그 글은 독자를 만나고, '구독자'를 '만들어' 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까지는 글에 대해 '내 자식'이란 기분까지는 느끼진 못하지만,

십수년전에 만들었던 음악에 대해서는 확실히 '내 자식'이란 애착이 있어요*.

객관적인 기준으로는 너무 후져서 세상의 빛을 보게 하면 안된다고 믿고 살아왔지만, 결국 몇 작가님들의 친절한 격려를 힘 입어 유튜브라는 바다에 풀어놓고 말았습니다. 음악 전공자들이 듣게 되는 날이 되면 아마 엄청난 비웃음과 비난의 댓글이 달릴 수도 있는 그 험한 바다이죠.

내 눈엔 예쁘기만 한 자식을 유치원, 학교에 보내면 '너 못 생겼어' 소리 들을 각오는 하고 보내는 거죠, 뭐.. 어쩌겠어요.


작가는 글에 대한 애착이 있고, 그래서 글을 잃게 되면 ‘미아찾기’의 마음으로 아이를 찾아 헤맬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탈퇴하신 ‘작가명미정’/임의축약형별칭 ‘미정’님의 표현을 차용했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만들어내는 건 글 뿐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글은 소통으로 이어지고 소통은 관계로 이어지죠.

우리는 그렇게 생판 모르는 남에서 (온라인 상에서 이지만)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이가 됩니다.


구조적으로 이렇게 선한 생태계를 만들어낸 커뮤니티는 참 드뭅니다.

전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에 하나도 가입되어 있지 않아 검색 결과에서만 종종 봐왔지만, 브런치와는 정반대라고 할 정도의 언어로 소통합니다. 말이 소통이지 소통이 아닌 비방과 감정배설의 경우도 많구요.


어떤 경우,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가족에게도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적어놓고 나누니 중, 고등학교 때 두어번 해본 기억이 있는 '교환일기'를 주고 받는 친구 사이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그게 어찌보면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어떤 때에는 가족보다 더 힘이 되는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조금 위험하죠?!)


그 때의 일기와 다른 게 있다면, 저희 일기장은 '전체공개'라는 것.

두 사람, 혹은 서너 사람이 돌려가며 쓰던 일기장을 인터넷에 접속가능한 누구나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여기엔 굉장히 역설적인 다이나믹이 생깁니다.

친밀함은 주로 '너와 나 사이의 비밀이야' 같은 비공개성에서 생기는데, 전체공개의 글이 되니깐요.


(어쩌면 '일기는 일기장에 써라' 라고 글쓰기 철학을 얘기해주시는 분들이 말하는 게 이런 부작용을 예방하는 효과가 되기도 할 것 같아요)


전체공개라는 건, 성숙한 사람, 미성숙한 사람, 선한 사람, 가끔 충동적으로 악의 손짓에 손을 잡는 사람, 여러 사람들이 다 보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게 되고, 그렇게 작가의 자식은, 작가의 분신은 세상 풍파를 마주하게 됩니다.



서랍 속의 글은 안전합니다.


어떤 비난도 평가도 받을 필요가 없죠.

하지만 서랍 밖으로 나가는 순간 평가의 세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니가 뭔데 날 평가해?' 라고 말할 수 없는 자발적인 도전이죠.

발행할 순간에도 발행 후에 마주해야 하는 일들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브런치스토리의 모든 작가들은 용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용기는 오즈의 마법사의 겁쟁이사자를 용맹한 맹수의 왕(혹은 왕자..)로 만들 기회로 이어집니다.


비단 작가가 만들어내는 글 뿐만 아니라, 글이라는 열매 속에 있는 또 다른 씨앗이 다른 열매를 맺게 되기도 하겠죠. 그게 다른 작가에게 글감, 영감이 될 수도 있고, 이어진 인연이 사람이라는 열매가 되거나 격려와 응원이 담긴 '사랑'이라는 열매가 될 수도 있겠구요.




2. 작(作)이 저주가 되지 않도록


오늘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저주诅咒의 '저' 의미가 한자사전의 2번의 의미로 실려 있다는 겁니다.

네이버 한자 사전

고문古文에서 그렇게 활용한 사례가 있나 궁금해서 중국 Baidu 사전을 뒤져봤습니다.


