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상: 역문화적 처방 counter-cultural dignosis
작가들은 특정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작가지망생들이 그 성향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내성, 내향, 감수성, 감정적, 센티멘털, 독서광, 문자중독, 예민함… 분명 평균범주 밖의 아웃라이어outlier가 있을테고, “난 안 그런데?“ 라는 사람은 있을테고, 브런치라는 더 다양한 사람이 모인 플랫폼은 더욱 더 다양성이 부각될 거다.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보면 자주 보게 되는 컨셉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 안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라는 거다.
자신의 감정, 생각, 의식의 흐름, 상황에 대한 반응 등.
분명 글쓰기가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고 기록은 의미있는 개인의 역사가 되기 때문에 유익하다.
하지만 이 글쓰기가 소재찾기를 위해 자신의 과거를 뒤지고, 그 뒤지던 과정 속에서 묻어두면 훨씬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들을 드러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내가 그 글쓰기와 멀어진 이유 중 하나다.
어느 시점부터 난 선택적으로 글쓰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던 기억이 있다.
문자로 정리된 생각은 마음을 맑게 하지만, 문자로 표현된 감정은 마음을 흐리게 할 때가 많다.
무형无形의 것이 유형有型이 될 때, 미적추구美的追求가 개입을 하며 미화美化와 과장夸张, 비약, 심지어 왜곡歪曲이 섞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두면 더 큰 상처가 되지 않을 것도 기록하며 상처 위에 깊은 상처를 조각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글쓰기 조언을 하는 대부분의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 현대철학의 한 흐름인 ‘자기 중요 self-importance’와 ‘자기 위로self-consolation’을 기반으로 한다. 뉴에이지 영성New Age Spirituality와 함께.
정답은 자기만 알 수 있고, 자기만의 것이며,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만의 답, 자신만의
진리personal truth을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거다.
자아탐색, 과거사 탐구가 문제점 찾기에 도움이 되는 건 맞다. 하지만 끄집어내고 토로하고 드러내고 나누고, 그 과거를 헤집는 치료therapy가 정말 해결책이 되는 경우가 많을까?
문제점을 찾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뭔가 알게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뭔가 후련한 것 같으면서도 그 후련함이 유지가 되었을까? 아닌 경우가 많을 거라고 예측해본다.
현대심리학엔 한계가 있다.
자기 신발끈을 들어올려 자기를 공중부양시키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은 많은 지혜로운 이들의 책이나 강의를 접하기 전이니.
하지만 내가 선택한 대응법은 기억의 편집자가 되는 거였다:
잊고 싶은 것들은 굳이 힘써서 기록하지 않는다.
지워질 때가 되면 지워질까 말까 한 걸 굳이 새기지 않는 거다.
가장 깊은 아픔은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만 알면 되는 비밀인 거다.
미래의 어느 날, 기억하지 않을 때 보다 행복해지는 경우도 있을테니, 굳이 이 곳 저 곳 사본을 남기지 않는 거다. 그걸 ‘전체공개public’로 인터넷이라는 비석碑石에 새기는 건 과거의 사건, 상처로부터 “졸업”하는데 과연 도움이 될까?
누군가 날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아주 본능적인 근원적 욕망이 해소되는 건 맞을 거다. 그리고 그 욕구를채워주는 건 자신이 선택한 “드러냄expose”를 통해 소통의 기회를 얻은 타인들 덕분이다. 물론 그 소통의 깊이를 들여다보면 또 공허해지기 쉬우니.
대중은 당신의 현실을 모르고, 당신의 손을 잡아주고, 당신에게 따뜻한 허그hug를 줄 수 없다. 어떤 경우엔 타인이 준 건 사실 위로가 아니라 자기연민의 정당화가 되는 경우도 있을 거고.
내면엔 정답이 없다.
과거가 있을 뿐이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아래로 땅을 파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발이 닿는 무언가를 찾았다면 도약하여 위로 나와야 한다. 그게 늪이라면 아래로 땅을 파라는 조언 더더욱 위험하다.
현재는 눈 앞에.
미래는 더 멀리 있다.
아픈 기억은 굳이 기록을 목적으로 기록하지
않는 게 건강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기억에서 옅어지고
그 위에 다른 기억들이 덮어씌워지고
……. 평범하고 즐거운 일상들 바닥에 깔려있을 때 더 행복해지는 삶으로 향하는 길이 열릴 지도 모른다.
나를 들어올릴 수 있는 힘은 주로 위up나 옆side에서 온다. 내면이 아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열역학적 변화는 폭발인데, 인간이 폭발해서 온전하기 어렵다.
당신에게 일어난 일.
그게 아무리 고통스럽다 한들 과거에 속한다.
몸과 마음에 남아 그 잔향残响을 남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 통제 범위 밖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르다. 우리가 과거의 사건에 어떻게 반응react하는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통해 비로소 과거를 제 위치로 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런 인생의 “법칙”은 다른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높은 건축 구조물을 짓기 위해 땅을 깊게 판다. 하지만 건축물은 위로 짓게 된다. 높이 올라가야 높이 보이고, 비로소 가장 바닥에 있는 문제가 작아보인다. 문제와 멀어졌기 때문에.
