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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산 Apr 11. 2024

브런치작가를 위한 (정신)승리법(2): 불행을 비교하다

가지지 못한 자의 불행 vs 가진 자의 불행

「不幸自慢するな!
불행 자랑 하지 마!」

-(만화) 허니와 클로버 중-


1. 대학생 시절, 지인의 추천으로 전혀 취향이 아닐 거라 생각했던 애니메이션을 봤다.

만화 ‘허니와 클로버’를 원작으로 둔 애니메이션이었는데, 미대생들의 삶을 배경으로 청춘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유쾌한 천재 캐릭터부터 재능과 사랑에 대한 고민을 하는 평범하고 진지한 캐릭터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주인공들이 겪는 이야기였다. 당시 좋아하던 밴드의 음악들이 많이 삽입곡으로 나온다길래 일본어 공부 겸 애니메이션으로 시청했던 기억이 있다.


위의 대사는 주인공도 아닌 몇 페이지 안 되는 분량에 그려진 인물을 혼내는 목조 건축 장인 할아버지가 부모 없이 자란 손자뻘 직원을 혼내는 대사였다.


그 대사가 그때까지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은 삶에 대한 태도를 깨닫게 했던 기억이 있다.

가난하다는 단어를 쓰기엔 부족한 것 같지만, (그 역시 ‘삶의 기준standard’가 낮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부유함보다는 훨씬 ‘부족함’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다.

아버지께선 직장동료에게 연대보증을 서고 채무자가 되었고, 안정적인 수입이 있던 시절 경제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터라 그저 자산이 감소한 게 아니라, 없는 삶에 빚이 생긴 거다. ‘원래 잘 나가던 집안이 쫄딱 망한 케이스’랑은 또 다른 그저 그런 ‘보통’의 집안(차도 없고 집도 없는)이 빚이 생긴 거니, 어떻게 비교할 게 없다.

조부모님들의 형편도 딱히 뭘 도움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가난의 대물림‘을 극복하려던 아버지의 삶에 치명타였을까.


그 시절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치킨은 생일날 먹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아버지는 생일 선물로 축구공을 사주셨다.”?

“작은 이모가 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주시겠다고 했다. 하지만 난 ‘이건 너무 비싼 거니깐 안 먹어도 괜찮아요’라고 하며 거절했다.”


그래도 부모님 모두 건강하셨고, 난 내가 가난하다고 주눅들었던 기억이 없다. (아, 아이스크림 안 먹겠다고 한 건 주눅 들었던 건가?)

굶은 기억은 없었던 것 같으니 극빈층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아버지께서 직장을 그만두시고 대학원에 들어가시면서 ‘빚 + 수입 감소’의 희한한 배경도 겹쳤다.

리스크 회피 성향의 내가 당시의 아버지의 선택을 돌아보면, ‘아니, 가장으로서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따져야 하는 건 아닌 가 싶기도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선택이었으니, 내가 뭐라고 할게 아니다.


아무튼 사회계층으로 나눠보자면 집도 차도 없었다.

기억하는 초등학교시절 전세집1 ’산기슭, 화장실은 거주 공간 밖이지만 대문 안‘, 전세집2의  ‘평지, 빌라 2층, 노모와 거주하는 50대 노총각 아들과 같은 현관문을 공유하고 거실에 플라스틱 커튼이 있어, 우리 가족이 살던 방 하나 + 주방+ 베란다 +화장실’, 전셋집 3, ‘반지하라고 하기엔 10분의 1만 지상인 지하, 작은 방 3, 화장실 1’ …


당연히 ‘없는 자’에 좀 더 공감하고, 사회 정책이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것 같은 상황에는 반감을 가지고 있다.


2.

지난 글에 어떤 분이 남겨주신 답글:”적어도 그들은 가지지 못한 자의 불행을 겪진 않겠지요. “

사실 그분께 답글을 달려하다 그 작고 검은 공간에 쓰는 것보다, 크고 흰 공간에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쓰고 있다.


그분의 삶에 어떤 역경이 있었고, 얼마나 ‘없는지’ 모르는 내가 어떻게 이야기해야 ‘반박’이 되지 않을까.

오늘의 글이 지난 글의 배경이자 함께 부연설명이자 확장이 되면 좋겠다.


난 직장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가지지 못한 자의 불행’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물론 경제적 빈곤은 절대적 불리不利가 되기 쉽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 경제적 빈곤을 극복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어 좀 더 넓은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사회인이 되자 더 확실해졌다.


‘가진 자들의 불행’도 확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해방 전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었던 ‘참전용사’라는 분류에 속하는 할아버지.

친척이 ㅇㅇㅇ 장군의 ㅁㅁ여서 원래대로라면 어떤 경제적 혜택을 얻었어야 하나, 가족 중 누구가 그 권리를 독점하여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 할머니.‘

재산이랄 게 없는 두 분의 장례식.

화환이란 게 많아봤자 죽은 이들에게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회사생활을 하며 참석한 장례식들의 풍경과 사뭇 달랐다.


타인의 삶에 디테일을 듣기란 쉽지 않다.

의외로 그 디테일은 언론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유명인 (연예인, 재벌 포함)의 삶에 대해서이다.

그 디테일은 내 삶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으니 상세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친한 친구의 삶은 조금 더 가까이 느껴질 수 있겠다.


