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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산 Jun 07. 2024

열熱, 화火, 인忍, 애爱

대전후기(2): 바이러스와 싸우고, 사랑하는 그대와도 싸우고

1. 견공(犬公)도 안 걸리신다는 오뉴월 감기였던 걸까?

군 입대 후, 훈련병 시절 폐렴으로 40도를 경험해본 적이 있다.

그래서 내게 38-39도 사이의 열은 딱히 힘들다고 표현할 만한 건 아닌데, 이게 36시간이 지속되니 좀 어지럽기도 했다. 밥이라도 잘 먹으면 될텐데, 이번엔 말단 소화기관에도 문제가 있었다. 기침과 콧물이 없었으니 세균성/바이러스성 무엇과 싸운 건가?

내 지적호기심은 어차피 병원에 가도 알려주지 않으니 면역력 테스트를 했다.

열은 생체시스템 안의 염증에 대한 반응이고, 면역 반응을 활발하게 한다.
면역체계는 열을 느낍니다.

열은 그냥 단순히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면역기관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증거.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아세트아미노미펜으로 체온만 낮추면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아마추어적 생각이다.

 

출처 https://bio.libretexts.org/

코로나19랑 직장인 3년차 되던 해의 급성독감(?) 때 말고는 감기약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해열제도 마찬가지. 이번에도 안 먹었는데, 열이 꽤 오래 갔다. 아프다고 낮잠을 잘 수도 없고… 밤잠도 잘 못자고…연재도 하고 싶고… 10만 독자의 작가도 아닌데 ’연재를 쉽니다‘ 라고 적어봤자 누가 ……아쉬워하겠는가! 기왕이면 휴재공지는 독자들의 원성을 들을 수 있을 때 하고 싶다.



2. 둘째는 올 봄부터 열이 나면 한숨자면 회복 완료하는 멋진 체력의 꼬마아이다. 첫째는 둘째만큼은 아닌데 이틀 안에는 열이 떨어진다. 의사표현이 정확해져가면서 병원 방문에 대해서도 선택권을 주기 시작했다.


올 봄부터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일 년에 두 번 걸릴까 말까 했던 감기를 매달 얻어온 사야. (아, 가명으로 부르기로 한 걸 잊고 있었다) 병원 가는 걸 무서워 하는 아이가 아닌데, 소아과에서 콧물 흡입기를 해주신다는 게 엄청난 공포를 심는 계기가 되어 병원 방문을 거부하게 되었다. 사실 감기는 약으로 고치는 게 아니란 생각으로 수십년 살아왔던 사람으로서 드디어 아빠 같은 삶을 살 선택지를 준 거다.


만 세살 이전엔 말도 잘 못하는 애가 자다가 기침하고 깨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그런 밤이 3-4일 계속 되니 자다가 깬 아이를 안고 다시 재우는 내 체력도 문제가 된다. 늘 하루 이틀 버티다가 아내의 등쌀에 떠밀려 아이와 함께 소아과에 가서 약을 받아왔다. 그리고 늘 드라마틱한 해소없이 약을 먹어도 비슷하게 몇 일 더 감기증상이 있다가 끝났다.


만 3세도 됐겠다. 유치원생도 됐겠다. 아빠의 과학실험에 동참한 사야.

“병원 갈래?”

- 아니

“그럼 병원 안 가고 감기 낫기 해볼까?”

-응

“그럼 꿀 먹자.”

- (이상한 표정)

“그럼 병원 가서 약 받아올까?”

- 싫어

“ 그럼 꿀 먹으면 빨리 나을 것 같은데…”

- 먹을래



감기: “병원 가면 7일, 안 가면 1주일”설을 드디어 실험할 수 있게 되었던 3월.


3월 초에 감기시작.

꿀도 먹고, 과일도 먹고, 배도라지즙도 먹고, 자기 전엔 아이허브에서 구매한 유칼리툽스 체스트 밤도 바르고.


2024년 감기 1호는 그렇게 6일 머물고 7일째 되던 날 증상이 없어졌다.


4월 초에 또 찾아온 감기 2호는 5일.


그리고 이번 5월 말에 찾아온 감기 3호는 2일 열이 나고, 2일 기침 후, 종결.


아빠는 감기 실험에 대해 꽤나 만족한다.

드디어 아내에게 감기 때문에 애들 병원 안 데려다도 된다고 주장할 근거 실험데이터가 쌓여가고 있다.


주변에 친한 부모들에게도 유칼리툽스 체스트 밤을 선물하며 경험담을 공유한다.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감기로 병원을 안 데려가는 부모는 아직 우리 가정이 1호.


아니, 사실 과자도 안 사 먹이는 가정도… 이런 특이한 아빠와 착한 엄마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우리 가정이 1호.  

유난 떠는 아빠로 비춰지고 있지만, 내 이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합성감미료를 포함한 조미료 대신 아직 까진 자연의 맛을 먹이며 키우고 싶다.

