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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산 Dec 09. 2024

이해되지 않은 것들은 이해하기 위해

원하는 것이 다 이뤄질 수는 없지만


평온히 잠든 아이들 사이에서 오른쪽, 왼쪽에서 발차기 하는 아이들의 가격에 깬 새벽 4시 반.
바다 건너 온 안부 문자에 뒤늦게 알았던 황당한 일의 소식.

지난 번의 대피경보는 오보였으니 이번에도 딥페이크나 무슨 착오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현실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살펴보던 30분을 거쳐 그 비현실적인 '선전포고'가 무력화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역사책, 영화에서 보던 일이 일어나려다가 멈춰졌다.
내가 잠든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
나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다.

정치가 그렇다. 

모두가 ‘정의의 편’인양 목소리를 높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권력의 자리에 앉으면 '선善'대신 '익益'을 우선시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던데 그 자리는 원래 그런걸까.

권모술수와 허위정보와 역정보, 거짓과 선동 속에서 권력의 계승은 이어져간다.
누군가 우리 민중을 구해주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우리를 박스 앞으로 끌고 가지만
저번에도 이번에도 그 다음에도 아마 우리는 만족스러운 아름다운 완벽을 보지 못할 거다.
그게 인간의 한계이며 정치의 한계일지 모른다.

한 사람이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뒤에는 다른 이들이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다.
그를 그 자리에 올린 것은 그의 측근들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포함된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 용납하지 못하는 것들이  ‘악'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반대편'의 기준으로는 (만약 반대편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믿는 게 ’거짓‘에 속고 있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반대편 사람들이 거짓에 속고 있어서라고 생각하고 있다. 

절대적 선과 절대적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불만에는 '내 기준으로는'이라는 선호가 된다.


‘어차피 정답은 없어’ - 라는 철학적 미니멀리즘은 지금 이 '시국'의 현실과 같이 밀접한 문제를 마주할 때 힘을 잃는다.


지금 이 ‘시국’에는 아무도 ‘정답은 없어’라고 말하지 않을 거다.


난 정치적 중립을 선택하고 싶지만 그건 고결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모름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중립’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난 '정치적 올바름' 대신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은 그저 ‘옳음’을 추구하고 싶다.

I don't want to be politically correct, I just want to be right.  (It just sounds simpler and better in English.)



우리가 ‘중립’이라고 부르며 비워둔 빈 공간은 비워둔 채로 남지 않고 다른 것으로 채워진다.

종종 무관심과 불참은 의지가 있는 이들에게 '무저항'이 될 뿐이며 용인으로 해석된다. 

불의에 대한 용인容忍은 어떤 때는 더 큰 불의가 활개치게 하며 

거짓에 대한 관용이 커지면 사회는 불신으로 가득찬다.

불신이 가득해지면 사회는 혼란스러워지며 

그 혼란은 기존의 권력자에게 유리한 상황전개로 이어진다.

아무도 누군가를 믿지 않는 사회,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거짓의 유토피아. 

하지만 진실이라는 싹은 거짓의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부르는 속성이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보여줬다.  

어떤 총알과 폭탄이 쏟아져도 잔인한 겨울은 봄으로 끝맺는다.  


계엄을 막아낸 민주주의 국가의 아침


8년 전 딴 나라 대통령에 대한 오판이 있었던 만큼 

이번에도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될까?


다른 생각을 하게 되려면 어떤 걸 알아야하는 걸까?

정말 지금 사회에 ‘반동분자‘들이 가득하고 우리들을 선동하고 속이고 있다고?

그리고 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들만이 ‘진실’을 아는 소수인 건가.


빨강도 파랑도 정의가 아닌 권력을 추구하는 거라면 결국 똑같아지겠지.



그렇다면 정치적 다름이 불가피한 우리가 분열이 아닌 화합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뭘까.

누군가 말했던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미워하지 말라' 라는 것처럼 

'무지'를 미워하되 '무지한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하고 서로 싸울 때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나?

언제나 혼란은 무모한 것을 하고자 하는 위정자에게 유리하다. 



종교가 없는 이들에게 정치가 절대적 가치가 되는 사례는 현대사 속 피血의 기록이 가르쳐줬다.

지난 10년 간 서구사회를 관찰하며 봐온 현상이기도 하다.

지도자는 바뀐다. 

유효기간이 있다. 

인간의 유한함과 '권력보다 고결한 가치'가 있다는 걸 전제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체제는 '바뀌는 속성'을 전제한다. 

그런 속성들이 기록된 헌법이 그걸 수호한다. 


좋든 싫든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촌스러운 하늘색으로 칠해진 둥근 지붕 아래 모인 사람들이 정하고 없애고 하는 것들이 

우리의 존엄과 행복을 좌우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가 되는 건 어떨까? (초월없이 가능할까?)


천천히 분노하되 분노에 삼켜지지 않으며

화합을 원하면서 소통하는 걸  포기하지 않으며 

정의를 수호하되 폭력에 취하지 않으며 

사랑을 추구하되 그게 무한한 용인이라고 착각하지 않으며 


피해자이기 때문에 정의가 아니고, 

유약하기 때문에 정의에 편에 서있을 뿐인지 모를 

우리의 정의감이 교만으로 자라지 않도록 조심하며 

우리가 그 자리에서 섰을 때 절대적 올바름을 선택하기 쉽지 않음을 인지하고 

정의구현의 자리에 설 수 있길 바란다. 



......

그리고 

정의로운 선택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어도 

자신의 과오에 대한 댓가로 받아드릴 수 있는

자신의 이익이 잣대가 되지않고 

옳음에게 굴복하는 겁나 멋진 희생자들의 선택을 기대해본다. 




막을 수 없는 여명의 광선 2024.12.07 07:44




-정의에 불타올라 있는 우리들의 불꽃이 꺼지지 않길 바라는 한편

모든 걸 태워버려 파멸의 불로 번지지 않길 바라고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자신의 가족을 가장 사랑하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그 자연스러운 '사랑'이 


더 고결한 사랑에 굴복하여 

무너져 내리길 바라며


옆橫으로 내리는 눈雪과 

아래垂로 내리는 눈雪에 

뒤덮여 새하얗게 되는 겨울이 다시 한 번 찾아오길 바라며 

아니, 이번 봄은 더 일찍 찾아오길 바라며 


빙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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