일단 갑골문에서는 사람이 몸을 일으키는 형태를 표현한 글자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명사로서는 1~11까지의 여러 의미가 나오는데, 저주라는 뜻은 없습니다.

동사로 넘어갑니다.

고시, 고문에서 여러 표현들이 나옵니다.


동사에서 1,2,3....20까지 나갔는데 '저주'의 뜻은 없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합니다.

왜 한글 한자사전엔 2번째에 나오는데 없지?


..하는 순간 마지막 21번째 뜻에서 나옵니다.


저주할 저诅를 대용해서 쓰인 글이 두 개 있습니다.


(1) 시경에서 나온 문장입니다.

侯作侯祝。 ——《诗·大雅·荡》

(아니, 여기선 축복의 축祝도 저주의 주와 통용..한다는 설명이..!)


(2) 춘추시대의 군사전문가 관중管仲이 쓴 산문에서 나오는 문장입니다.

下作之地,上作之天。 ——《管子·轻重己》

아래 문장에 대해 청나라 말기의 문학가, 교육가, 서예가 俞樾유월[yu yue/위 위에]가 주석을 달았답니다.

“两作字读为诅,古字通用。"

위의 두 '작'은 저주의 저로 읽고, 옛글에서는 이렇게 통용된다. .. ...
주술적인 미신이 있어서 이렇게 표현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작가의 글은 많은 걸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부패한 세상을 대항하는 작가의 붓은 칼로 표현하기도 했죠.


모든 칼이 그렇듯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나라를 지키는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범죄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의 손에 쥐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작가의 글에도 그런 양면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한낱 인간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연예인처럼 얼굴도 모르는 수천 수만명 다수의 팬들에게

회사회식 때 외쳐지는 상사를 향한 '사랑합니다!!!!"와 같이..

...하고 공허한 애정표현을 할 필요도 없죠.)

(물론 어떤 아티스트와 어떤 팬들 사이에는 그런 유대감이 존재할 수 있을 거라 믿기도 합니다. 아이유 콘서트장에선 뭔가 그런 게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안가봤지만...)


공백을 마주한 작가들에겐 늘 두 가지 선택이 있나봅니다.


만들어 낼 것인가
...
저주할 것인가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브런치에서 작가명 ‘천재작가’를 알기 전에 작가 중 ‘천재’라고 하면 제게 떠오르는 건 알랭 드 보통, 베르나르 베르베르,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닙니다.

날카로운 분석력으로 ‘허’를 가르고 ‘실’을 꿰뚫는 사유의 작가. C.S 루이스 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작가, <반지의 제왕>의 J.R.R 톨킨스의 ‘절친’)그가 그런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악이 존재하기 위해선 선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

비슷한 말도 있죠.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빛의 부재일 뿐이다.

그걸 악과 선의 관계에 대한 비유에 적용시킬 수도 있겠죠.

굳이 그걸 좀 더 작은 세계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 되는 걸까요.

작가는 ‘선’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악플러’가 악의적 댓글을 달기 위해선 작가의 작품(글을 포함한 모든 예술품)이 먼저 존재해야 되는 거죠.


악은 아무 것도 창조해내지 못하고 이미 존재하는 선한 것을 왜곡합니다.
힌두교 세계관에서는 신, 자연, 인간 궁극적으로 하나라고 해석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세계관에선 ‘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간’이 있고,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아 신처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속성을 공유한다고 하죠.  유대교에선 그래서 나와 같은 인간이라면 모든 인간에게 ‘그런 속성‘이 있기 때문에 ’살인하면 안되는 근거로 이야기 하는 학자도 있고, 그게 또 적용되어 ‘자살’하면 안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 안에 자신도 포함시킵니다)그런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해 발전한 서양의 법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왕‘이 법 위에 있던 기존 세계관과 달리 절대적인 ’법‘ 아래 ’왕‘을 포함한 모든 인류가 영향을 받는 겁니다.


지금까지 전 굉장한 행운아처럼 천사들의 격려와 위로의 댓글만 먹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3. 미숙한 글=SHIT? 아니, BTS의 Sweat!


