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빙산 Apr 05. 2024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건

브런치 작가를 응원하다 : I don’t know you but……

1. 응원應援


단어는 한자이지만 정작 이 응원(應援)이 단어는 중국어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중국어로 검색을 하면 나오는 결과를 보면 그 어원을 한국과 일본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설명을 한다.


재미 있는 건, 일본어 한자인 [応援:おうえん오우.엔]을 중국어로 쓰면 应援.

‘응應’자의 마음 심心자가 ‘应当응당ought to’의 '응'으로 변하는 마법.

(중국어 간자체는 왠지 모르게 그렇게 단어의 낭만을 앗아가는 경향이 있다. )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건 참 신기하다.

그 사람이 날 몰라도, 그 사람이 날 좋아하지 않아도, 개인적인 선택에 의해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행위.

스포츠팀을 응원할 때는 사뭇 다른 결의 느낌이 되겠지만, 개인을 대상으로 ‘당신을 응원하겠다’라는 말을 했을 때, 그 의미는 이렇다.

당신과 나의 친분의 깊이가 0이든, 현재 이상으로 깊어지지 않더라도, 당신이 하는 일이 잘 되고, 당신의 삶이 행복하길 바란다는 것. (아, 떠오르는 과거의 짝사랑)


지금 응원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건…….


내 삶 속에서 한 부부, 티스토리에서 블로그를 시작하며 두 사람, 브런치를 시작하며 알게 된 세 사람,

(계속 생각하면 또 떠오르겠지만, 아내가 제일 먼저 떠오르지 않은 걸 반성합니다…)


어떤 누군가는 나의 ‘오프라인’ 인생과 맞닿기도 하고, 어떤 누군가는 100% 온라인이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이 ‘랜선의 연縁‘이 종종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하니, 그걸 순순히 온/오프라인으로 구분하는 건 어렵겠지만.


멀리서 지켜본 타인의 삶, 그 사람의 표현을 통해 알게 된  삶에 대한 ‘간략한/얕은’ 이해를 바탕으로 시작되는 공감.

비슷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는 공감으로 인해 시작되는 그 사람의 성공 또는 행복을 바라는 염원.

혹은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건가 싶은 이들이 이미 이뤄낸 것과 앞으로 더 이뤄나갈 것을 기대하며 하게 기다리는 것.


※물론, 브런치스토리에서의 ‘응원’이란 기능은 버스킹 하는 뮤지션에게 ‘관람료’를 던져주는 정도의 느낌이지만. 이 또한 글쓰기의 수익화라는 유저의 바람을 (아마도 어쩔 수 없이) 반영한 운영진의 선택이었을 것 같다.


2. 응원의 사례


(케이스 1) 결혼 후, 몇 년째 아이가 생기지 않아 지방 어딘가 유명한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먹고 첫째 아이를 갖았던 부부. 코로나19의 시대에 태어나 집단활동의 경험이 많이 늦은 편이었던 우리 첫째 딸의 첫 ‘오빠’.의 부모가 되겠다. 같은 구민으로 살아가며 종종 뜬금없는 즉흥적 가족모임을 할 수 있었던 그들은 둘째를 갖고 싶다고 얘기해 왔지만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난 그들을 ‘응원’했다. 그들의 소원이 이뤄지길 바라며.

어느덧, 그들은 그 사이 삶의 터전을 캐나다로 바꾸고 쉽게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는데, 최근에 연락이 왔다. 초음파사진과 함께.

(그들의 간절함을 느낀 적도 공감한 적도 없을 만큼 그들은 쿨-하게 자신들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안 생기면 말지-. 어쩌면 내가 가장 권장하고 싶었던 태도이기도 하다.)


(케이스 2) 결혼 후, 몇 년째 아이가 없던 친구 부부가 있다. 초기 유산이라는 아픈 경험을 가지고 아픔과 조바심을 가지고 준비하던 그들.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결혼 N연차, ‘현재’를 수정하고자 그들은 의학적 도움을 받는 길을 선택했고, 21세기 과학의 힘을 빌려 새로운 심박을 이 세상에서 울리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아직은 초음파를 통해 들어야 하는 작은 소리이지만.

이 부부를 대하는 나의 마음엔 케이스 1의 경우보다 더 따뜻한 응원이 있었다. 그들의 간절함을 알고 있었으니.

물론 간절함을 알기 때문에 응원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두 부부 사이의 각자 가정에서 겪는 ‘문제’들을 열고 나누기도 했고, 살아온 삶의 어두운 부분을 나누는 자리가 있기도 했다.

분명 나의 친구는 그 부부를 이루는 한 구성원이었지만, ‘부부’라는 하나의 단위로 우리 가정과 친구 가정은 다른 ‘엮임’이 있는 구조의 우정을 쌓아가게 되었다.


(케이스 3) 분명 글을 쓰기 위해 시작한 브런치인데 글 잘 쓰는 이들이 적은 문장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게 또 인스타그램 이상의 ‘시간포식자’가 되고 있다. 글 쓸 시간이 읽는 시간으로 대체되는 게 아쉽지만, 그 시간의 소모 속에서 ‘브런치작가 대상’을 수상한 이의 삶 속에서 내가 걸어온 삶을 보고 또 그 시절 내가 겪었던 비슷한 감정을 읽고 있자니, 염원을 담아 응원하게 된다. 과장을 더하면 ‘과거의 나’를 응원하는 건지, 만난 적 없는 ‘당신’을 응원하는 건지 구분이 안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작가가 걸어온 삶을 읽으며 내가 극복해 낸 과거를 곱씹어보기도 하고, 그 작가에게는 있고, 나에게 없는 것을 보기도 한다. (부러움의 개념이 아니라, ’ 다름‘의 개념이다)



3. 케이스 3에 대해


감히 ‘우리’라는 단어로 그 작가와 나의 삶을 '엮어'봤다.


