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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산 May 29. 2024

서문)브런치가 선물해준 작가님들에게 올리는 감사의 편지

빙산 & 나무, 쇠, 전기 (1) : 탄생 배경에 대한 설명 -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Not by C.S Lewis, a usual misquote)

*I checked with several C.S Lewis scholars with Ph.Ds who studied C.S Lewis. They said they don't have the reference.


0. 자신의 가치만큼 타인의 잠재력을 존중하는 공간을 통해


브런치라는 공간은 참 신기합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글.

하지만 브런치라는 공간은 아무나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이 곳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이들은 어떤 식으로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이들이라서일까요.

(물론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자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라 타인의 잠재력에 꽤 예민한 것 같습니다.

아주 약간의 빛이라도 세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칭찬을 합니다.


다들 작가님들이라 다른 표현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듣는 글쓴이 귀엔 이렇게 들립니다 :


‘너, 아주 쓸모 없진 않아.’

‘야, 야, 괜찮은데? ’

‘이건 분명 재능의 흔적.. 아니, 적어도 잠재력의 근거야!’

(제 맘대로 반말톤으로 듣고 있는데, 그 뉘앙스가 비꼬거나- 경박한 게 아니라

친근함에서 나오는 반말. 구축된 관계에서 나오는 그런 거에요)



사람에 따라 그런 칭찬을 처음 듣는 사람도 있겠죠.

어떤 사람에겐 그런 몇 마디가 너무 필요했을 수도 있구요.


인간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고 생각했어요.

육아를 하게 된 후,

뭐 하나 하나 하게 될 때 마다 칭찬을 받으며 커왔는데,

어느 덧 그게 하나 둘 당연해지면 지적을 듣기 시작하죠.

칭찬은 희소해집니다.



빙산과 음악의 역사



1. The Beginning


기타를 처음 잡은 건 한 살? 이었을까요.

어렸을 때 사진을 어머니께서 만든 앨범에서 보니 클래식 기타를 잡고 있더라구요.

이제 막 걸음마 연습 하던 때 느낌. (사진은?)


그렇다고 다섯살부터 기타를 배운 그런 조기 재능발굴 - 이런 건 없었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공계시거든요.

(아버지는 공대, 어머니는 (당시의) 농대.


음악을 듣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3학년?

친구가 빌려준 카세트테이프.

워크맨도 같이 빌려줬던 때도 있는데,

나중엔 아버지의 소니 워크맨을 몰래 들었던 때도 있고,

그게 반지하 살던 시절, 도둑이 들어서 사라진 기억도 떠오르네요.

(…가져갈만한 게 그거 밖에 없었던 집이었나봐요. 다행히…)


기타를 처음 선물 받은 건 중학교 2학년?

원래 생일선물을 받는 문화가 있었던 건 아닌데 …

중국에서 꾸역꾸역 적응해나가던 아들의 삶이 기특했는지 아버지께서 사주셨어요.

전 일렉 기타를 받고 싶었는데 클래식 기타보다 2배 정도 비쌌어요.

그래서 클래식 기타가 생겼죠. CNY 300 (위안) 인가 500 (위안)인가..  

당시엔 KRW 10000, 만원 한장이면 100위안 이상을 환전하던 시절.


그 때 한인교회에 있었는데 기타 치는 형들이

‘클래식 기타는 혼자 치는 거 잖아’ 했던 게 묘하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클래식 기타로 클래식 기타주법을 배운 게 아니라 …어쿠스틱 기타 반주를 연습했네요.


(당시 듣던 팝송은 Backstree Boys에서 밴드음악으로 전향, Hansons, The moffatts)


일렉기타를 치던 형에게 기타를 가르쳐달라고 하니

도-레-미-파-솔-라-시-도 … 스케일을 하나 가르쳐줬어요.

그래서 일주일 동안 연습하고 갔더니,


잘하네- 이제부터 혼자연습하면 돼

- ???? 이게 끝??


그 때부터 독학의 길…


농구도 프로선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할만큼 좋아했던 때라 아쉽게도 그 때부터 미친듯이 기타연습을 해서 신동(?)이 되었다- 라는 전개는 없었습니다.