창작 관련 수업에서 종종 교수/강사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학생의 글에 대해) ‘(이건 작품이 아니라) 배설이다’


제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처음 들었을 땐, 참 듣기가 거북했습니다.

물론 아직 다듬어지지도 않고 그냥 마감시간에 맞춰 쓰여진 글들이 너무 부족하여 ‘똥’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이해 합니다.


하지만 숙제를 내준 사람도 없는데 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을 내어 글을 쓰는 우리들의 글은 어떨까요?

제가 만약 글쓰기 선생님이라면 전 그걸 ’안타까운 수준의 글‘에게 똥 대신 ‘땀’이라고 부를 것 같습니다.


서울대학교 과학교육연구소

똥은 소화되고 남은 음식찌꺼기와 독소이죠.

독소가 있는 똥 같은 글도 분명 존재할 겁니다.


별 생각없이 혹은 악의와 적의와 같이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순간의 분노만을 담아 뱉어내는 일부 댓글의 경우, 그런 냄새나는 노폐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꿈을 품은 이들의 글은 아무리 부족한 점이 많아도 그건 ‘땀’일 겁니다.

그렇게 피, 땀, 눈물을 담아가며 조금씩 보석이 다듬어지는 거 겠죠.

(BGM은 BTS의 이 곡)



4. 나는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가?


사실 지금 단계에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농담반 진담밥 “쓰고싶은 거 쓰고 살고 있었는데 출판사의 요청에 시달리다 마지못해 책을 내는 작가” 정도로 설명하고 말았던 것 같은데, 조금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한 질문인 것 같아요.


처음 브런치를 시작할 때는 ‘사생활’을 소재로 삼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아마추어 글쟁이가 글을 쓸 때 현실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더라구요. 작정하고 소설가로 시작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글을 통해서 세상을 어둡게 하는(?) 오해를 걷어내는 역할은 하고 싶어요.  

장르와 분야를 불문하고.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 ‘돈이 많아야 결혼할 수 있다‘ …. 이런 삶 속에 가까운 이야기부터 대중의 인식과 전문지식의 갭이 큰 영역의 오해까지… 그래서 테마가 ’오해‘였는데, 브런치 키워드에서 ’화해‘조차 없다는 거 아시나요?


?왜 빙산이에요?

중고등학교 시절엔 ‘바다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과학을 좀 더 알게 되니 바다가 하는 역할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바다가 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게 됐네요.

빙산은 사실 ’빙산의 일각‘만 보는 게 아니라 빙산 전체를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서 빙산이었어요.


그런데 또 과학의 시선에서 빙산을 바라보니 다른 얘기도 풀어볼 수 있겠네요.

지구의 해수온도, 지구 전체의 온도를 유지해주는데 큰 역햘을 감당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태양광선을 반사시키기도 하면서.

또 극지의 얼음을 파보면 엄청 오랜 역사를 유추할 수 있고.

자신을 녹이면서 지구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또 그 시스템 안에서 자기가 다시 얼고 녹고 하며 유지되고 유지되게 하는 존재.


언젠가 그런 글을 써내려가는 작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봅니다.

멋드러진 한 문장 뒤에 숨은 위험한 철학을 드러내고 싶기도 하고,

보편적이 되어가는 잘못된 상식 뒤에 감춰진 과학적 위험을 드러내고 싶기도 하고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널리 알려 오해받고 있는 인물을 재조명 받게 하고 싶기도 하구요.


그게 어떤 장르와 형식을 갖추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너무 추워보여 아무것도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펭귄들과 하얀 곰과 하얀 여우 등 귀여운 생물체들도 살고 있는 그런 빙산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자기만족이나 자기표현에 대한 강한 욕구는 없지만 제 글들이 제가 이뤄내고자 하는 ‘기여’에 보탬이 된 걸 확인할 때 만족감이 생길 수 있겠네요.


5. 마무리


우리의 '자식'들이

저주가 되는 일 없이

위로와 축복이 되길 소망하며


작가님들의 마음과 손가락으로 쓰여지는 ‘땀’이

언젠가 한땀한땀 장인의 손길로 쓰여지는 보석이 되길 바라며


-빙산 올림-




-발행취소와 함께 사라졌던, 하지만 보관한 댓글-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은 무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