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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산 May 17. 2024

사랑: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하길

대전후기: 사랑하는 두 사람, 왜 싸우는가? 육아의 전쟁

[아이의 말]

(약 4개월 전 - 만3.5세 가명:사야)‘

(동생을 때렸나 물건을 뺐었나 해서 혼나던 중)
“왜 우리에게 자꾸 이런 슬픈 일이 생기지?”

(지난 몇일간 혼나면)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나봐..”

 -사야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줘야 사랑하는 게 아니야.
사랑하니깐 안 되는 건 안된다고 알려주는 거야.

만약에 아빠가 사야가 잘못한 게 있을 때도,안 사랑하면 계속 잘못하게 내버려둬.
그럼 그 사람한테 좋을까 나쁠까? ’
”…“

-사야가  계속 나쁜 일을 하게 두면 아빠는 사야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야“-

그치. 아빠가 사야를 사랑해서 혼낼 때도 있는 거야.
(안아준다)


[Writer’s Now]

(2024.05.15-05.16 달이 떠있는 어느 시간대) 몇 시에 일어났는 지 적어놓으면 아내에게 혼날 것 같아 알리바이 확보의 가능성을 위해 생략합니다.
휴일 덕분에 연재글을 미리 쓰기 시작했는데, word count 2600…이번엔 퇴고 하면 줄을까요?


[아내의 말]

…예전엔 싸우면 ‘이 사람이 날 안 사랑하는구나’ 생각했는데, 요즘은 ‘이 사람이 날 사랑해서 그렇구나’ 하고 알아.



1. 2024.5.16 새벽


석가탄신일을 불화로 시작하고 아이들의 울음 속에 마무리할 뻔했지만.

다행히 마지막 순간은 책을 읽어주며 평화로이 잠들었다.


오늘 읽은 이야기는 장화 신은 고양이.


화풍이 맘에 안들어서 안 집게 되는 책인데 아이들이 가져왔다.


‘오늘은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읽어줘’

(자기 몸통을 다 가리는 책을 둘째가 가져온다.)


양치하고 침대에 가니

첫째는 이미 대여섯권의 책을 침대위에 펼쳐두고 있다.


‘…두 권도 못 버티고 잘 거면서…’


저 책들은 내 숙면을 방해하는 지뢰가 되어 발에 치이고 허벅지에 깔릴게 분명했다.


책 읽어주고 잠들면 안되는데.


어제도 새벽에 일어나 연재글 준비를 했으니 좀 피곤하다.

다행히 석가탄신일이라 쉬는 날.


역시 잠들어버렸다.


2. (2024.05.16 새벽)

잠들었는데 임사체험…이 아닌, 임사몽(near-death dream)이라고 해야할까.


꿈에서 내가 몰던 차가 유턴하는 거대한 트레일러에 부딪혀서 도로 옆 바다인지 강인지 모를 깊은 물에 빠졌다


’물이 다 차고 나면 수압 차이가 줄어들어서 문을 열수 있다고 했지‘


생각하면서 물이 차오르는 걸 기다릴려고 했는데

차는 자꾸 깊은 암흑으로 빨려들어간다.


결국 꿈 속에서 탈출 시뮬레이션은 못하고 깼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절대절명의 순간(일수도 있었던 순간) 조차 위기에 당황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


목요일은 오전에 아이들 활동에 같이 참석하고 오후에 출근한다.

아침에 일어나 꿈 얘기를 했다.


아내는 말하기 싫은지 한동안 침묵하다가

한마디 던진다.


“자기 전에 뭘봤길래 ”


- 자기 전에 영상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됐는데


표정이 뚱하다.

하긴, 우리 석가탄신일 휴일 아침부터 싸웠지.


너무 너무 싫다.

휴일 아침부터 감정이 어긋나서 반나절 내지 한나절을 허비하는 건.



3.

피터/페드로/베드로 란 사람이 쓴 편지에 부부들에게 한 내용이 있는데 이런 말이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요지는 ‘(부부 간에) 화 난 상태에서 자지 말아라’,’화 풀고 자라’.

어떤 곳에서는 ‘(부부 간에) 따로 자지 말고 같이 자라 (각방쓰지 말라는 말로 해석 가능)’ 라는 말도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어떤 일로 싸우게 되면 오해를 빨리 풀고 싶은 나는 계속 설명을 하고 이해 받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아내는 표현능력이 특화된 사람이 아니라 말이 길어질수록 헛… 아니,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다가 감정폭발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감정을 다스려야 하는 대상으로 보고 근 20년간 ‘마음줄’을 놓치 않으려 노력한 남편.

감정은 따라야하는 대상으로 봐야한다는 21세기 미디어에서 내뿜는 철학이 자기도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아내.