(토요일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나가서 12시 넘게까지 혼자 혹은 같은 건물 사는 동갑내기 친구랑 농구…)

농구는 ’함께 하는‘ 운동으로서 해외생활에서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중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농구부 활동을 하면서 이어갔어요.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매해 10-15cm 자라던 키가… 6학년 때 169-173을 찍고나서 농구를 열심히 하던 중학생이 되니 성장폭이 줄더니, 성인이 된 지금 180을 돌파하지 못하고…


아무튼, 농구는 농구로서 이어가고, 기타는 평일 저녁, 학교숙제를 마치고 자기 전까지- 하루 3-4시간 쳤던 것 같아요.

그렇게 그냥 ’제법 치는‘ 애가 되었고, 중국에서는 ’밴드부‘ 이런 게 없어서, 한인교회에서 소위 ’찬양팀‘에서 베이스 기타, 통기타 반주를 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연재브런치북 프롤로그에 잠시 삐져나온 과거이야기처럼 - 정든 새 도시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가게 되면서 기타는 타인과 함께하는 도구가 아닌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도구로 전락했었어요.


그러다가 고2 때 도전한 교환학생의 삶 속에서 친해진 학교 친구들의 권유로 갔던 First Baptist Church에서 알게 된 친구 Luke가 일렉 기타와 앰프를 빌려줬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 목사님 아들이었네요. 돌아보니 막 친했던 것도 아닌데 왜 빌려줬지? 싶은데 뭔가 멋져보이는 spiritual 한 대사를 했던 것 같은데… 그 장면만 기억이 가물.

(페이스북 가서 그 친구 찾아봐야겠네요.)


기타는 또 그렇게 미국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채워주는 도구가 되었어요.

(함께 하는 시간은 여전히 농구. 미국 친구들 사이에서 농구를 하니 주전이 아니라 후보가 되더라구요… 슛 좋고 빠른 손으로 칭찬 받기 했지만,

나와 같은 키의 친구가 부웅 날아올라서 덩크하니… 3년 넘게 림만 잡고 덩크는 못한 저는 …)


그렇게 중국-미국을 거쳐 다시 중국.


고3이 되었는데,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심지어 농장을 하는 어떤 친구의 집에서 돌아오면 자기 집에서 살면서 대학가라고 했는데… [아, 전 텍사스에 있었어요] )

교장선생님께서 주시겠다던 비자서류를 안 주셔서… 포기… 유학 갈만한 돈도 없었고…




2. The First Stage


원래 도전적인 삶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살 곳을 내가 정할 수 없다.

내가 원한다고 내 친구들과의 인연을 이어갈 수 없다.

그런 걸 겪으니 도전에 소극적인 아이가 된 건지도.


하지만 고3이 된 저는 교환학생시절 미국에서 만난 친구들의 수많은 hug를 통해 ‘치유’된 상태였던 것 같아요. 다시 시작된 중국에서의 학교생활.


일본인 친구에게 기타를 가르쳐준 게 계기가 됐어요.

미국에서 듣던 일본 밴드의 곡들도 일본친구들이 악보를 빌려줘서 연습하게 되고.

한국의 고3 수험생이라면 상상도 못할 삶을 살았네요.


중국에선 초,중,고 모두 졸업시험이 있어요.

학교에선 공부를 하다가 쉴 때는 자주 농구를 했고,

집에서 쉴 때는 기타를 쳤네요.


당시 다니던 학교에서는 크리스마스 공연을 꽤 큰 규모로 했어요.

외부 시설을 빌려서. 무대가 있고, 조명이 있고, 경사진 바닥에 반원형으로 깔린 극장같은 의자들이 한 줄에 50여개가 넘었던 것 같네요.


그런데 제가 기타를 가르쳐준 일본인 친구가 다른 일본인 친구들, 한국인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서 나간다는 거에요. 저 뺴고. (아, 그러고보니 전 외국생활할 때, 한국인친구들과는 거리를 두는 삶을 살았으니… )

그 친구들은 X-JAPAN이란 밴드의 노래를 한다고 했죠.


묘한 배신감? 괘씸함에 불타올라… 처음으로 작곡이란 걸 했네요.