유년시절의 치과의사는 나에게 ’유전적으로 치아가 약하네요‘ 란 말을 하며 신경치료 받고 돌아가는 초등학교 2학년생에게 사탕을 줬다. 고객양성을 위한 전략인 건가. 우선 정신을 꺾고 당근, 아니 사탕을 주는 건가.  

난 수습사원 3개월이 지나고 첫 월급을 임플란트1호에 썼다. 만 29세인가… 중학생도 안되서 박은 어금니 포스트(?) 아래의 염증이 어쩌고, 안 빼면 턱뼈가 녹을수도 있단다.  아무튼 난 그런 아빠의 ‘불량한 치아’유전자를 사유로 아이에게 과학적으로 백해무익한 화학첨가물 섭취시기를 미루려고 노력을 해왔다. (유치원에서 뭘 먹이는지는 일일이 모니터링을 못하고 있으니 그게 좀 안타깝지만)


3. 가정의 달? 가정불화의 달

사실 5월은 아내와 이상하게 다툼이 많았다.  이 정도로 아내와 부딪힌 건 첫째 임신기간, 첫 출산 이후 처음이다. 오죽하면 넷째가 생긴 건 아니겠지…… 란 염려를 하기도 했다.


지난 글에서도 얼핏 삐져나왔지만, 싸우게 되는 부분은 늘 비슷하다.


‘객관적인 옳음’을 추구하는 남편의 ‘바른 말’과

‘순간의 감정’이 중요한 한 아내의 ‘푸념‘


선호종목 때문인지 (농구) ‘시야(court vision)’도 넓고 예측력이 좋은 남편의 전술지도와

국 그릇을 보고 있으면 밥그릇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놓치는 아내의 집중력과 수반되는 실행능력


아이들과의 미래를 고려하는 멀리 보는 남편의 건설적인 제안과

자기연민이 강화한 정당성으로 모든 문제를 타인에게서만 찾는 회피적인 분석



매번 남편이 사과를 하며 끝내고

아내는 남편이 잘못했기 때문에 자기도 안 좋은 모습을 보이게 된 거라며

남편만 잘하면 아무 불화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결론을 맺는 게 참… 속이 …쓰렸다.

계속 이래도 될까?


……


그래. 그렇다고 하자.


초인이 되지 않은 내가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쓸 수 있는 패시브스킬은 하나 뿐이다.

닌자의 ’닌‘, 참을 인.

...


감정의 경화.

동맥경화 말고 감정경화이다.

감정을 차갑게 굳히고 굳혀서 화가 안나게, 신경 쓰이지 않게 하는 기술이다.

예전에 신경을 박박 긁는 여동생과 살며 단련된 초자아의 발현.

부작용이 있다면 사랑의 불을 켜두는 공간을 따로 마련하기 어렵다는 게 되겠다.

당시 비자발적 동거인인 나를 보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돌부처냐?



아이들 앞에서 큰 소리 내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아니깐 조용히 차분히 말하는 남편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큰 소리가 나오는 아내의 싸움은 참 적어놓기도 보기도 안 좋다.


심지어 이번엔 삼장법사 란다.

손오공이 나쁜 짓을 한 건 삼장법사가 자꾸 이래라 저래라 바른 말을 해서라는 거다.


아니, 여보.

손오공이 못되게 구니깐 삼장법사 통해서 원숭이를 사람 만들어주는 이야기 아닌가… 그거.  

그건 그렇고. 저기 크리스천이신 분이 …남편보고 삼장법사라니…그건 …무슨…


아니다.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세 명만 말해보라고 했더니, 유비, 관비, 장우 라고 했던 그녀이니… 중국문학은 … 그렇다고 하자.



아무튼, 그렇게 5월 말에도 ‘아이들이 어지른 거실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로 시작해서 ‘침대를 합치고 드레스룸을 만들어야 한다’로 결론을 피력한 그 전투 이후에, 왼쪽 네번째 손가락에 ‘참을 인’자를 썼다. 출근 해서 책상에 앉아 제일 먼저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

忍者の忍


카톡의 프로필 메시지도 모 작가님의 책 제목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가 되었고.

(아. 너무 티가 나는 건가)


류귀복 작가님의 러브러브한 스토리(아래)를 배우지 못할 망정, 이런 걸 남기고 있다니.

https://brunch.co.kr/@gwibok/71


그래도 사랑은 싸우면서 자라는 거래요
아, 그건 애들은. 이군요.



4. 그렇게 난 하루 이틀 대사가 줄어든 캐릭터가 되었다.

온벼리 작가님의 <이혼할 뻔햇네 소중한 너를 두고>에서 배운 전술을 응용했다고 하기엔 결이 좀 다르지만.

필요한 말만 하려고 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onbyeori5


.....


그런데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만 2세, 만 3세…그리고 이제 치아가 2.38개 나려고 하는 8개월 아가들과 지내며 돌부처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수시로 무장해제를 당하며 냉랭함을 놓치고 웃고 웃기고 하며 다시 따뜻한 아빠의 나라로 돌아오는 거다.


...


그러다가 아이들을 2일씩 거치고 나에게 열이 찾아왔다는 배경.