어디에 땅이 몇백만 평 있고, 서울에 건물이 몇 개 있는 할아버지를 둔 친구의 이야기이다.

재산 때문에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고, 경제력을 통해 아버지를 통제하려고 하시던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공증까지 받아둔 유언장은 할머니가 공개하지 않고, ‘-카더라’로 임의로 재산을 분배하시기로 한다.

유족들은 재산이 많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누가 더 많이 받네 하며 가정의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없는 자로 돌아가신 나의 조부모님들’의 장례에는 없었던 분쟁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의 삶 속에도 있을 거다. ‘재산 때문에 의절한 가족들’


‘나눠가지겠다고 싸울 거라도 있으면 그게 더 좋은 거지’!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건 결국 ‘무엇이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바탕이 된다.


‘가족 간의 화목’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가난이 그 화목에 이바지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반면, 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화목이 밥 먹여주나’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돈도 많고 화목한 집안도 있겠지요)


재벌 집안에 시집/장가가면 ‘부의 대물림’을 기대할 수 있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부는 무엇을 주기만 하지 않고 가져가기도 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줄 땐 조건을 제시한다.

어떤 걸 주면 대가를 바란다.

(결혼할 때, 가정의 독립적인 운영을 위해 일체의 양가 경제적 지원을 거부한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 간의 지원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제적 지원 뒤에는 ’ 여기엔 내 지분이 있다 ‘라는 생각이 합리화되기 쉽다.

(부모님께서 신혼집 장만에 기여하시면 그 기여도가 나중에 ’ 내정간섭‘의 합리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계심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독립적 의사결정권과 자유의지 행사권이 제한받게 되기 쉽다.

두 연인이 결혼을 하는 것을 ‘한 집안이 이뤄낸 경제적 업적에 누군가 무임승차를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여러 제약이 생기며 통제가 들어오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3.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한 말이 떠오른다.

모든 성공은 시험이다


어떤 이는 가난을 극복하고 성공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부 때문에 실패하기도 한다.

성공의 정의를 ‘경제적 번영’으로 제한하면 위 문장의 후반부는 비문非文이자 모순이다.


만약 어떤 경제적 성공이 정신적 실패로 이어진다면, 그건 성공이 아니다.

만약 어떤 경제적 실패가 정신적 성공으로 이어진다면, 그 실패는 ‘실失’보다 ‘득得’이 될 수 있다.


물론 경제적 실패가 정신적 실패로 이어지는 사례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필연적 인과관계라고 믿지 않아야 ‘돌파’의 가능성이 자라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일푼으로 자수성가 한 이들이 하기 쉬운 ‘너도 할 수 있어. 나처럼 열심히 하면 돼-‘ 의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같은 조건에 같은 노력으로 같은 (경제적/학문적) 성공을 얻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 게 현실의 일부니깐 말이다.


돈 많은 남자를 만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사는 걸 목표로 환승연애 후 결혼을 한 친척어른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우나 정신적으로 피곤한 집안’의 시댁과의 삶을 한탄하는 걸 들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아마 부동산 열풍, 비트코인 광풍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간과하기 쉬운 유혹이 아닐까 싶다.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만큼이나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다.

출생 배경과 지나가버린 과거의 대부분은 통제 밖의 변수이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는 조금 다르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과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미래는 현재의 궤도수정이 영향을 미치는 ‘미지의 영역’이다.


오늘의 나의 선택이 0.1도의 방향전환을 일으킨다면, 그게 1년 후, 5년 후, 10년 후의 궤도와 큰 차이가 발생한다.

만약 매일의 선택이 매일 0.1도의 방향전환으로 이어진다면, ‘이번 생은 망했다’라고 생각하는 현실에서 ‘유턴 u-turn’하는 미래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게 ‘(정신) 승리’라는 자조적 단어를 선택한 이유이다.


워런 버핏은 돈이 많기 때문에 부자가 아니라, 워런 버핏이 어떤 사람인가-라는 그 캐릭터 (삶의 철학과 행동)가 나은 결과가 ‘부’인 거다.

어쩌면 로또 당첨자들이 대부분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게 이 반증이 될 수 있겠다.


‘흙수저’. 언론기사가 만들어낸 ‘유행어’를 자신의 한정된 틀로 국한하지 않는 게 첫 단추일지 모르겠다.

남의 수저와 내 수저가 다른 것만 비교하는 건, 미래를 바꾸는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나의 현재를 불행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감사의 태도’가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데 첫 단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흙수저’인 나”와 “죽은 거부 (워런 버핏의 파트너) ’ 찰리 멍거‘”보다 나은 점, 감사할 수 있는 부분.

그 영역을 찾아내고,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힘. 그 힘의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악마가 이런 질문을 한다고 상상해 보자.

찰리 멍거의 유산을 지금 줄 테니, 내일부터의 모든 수명을 반납하시겠습니까?


답변이 아니요-라면, 옳은 방향에 대한 자각이다.

아직 살아있는 워런 버핏이 말했다.


Money has no utility to me. Time has utility to me.

-Warrent Buffet-
(2016년 한 인터뷰에서)-


“돈은 나에게 효용가치 utility가 없어요’라고 한 워런 버핏.

그리고 그가 말했다. 시간이 그렇다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겐 그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이 고통의 연장선에 있더라도, 그 생명의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이지요.

고통도 살아있어야 느낄 수 있는 걸 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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