그래도 세 곡은 해야 될 것 같아, 연주곡 하나, 펑크락 하나, 팝 락(?) 하나 썼어요.

가사는 영어로. (중국어로 부르는 롹은… 혁오밴드가 하기 전까진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같이 농구를 하던 한국인 후배를 한 명 베이스로 섭외하고, 일렉기타 조금 치던 일본인 후배를 세컨기타로 섭외.. 같은 반 대만인 친구를 드러머로 (…가르쳐서 반주를 시켰던 것 같은…) 뭔가 같이 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 대만인 여학우들 두 명은 백보컬로 섭외…


그렇게 처음으로 기타를 메고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 받고,

자기가 만든 노래를 전교생과 학부모 앞에서 불렀어요.


전 앰프도 없어서 앞 친구들이 두고간 앰프를 써서

하울링으로 시작해서 깜짝 놀라고.

무대 진행 준비하던 스텝들은 마이크 스탠드의 길이는 키 작은 친구들 키로 해두고 가버려서, 마이크에 키를 맞춘다고 어정쩡하게 다리를 앞뒤로 벌리고 무릎을 굽히고 …


아무튼 그렇게 5-6분,

처음 만들어본 세 곡을 세상에 알렸네요.


.

..

….

……

엄청난 환호와 갈채

(주, 제가 천재라서가 아니라 관객이 학부모라서 였겠죠)


처음 느껴보는 희열. 그게 카타르시스 란 건가요?


때는 고3 마지막 학기.


전 그 때 까지 뭘 하고 싶은 지 몰랐어요.

그 때까지의 삶이 그냥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게 목표였으니깐요.


농구선수 하고 싶었는데, 키가 더 안 자라니 포기를 했고.

(아, 지금에서 돌아보면 카와무라 유키 (172cm, 일본국가대표 포인트가드) 같은 선수도 있는데, 열정이 부족했나봐요)


처음으로

...하고 싶다
...되고 싶다


라는 열망이 생겼습니다.

그전까지 뭐 갖고 싶다- 라는 생각도 없던 제게.


한국에서 대학가기로 한 아들은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나 음악하고 싶어.’




하지만 아버지께선 ‘음악은 취미로 하는 게 멋있는거야.’ 하며

외교관들의 연주회,  직장인 밴드 이런 걸 얘기했던 것 같아요.


‘무엇을 원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저‘에게

아버지 뜻을 거스르며까지 제 의지를 관철시킬 마음의 힘이 없었어요.


그냥담백하게 포기를 했는지

좌절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



3. 밴드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중국에서 졸업 후, 반년 간 한국에서 수험생활을 하고, 한국의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신 것도 아니고, ‘커리어 전환’ 이후, 부를 축적하신 것도 아니라 - 4년치 학비가 통장에 쌓여있던 것도 아닌 거죠.


그런 제가 대학생활을 하며 ‘음악에 대한 로망’을 쫓을 도전을 할 엄두가 안 났어요.

학교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이나 노려봐야하는데.

취미생활이라니-

음악이라니. 농구라니.


농구동아리도 작곡동아리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전단을 가지고 기숙사에서 고민했던 장면은 떠오르네요.

하지만 아웃사이더의 삶을 택했습니다.

(나중에 일본어학회는 가끔 갔어요. 그건 공부 같아서)


다 ‘열정이 부족해서’ 라고 요약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다가 대학생활 2년을 하고 휴학을 했어요.


그 전까지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모든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게 된다’는 아버지의 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니 그 시간에 공부해서 장학금에 도전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전액 장학금을 받아본 적도 없답니다.)


하지만 휴학기간에는 아르바이트에 도전했습니다.

캘리포니아롤 집, 까페, 엑센츄어 총무팀 보조 ...등등


그런데 돈이 생기니 살 수 있는 게 생겼습니다.

중고 악기로 일렉기타를 사고, 이펙터를 사고, 우연히 인터넷에서 밴드 모집글을 보게 되고, 밴드 하고 싶다는 이들의 연습자리에 나가게 됩니다.


아, 그런데.

드럼을 제외하고는…너무 못해요.