물리적 상처가 발생했을 때 생긴 ‘패인 상처’가 딱지가 지고 새살이 차오른다. 새살이 올라온다. 상처를 치유한다고 궤사한 조직을 도려내고 지지고, 계속 파낸다면, 그 과정이 멈추지 않는다면 더 깊은 상처를 스스로 만들어내는데 기여하는 것. 파묻힌 타인이 후벼파지 않는 상처를 그만 꺼내봐야하는 시점이 온다. 온전하진 못하더라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새 살을 위해서.
RISE ABOVE.
문제 위로 올라가야 한다.
상처가 드러나지 않아야 외부자극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기도 하다. 통풍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습윤湿润 상태에서 회복이 빠르니 ‘듀오덤’ 같은 걸 붙이는 거다. 자꾸 떼어보면 아프고, 상처가 잘 있나 찔러보면 아프기만 하다.
어쩌면 마음 속의 상처에게 필요한 건 잦은 안부 묻기가 아닌 작별인거다.
“See you again / 再见[짜이찌엔] / またね[마따네]” 가 아닌 잘가/ Farewell/ さようなら[사요나라]인거다.
수많은 매트리스 아래 콩 하나가 불편했던 동화 <공주와 콩 The princess and a pea>의 공주처럼 잠을 뒤척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매트리스 아래 콩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그 콩을 빼고 편히 자야한다. 그 콩이 있어야 비로소 그 침대가 유니크unique하고 그 위에서 자야 내가 ‘진정한 나true-self’ 라는 둥의 궤변에 속아선 안된다.
늦으면 수십년, 빠르면 십수년이면 달라지는 패러다임에 목매면 안된다. 치료의 패러다임도 그렇다. 자기의 병명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병 찾기”가 시작되어 수많은 병이름을 공룡이름 외우듯 나열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병이 시작될 수도 있다.
뇌가 회복하는 매커니즘인 수면과 망각이 제 기능을 하게 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몸은 잊어야 할 것들을 잊게 하는 거다. 그게 잊혀질 때 그게 잊어도 되는 게 되기도 하고, 그게 나의 정상화를 도모하기 위한 면역회복의 시작이 되기로 한다.
마음/정신을 치료할 수 있는 건 그와 같은 속성인 비물질적인 것이다. 마음을 경구복용약으로 치료하는 접근은 물질주의materialism적 전제가 깔려있다. (물론 드물게 체내体内 생화학적 불균형이나 날씨와 같이 외적요소로 영향을 받는 경우 등이 존재한다.)
그 철학적 바탕, 세계관적 전제와 해석이 틀렸다면 부작용이 있을 수 밖에.
지인이 받은 산후우울증 처방전의 부작용을 읽어보면 불면증부터 자살충동까지 뭘 피하기 위해 뭘 감수하라는 건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목록이 나열되어 있었다.
배우자가 안 도와줘서 힘들면 배우자가 달라져야하는게 일차적 문제해결이다. 사람이 바뀌는 게 하루아침에 될 게 아니니 배우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바꾸고 소통의 변화를 추구하는 게 약 한 첩보다 궁극적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인생의 동반자가 없어서 외로움이 깊어져 마음이 아프면 지극히 정상적인 마음의 반응을 먹는 약으로 치료하겠다는 거 자체가 논리적 분류오류인 거다. 혼자면 외롭고 이해받자 못하면 외로운 게 당연한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같은 차원의 존재들로부터 “옆”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도 많지만, 어떤 이들은 “위”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한다.
“위“에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을 바라보고 도움을 구해야겠다. 허나 이건 개인의 세계관이 전제적前提的으로 부재不在를 가정하는 한계를 마주하기도 하니 보편적인 제안이 될 수 없으므로 여기선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라는 '현실'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소위 '현실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경제적이거나 물질주의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부정적인 의견을 표시한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내가 경험한 과거.
내 지인이 경험한 과거나, 내가 감명 깊게 읽은 '픽션'의 내러티브와 같은 간접경험.
언론매체의 기사에 얻게 된 현재의 문제와 미래 전망.
하지만 궁극적 현실ultimate reality이 단순하 가시적 세계 이상의 것들을 포함한다면?
물리학에선 양자영햑이, 다른 철학과 문학에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어떤 속성이 가르키고 있는 '초월'에 대한 힌트들.
만약 궁극적 현실이 물질세계material world 이상의 보이지 않는 세상도 포함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잠시 자동차의 의인화를 사용한 비유를 해보자.
난 내가 여지껏 가솔린 차량이라고 생각하고 가솔린을 주입시켜 왔는데, 알고보니 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로 설계된 자동차였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거다. 나에겐 또 다른 동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전기충전)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던 게 된다.
위가 나름대로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비유였다면, 미련한 사람에 대한 비유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난 여지껏 가솔린 차량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디젤 차량이었고, 고도화된 요소수를 활용하는 DPF시스템 도 장착된 신형 모델인지 모르고 살아갔던 거다. (그러니 고장이 잦고, 유해가스를 뿜어내던 거일 수 있는 거다.)
현실에 대한 인식.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어긋나 있을 경우, 문제 분석부터 해결방법을 찾는 게 모두 잘못되었거나 부족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심리학에서 종종 얘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건 철학적이기도, 또 어떤 이들에겐 종교적인게 될 수도 있다.
- 작가들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오늘따라 건방진 말투를 채택한 빙산 올림-
P.S= *이 주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조사하고 쓴 글이 생겨 나눕니다.
https://brunch.co.kr/@thewholeiceberg/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