(1) 나도 이방인의 삶을 살았고, 나도 외로움(loneliness) 대신 고독(solitude)을 선택했다.

내 선택의 시점은 중학교 시절이니, 그 작가보다 훨씬 일찍이 었겠지만, 시기가 중요한 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해외생활 중에 한국인들간의 교류가 더 정서적 만족을 줬을 것 같지만, 중국에서 살면서 한국인들과 한국어로 대화 하는 게 비효율적,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체류자(sojourner)로서의 교류는 늘 끝을 염두에 둔다. 그 관계가 지속적이지 않을 거라는 걸 가정하지만 현재를 소중히 여기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조급해보일 수 있는 속도로 다가가기도 했다.


(2) 다른 게 있다면 완벽주의.

어린 시절 시작된 비자발적 해외생활은 제일 먼저 ’ 자존심을 구기는‘ 경험에서 시작하게 했다는 것.

미리 그 나라 언어를 배워온 게 아니기 때문에, 나를 빼고 모두들 이해하고 알아듣는 환경.

갑자기 지능이 낮아진 것 같은 경험에서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나에겐 ‘완벽주의’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엘리트’ 의식이 자랄 수도 없었고, 뚜렷한 목표의식과 성공에 대한 도전의식이 자라기보단 적응과 생존에 대한 도전이 우선이었다.


(3) 사랑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던 것도, 실패와 실망과 포기와 초월 비슷하다.

하긴, 어떤 누구의 삶 속에 사랑에 대한 실패와 실망이 없었겠나 싶긴 하다.

이건 소위 어른이 되는 과정이니.


(4) 부모가 자기 자식보다 타인을 우선으로 했어야 하는 가정환경도 유사하다.

나 역시 아버지의 ‘직종 변화’, 혹은 ‘커리어 체인지career change’에 초등학교 1학년에 삶의 궤도가 달라졌으니.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그 궤도의 삶 속에서만 얻을 수 있었던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 감사라는 태도로 바라볼 수 있다.


(5) 오랜 시절을 공유한 친구의 부재 또는 희소성이란 것도 있다.

주민등록표 초본을 떼어보면 4페이지,까지 나오는 나의 주소지 변경이력.

주민등록표 초본

최종번호가 38번. 독립하기 전까지 33번, '통반변경', '지번정리' 등의 행정 절차를 제외하면 출생 후 23번의 주소지변경이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여행욕구가 극히 낮은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해외에서 생활하는 동안의 이사를 포함하지 않은 게 이러니 '늘 함께한' '동네친구', '소꿉친구'의 개념을 적용시킬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케이스 2의 친구부부의 과거를 들었을 때도 들었던 생각이지만, 만약 그 시절 내가 그 작가가 나의 친구였다면? 가끔 만나고 얘기하며 밥을 먹고 인생을 나눌 수 있는 친구였다면?

나의 존재는 나의 응원은 그 작가의 삶 속에서 어떤 힘이 될 수 있었을까?

애당초 이렇게 세상을 향해 일기장을 펼쳐 놓고 살아가는 작가의 마음이 0과 1이 구현해 낸 텍스트를 읽었다고 내가 그 작가의 삶을 ‘알아가고 있다 ‘라고 느끼는 것도 순간적 착각이고 새벽의 감성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지만.


브런치라는 특수한 플랫폼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감대가 이런 거겠다.

워낙 감수성이 풍부하고 표현에 능한 이들의 회상을 통해 나에게도 퍼지는 울림.

군생활도 하고, 직장생활 10년 이상하며 맨정신으로 감수성이란 걸 유지하는 게 흔치 않은 게 직장인 남성의 삶인데, 육아에 브런치까지 '정서적 회춘'이라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4. 자기 응원의 필요성


살아가다보면 '나를 위한 응원'도 중요하다.

이건 비생산적인 자기연민으로 빠지기 쉬운 '자기 위로'와 다른 결의 행위이다.

타인의 칭찬에 자기 기분이 좌우되거나, 자신의 가치 평가를 타인의존적이 되게 하면 삶이 '연약'해지기 쉽다.


다듬은 글만 내야지-라고 생각하며 준비만 하고 있지만, 브런치에 올릴 글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고 나니, 혼자서 기획회의, 편집회의를 하다가 지치고 실제로 적히는 글이 줄어들고 있다.

'블로그는 ’ 알리고 싶은 이야기’가 위주라면, 브런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고민에 고민. 그러다가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읽는 시간만 늘어간다.

작가 ‘머신러너’가 쓴 것처럼 (그 이전에 조던 피터슨이 말한 것처럼) 글을 쓰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면, 난 생각을 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게 되겠다.


그리고 그 생각하는 과정 중에 누군가를 응원하는 나-를 주제로 글을 쓴 게 된다.


사실 쓰고 싶은 주제는 많다.

에버노트에 쌓여만 간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다.

최소한의 수면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평소엔 걸리지도 않을 분더러 하루 이틀이면 나을 감기를 5일 넘게 달고 있었던 것도 사실 브런치작가 됐다고 잘 시간에 안 자고 글 쓰겠다고 ‘나댄’ 결과이다.


생존을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시기.

그리고 난 이 계절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응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작가를 위한 (정신)승리법(2): 불행을 비교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