화라는 게 그저 감정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몸의 여러 기관들이 안 좋게 반응한다.
안 좋은 물질이 생겨나 몸을 상하게 한다.테크니컬한 디테일들은 생략하고 요약해서 말하자면 생리학적으로도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건 좋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기분 나쁘게 해서 화가 났다면, 그 화는 계속 가지고 있는 사람의 손해이다. 그 대상이 둔감한 사람이라면 더욱 억울한 상황일테니 ‘이기기 위해서라도’ 그 화를 다스려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봐온 디즈니 콘텐츠부터 어른이 되서 봐온 헐리우드 콘텐츠까지 대부분의 영화는 ‘Follow your heart’ , ’네 마음 속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 목소리를 따라’ 라고 가르친다.

나이에 따라 짧게는 십수년, 길게는 수십년간 주입식 교육이 아닌 잠재적 세뇌를 거쳐 그걸 ‘진리’라고 받아드리게 된다.


자신의 ‘마음’, ‘감정’을 지상 최고의 기준으로 삼게 되면 큰 문제가 생긴다.

어떤 대립 상황에서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는 건 물론이고,

모든 갈등을 ’의견1 vs 의견2’의 대립이 아닌, ‘옳은 나’와 ‘틀린 너’의 대립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의견의 충돌’이 아닌 ‘나 vs 너’의 구도가 되면 ‘내가 지거나 네가 지거나’가 되기 때문에

‘지기 싫은 사람’은 의견의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지지 않기 위해 싸움을 계속하게 된다.



4. 어느 유대인 랍비의 말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개념.

‘감정’은 나를 미련한 길로 데리고 가려하는 고집 센 당나귀.

지혜로운 길로 나를 데리고 가려는 건 ‘머리’ 혹은 ‘지성’.

‘나’는 당나귀를 타고 가고 있단다.

‘당나귀emotion’가 나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려 하면, 난 ’이랴 이랴‘ 하며 옳은 방향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거다.

물론 우릴 옳은 길로 가게 하는 ‘직관’과 구분해야한다.

난 당나귀를 몰고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 랍비가 전한 유대인의 지혜가 맞다면 그녀도 당나귀를 타고 있는 걸텐데

그녀가 타고 있는 건 당나귀가 아니라 종종 야생마인 걸까.


아내는 좋은 사람이다.

절대로 악의에 가득차거나

늘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하루 종일 불평을 달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복잡하디 복잡한 나에 비해서지만) 단순하지만 순수한 사람이고

자기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잘하려 하는 사람이다.


결코 언젠가 아내가 나의 브런치 계정을 보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와 다른 깊이의 사유를 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으로 오래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 가정에서 그런 부모님들을 통해 길러지고 여러 문화콘텐츠를 향유하며 지금의 행동 패턴과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 모를 철학을 살아가고 있는 것 뿐이다.



싸움은 언제나 쌍방과실이다.

정말 절망적 상황의 중독자를 마주하고 있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싸움의 과실비율은 (사고의 보험처리를 빌리자면) 적어도 한 사람이 5% 다른 사람이 95%일 거다.

서로 자기가 5%라고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99%라는 게 함정.

(참고로 대한민국의 보험사 기준은 보행자가 야간에 검은색 옷을 입고, 신호등이 깜빡이고 있던 순간 횡단보도에 들어갔다면 차량이 보행자를 치더라도 보행자에게 과실이 있다고 해석한다. 그렇게 20%의 과실비율로 교통사고를 경험한 임신초기의 신혼부부였던 글쓴이의 경험이다)


결혼 후, 지금까지, 거의 모든 다툼의 끝은 남편의 사과로 시작됐다.

’계속 이러면 이 사람은 언제 자기 과실을 인정하게 될까?‘ 란 우려가 스멀스멀 올라오더라도, 짓눌러야 한다.

’ 아니, 언제나 잘못을 타인으로부터 찾으려고 하면, 본인은 언제 성장할 수 있을까?‘

우려스럽지만, 일단 평화를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

전쟁엔 민간인의 피해를 수발한다.


지금의 경우, 노약자 중의 어린이다. 그것도 유아.


5.

사야가 말을 곧잘 하게 됐을 무렵, ’아이는 부모가 싸우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는 속설을 확인하게 됐다.

화가 나도 (아니 화가 잘 안난다) 언성을 높이길 싫어하는 나와 화가 나기 전부터 목소리가 커지는 아내.

’난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어‘ 부터 ‘난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까지

녹취록이 없으니 입증할 수 없는 나의 결백을 호소하던 중.


사야*가 엄마에게 말했다.

첫째로 표현해온 아이에게 채택되지 못한 이름 후보 중 하나를 가명으로 부여한다.


‘엄마, 미안해. 싸우지마‘


눈치없는 남편은 그 주둥아리를 다스리지 못하고 한마디


’정말 그렇네. 부모가 싸우면 애들은 자기탓으로 생각한다더니‘


이런. 오발탄 misfire.


종전선언이 가능한 순간을 그렇게 뒤로 미루게 되었던 적도 있다.


이건 어디까지 과거 전적 중 한 에피소드.


어제, 아니 어느덧 그제의 교전의 흐름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분석형 남편은 아내의 폭발원인을 외부요소와 내재요소로 구분한다:


1) 외부요소: 환경

- 아이들의 장난감, 책이 거실에 너저분하게 널려있고, 우리는 그걸 정리하는데 시간을 할애할 여력이 없다.