이번 감기가 좀 더 특별한 건, 아내 때문에도, 우리 집 아이들 때문도 아니다.

새로운 등장인물을 소개한다.


2층 사는 이웃집 7세 소녀 김ㅇ린 등장.

지금 사는 건물로 이사오기 전에 이미 알고 지내던 지인의 큰 딸이다.

우리 집 첫째 사야의 대스타이기도 하며 또 다른 세 아이 가정의 사랑둥이이다.


우리집 둘째와 동갑인 ㅇ든이, 막내 동생 수ㅇ이, 여러 조합으로 우리 집에 놀러와서 우리 아이들과 신나게 놀고 갈 땐, 늘 ‘알라뷰’ 사랑해요 하트 뿅뿅을 날리고 가는 발랄한 꼬마인데


이번에 ‘삼촌’이 아파보이니 걱정이 많이 되었나보다.


밥을 먹고 있는데 색종이를 반으로 접어서 줬다.

.

아래집 이웃(형님) 큰 딸의 위문편지


사야가 그 종이를 가져가서 자기 가방에 넣는다.


‘사야, 그거 아빠가 받은 편지니깐 돌려줘!’

- (고개를 절래절래)


여러번 얘기하지만 무시하고 도망간다..

쫓아가서 가르치기엔 아빠 머리가 너무 어지럽다.


그러고보니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보니

엄마 아빠와 밥을 먹고 있는 ㅇ린이가 계속 걱정어린 눈빛으로 날 관찰 중이었다.


밥을 다 먹을 무렾, ㅇ린이가 또 다른 색종이를 줬다.


(.  )

김ㅇ린 (7시)의 위문편지 (2)




저녁에 자고, 2-3시간 마다 한 번 씩 깼다. 새벽 3시에 열을 재어보니 이제서야 정상체온.

토요일 오후에 시작된 열이 일요일 심야-월요일 새벽에 잡혔다.

(어….선생님.,,타이레놀은 48시간 까지 안 잡히면 먹을까 했어요.)



5.  반찬배송을 계속 시키고 있는데, 하필 계속 매운 요리이다.

열은 잡혔는데 소화기관은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나보다.

이러다가 육아 시작 후 처음으로 아빠가 비판텐 신세를 질판이다.


그렇게 그냥 있는 반찬대로 밥을 먹으며 생각해보니

바나나를 사뒀어야 했는데, 사달라고 했는데 …

아, 집에 매실 원액이 있는데 처음부터 먹을껄....

열 때문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초기 대응이 후졌었네.

정로환이라도 살 껄....

근데 주말이라 열려 있는 약국 찾기도 가기도 힘들었다.




사실 아내가 평소보다 더 힘든 건 이유가 있다.

이번 5월말, 6월초는 특별한 기간이다.

내가 출근해 있는 동안 주 4-5일 집으로 와서 아이들을 같이 봐주시고 데리고 나가 놀아주시는 어머니께서 미국에서 3주를 보내고 오시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친구는 암수술을 한 후 요양시설에 계시는데, 남편과 사별한 상태.

뉴욕에 계시다가 캘리포니아로 가셔서 기존 친구들도 없는 상태.

동생이 자기 마일리지와 아버지 마일리지를 다 모아서 어머니를 미국으로 보내드렸다고 한다.


늘 지원병력이 있던 상태에서 전담을 하게 되니 힘든 게 당연하다.

아내가 느끼는 힘듦은 과장이 아니다.

내가 비전형적으로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인거다.

아내 입장에선 자기 힘듦을 공감해주지 못하는 '쓸데없이 아는 것만 많은 잔소리꾼'인 거다.

(..근데 나도 아내처럼 감정 대 감정으로 대응하면 집안꼴이 어떻게 될...까...싶기도 하고...)


....

.........


그렇게 밥을 먹던 중, 아내가 앞에 앉아 말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한 것도 있는 것 같아.
내가 화를 자주 내면 안되는데 ...
거실이 지저분하면 화가 잘나.
미안해.



약 3년 만에 아내가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그러고보니 그 3년 전엔 아내가 사과를 하는 거 보고

’사람이 참 괜찮네- 사과도 할 줄 알고‘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오빠도 늘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내가 환경이 지저분하면 짜증이 나서…‘


- 안 좋은 환경이 우리가 어떻게 해도 된다는 근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라고 말하지 않고 생각했다.)

 아니 말했나.?



화해.


포옹.


토닥토닥.




부부는 이런 거죠.

화가 날 때도 사랑하는 것.

싸운 후에도 화해하는 것.


그 누구도 화난다고 문 쾅 닫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보냈는데 이제는 사과도 할 줄 안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


이 전쟁, 우리는 계속 이겨낼거다.

우리 인류는 늘 해답을 찾았으니깐(?) We always do.


우린 그렇게 다시 애정전선을 회복했다는 산만한 이야기.


사실 글 쓴다고 잠이 줄어들어 면역력 저하의 가능도 있는데 이런 말 하면 큰일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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