베이스를 치고자 하는 친구도

비주얼은 담당할 수 있을 것 같은 보컬하고 싶다는 친구의 창법은 제 취향이 아니고

일렉기타&보컬을 하고자 하는 저보다 못해서 제가 가르쳐야 하는 상황.

합주시간에 제가 레슨을 해줄 수도 없고.


나중에 그냥 놀러왔던 친구가 노래방을 같이 가보니 보컬하고 싶은 친구보다 잘하는 것 같아 보컬이 됩니다..(사진 아래)

2007년의 어느 여름날, 리허설 해보니 장소가 너무 더운 것 같아서 시원하게 입었습니다..

휴학기간 그렇게 홍대에서 두 번의 무대 경험 후, (대관비용보다는 벌었어요)

전 밴드를 할려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많아야 한다는 이상한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근데 전 그런 친구들이 없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밴드들을 보니 다 그랬거든요. 학창시절부터 함께 한 사람들이 밴드를 구성해서 장수long-run 하는 밴드가 되는- 한국엔 넬(Nell), 일본엔 L'arc~en~Ciel, Asian Kung-fu Generation. 아니면 Hanson, The Moffatts, The Corrs 같이 가족...혹은 Switchfoot이나 OASIS같이 형제가 주축멤버...)


초등학교 시절부터 연을 이어온 친구 둘이 있습니다.

K대 공대로 진학한 친구에게 베이스 기타를 가르쳐보기도 하지만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는 천문학동아리를 하더니, 대학교 때는 자동차동아리를 하네요. S대로 진학한 친구가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가르쳐줬는데 초반에 좋아하면서 열심히 하다가 안하네요.


종종 혼자 교회에서 놀면서 기타를 치고 피아노 치고 했는데

중,고등학생들이 악기를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전공자가 아닌 저는 나름대로 쉽게 쉽게, 기타는 누구나 칠 수 있어- 하며 가르쳤어요.

아이들은 음악을 너무 좋아하게 됩니다.


그렇게 몇 년 간 같이 교회생활을 하며 ‘합주’가 아닌 ‘반주‘를 했네요.


저에게 기타와 베이스를 배운 아이들은 ‘재미’를 알아 전공자들의 레슨을 받고……(본의 아니게)… 아이들은 음악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실용음악과에 진학하게 되는 불상사의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센스와 재능’은 ‘실력’과 다른 거지만 청출어람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의 실력자들이 되어 어른이 되었죠. 그 중 한 명은 아르바이트 두 세개 뛰며 지내고 제 자취집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는데, 지금은 작곡회사에서 일하며 신인그룹들에게 프로듀싱한 곡을 주기도 하는 멋진 프로듀서가 되었어요.



4. 억압된 자유를 연료 삼아


입대 전 일본생활에서도 10주 정도 도전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도 교회가 악기가 있는 배경이 되었어요. 미자막 2주는 아예 숙박시설 대신 교회에서 지냈는데 저녁에도 아침에도 혼자 피아노를 치며 작곡놀이를 했어요. 뭘 치는 지, 뭘 치고 싶은 건지, 녹음할 장비도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 때가 초등학교 이후, 피아노를 제일 자주 치고, 제일 잘 쳤던 시절 같네요. 초등학교 때는 가정형편상, 둘 중 하나만 계속 피아노 학원을 다닐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제 동생이 피아노학원 선생님께 더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평가를 받았거든요.


군생활이 제일 활발한 창작의 계절이었어요.


공군기지에서 있어서 특수한 상황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종교활동’은 기지내부에서 ‘종교시설’이 있었습니다. 토요일은 연습을 명목으로 갈 수 있었고, 정해진 시간 전까지 교회에 있을 수 있었어요. 교회에 둔 제 장비(기타와 이펙터, 멀티트랙레코더)로 이런 저런 아이디어들을 녹음하면서 노래로 만들어봤어요.

BOSS사의 디지털 멀티트랙 레코더 Micro BR (단종) (SD카드 사용) 아직도 있어요 ㅎㅎ

네 개의 트랙만 녹음할 수 있는 거라, 어쿠스틱, 일렉, 베이스, 보컬 정도만으로 데모곡 혹은 아이디어스케치 (브런치작가들의 용어를 쓰자면 ‘초고’ )을 만드는 거죠. (제품명: Micro BR)


그렇게 하나 둘 .. 2년 1개월간 10개 정도 만들었던 것 같네요.