 - 아내는 정리정돈 되어 있지 않은 환경에서 화가 부글부글한다.


2) 내재요소: 그녀의 사고법

 - 부부갈등 발생시, ’아내의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 화가 나면, 화를 나게 한 대상이 100% 과실이라 생각한다


[글쓴이의 지금] 이런. 그새 ‘나를 위한 글쓰기’(=에세이) 단어 카운트가 1000을 넘었고, 블라인드 넘어로 해가 밝았다. 어제도 머리를 못 감고 아이들 사이에서 잠들었다가 둘째(가명: 지은으로 확정) 의 이단옆차기를 두부(head)로 받으며 새벽에 깼다)

전투의 결과와 종결은 수신제가(修身齊家) 후 계속하기로 한다.
아니, 집안 상태를 뜻하는 ‘제가‘는 평일에 회복하기 어려우니, ’수신‘만 일단.


갈등해결을 위한 협상가로서의 마인드를 굴려본다.


1) 원만한 화해를 막는 요인

- 아내는 종종 내가 아이를 우선으로 하느라 자신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 아내가 구도를 이렇게 해석하면 남편이 고려해야 하는 건, 남편vs아내가 아니라, 아내인가 아이들인가의 양자택일의 LOSE/LOSE 상황을 강요 받는게 된다.


'둘 다 빠지면 누구 구할래?'

(우리의 경우, 넷이겠지만)


둘 다 구하지 못한다는 전제는 처음부터 하지 않아야한다.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자 마지막 탈출구이고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더라도 절대절명의 상황엔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 밖에 없다.


2) 통제할 수 있는 원인 분석

- 타인의 감정과 사고방식은 단기간에 변하지 않는다.

- 하지만 내가 다스릴 수 있는 건 나. 나를 바꿔야 한다.


칭찬을 기대하는 아내에게 '인정의 말'을 주지 못했고

자신도 잘못을 알 법한 상황이었음에도 굳이 부정적인 피드백을 줬고

아내가 하고 싶어하는 패밀리침대의 재결합이 미뤄지고 있고

드레스룸을 만들고 싶어하는데 가구 옮길 시간이 안난다.

(어린이날 연휴 때, 마지막 날에서야 혼자 시스템 행어를 옮겨서 옷을 정리하긴 했지만 본인이 만족하는 그림이 아니다.)



6.

안다.

부부싸움의 디테일은 적으면 적을수록 기록자가 초라해진다.

글쓰기는 무형의 생각을 글자라는 유형의 것으로 바꾸는 과정이기에 본의 아닌 자아성찰의 효과를 늘 수반한다. (자기연민 성향이 너무 강하지 않다면)


조던 피터슨 토론토대학 심리학 강의 중, 한 마디가 떠오른다.

배우자에 대해서 험담하는 사람은 '난 멍청한 사람입니다'. 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안나 추후 확인되면 정정 예정)


아무도 우리 보고 결혼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



사실 대부분의 싸움은 내 안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면 시작되기 전에 종료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다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툼으로 이어지는 상황의 가장 단순한 이유: 우리의 피곤.


 '내가 말을 좀 더 예쁘게(?) 상냥하게, 따뜻하게 했으면 됐을텐데.'

 '아내가 실수한 거 못 본 척 했으면 됐을텐데.'

 '모를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7. 파트 2까지 나눠서 갈까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남편이 잘하면 됩니다.

아내가 울면 남편이 잘못한 겁니다. (제가 정한 house rule)


사과하고

잘해야죠.


아내도 아이들과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남편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내의 연약함을 실감하는 걸 잊게 되지요.



먼저 수그릴 수 있는 강함.

그 강함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

그게 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 지혜.


사랑해서 함께 하는 두 사람에게 중요한 건

어느 한쪽이 이기고 상대편이 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계속 함께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살아내는 거다.



사랑하고 계신 분들 모두

힘.내.세.요.


(급 마무리)


P.S= 아, 문단2의 임사몽临死梦

결론에 써야지 하고 던져놓고 삼천포로만 가고 있었던 걸 발견.


생애에 대한 애착이 청소년시기부터 아주 아주 적었다.

소중하다고 (착각하던 것일지라도) 여겼던 것을 놓아야 했던 경험의 반복

원하던 걸 손에 얻지 못하는 경험의 반복

그 패턴들이 만들어낸 마음의 태도일까.


오죽하면 올해 생일일기를 적으려던 내용이 아래 저장글에 얼핏 보이는 분위기였다.

올해 생일 밤에 적었던 브런치 서랍 속 글 화면


결혼 후에 달라졌다.

가볍고 가볍다고 생각했던 내 생명의 무게에 아내의 따뜻한 무게가 얹혀졌다.

그 위에 하나, 둘, 셋.

이제 네 명의 무게가 내 가벼웠던 삶에 대한 애착을 꾹꾹 눌러주는 닻이 되었다.

그들이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건 다른 글에서 다뤄볼 날이 있을거에요)


내 생명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날아가지 않도록 눌러주고 있는 문진(文鎭/paperweight)


여러분들의 문진은 무엇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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