십여개 만들어보니, 밑천이 드러나서, 재능이 없나보다 - 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배우지 않은 사람의 한계는 여기까지 인가?


취미는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으니, 계속 하긴 했습니다.


전역을 하고, 다시 세상.


마지막 학기에 복학하는 이상한 복학생이 되었는데, 전공상 졸업영화도 하나 찍어야 했어요. 시나리오부터 촬영, 편집, 영화에 쓸 음악도, 다 셀프. 입학시절 동기, 지인들은 거의 다 졸업하고 없으니 쉽지 않았네요. 뭐 그 때도 더 발전된 실력으로 뛰어난 곡이 나오진 않더라구요.


특히 가사를 쓰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작곡은 어떻게든 하면 나오고,

편곡도 내키는대로 하면 결과물이 나오는데,


가사는……


‘아, 유치해.‘

요즘은 옛유행어가 되어버린 ’오글오글‘


중2병 감성이 20대의 노래에서 나오니 이거 뭐, 세상에 공개하기도 뭐하고.


만들어진 곡을 저장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Soundcloud라는 곳에 올려두었어요.

유튜브에 올리려면 동영상도 같이 해야하는데, 그럴 열정도 없었고 생각도 못했어요.




5. 직장인 밴드? 축가


직장인이 되니 오디션 프로그램이 성행합니다.

벚꽃연금의 장범준 님이나, 악동뮤지션의 찬혁군이나, 이승윤 군이나…복면가왕, 싱어게인의 홍이삭 군까지. 홍이삭 군 하고는 몇 번인가 같은 땅을 밟은 적이 있네요. 지인 결혼식 축가도 왔었는데, 전 올해가 되어서야 이 친구가 이렇게 유명해진 걸 알았어요. (TV안보는 이들의 뒷북)


……

입사 초기, 술을 안 마신다고 하니, 회식하던 식당에서 ‘넌 술을 안 먹으니’ 노래를 부르라고 했어요.

.....

‘까짓것 부르지 뭐.‘


출근길에 처음 들어본 <먼지가 되어>를 불렀어요.

마침, 부서장의 18번곡이었다고 하네요. 나중에 따라부릅니다.


그게 계기가 되었는지, 연말 송년회에 신입사원 장기자랑에서 혼자 한 코너를 담당하게 됐어요.

그래도 노래방 반주기 MR은 싫어서  <먼지가 되어>를 편곡해서 MR로 녹음해서, 기타를 치며 같이 불렀죠.

MR 제작 환경



그 후엔 학교 후배가 저보다 훨씬 먼저 결혼을 하게 됐는데, 약혼식 사회를 맡기질 않나,,, 결혼식 때는 축가도 불러달랍니다. (이승환씨의 happy wedding song 을 어쿠스틱기타를 치며 불렀네요.)


입시준비하던 시절의 친구/동생이 결혼식 할 때, 밴드세션을 구했는데, 일렉기타를 해달래요.

(michael jackson 의 love never felt so good과 the beach boys 의 wouldn’t it be nice ..)


제 결혼식 때는 자작곡을 쓸 여유가 없었어요.

아내는 한국에 없었고, 저 혼자 직장생활하며 영어교육자격증 CELTA과정에 도전 중에 결혼식 준비하느라 정신없었네요. 그 때 부른 노래는 피아노 치며 ‘can’t take my eyes off you’ 1절+코러스, ”여기 까지 해서 ’반곡‘ , 다음 꺼 까지 해서 ’한 곡‘ 부를게요” MR로 전환해서 Come What May 를 부르고….


제 자작곡은 신혼생활 중, 제가 예뻐하는 커플의 결혼식 축가 때 쓰여집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위해 곡을 만들었어요.

그 때는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데, 그 때는 남들 노래 말고 제가 노래를 만들어서 선물해주고 싶었어요.

(그게 민폐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중에 하게 됐네요..)

그 친구가 축가 제안을 했을 때 아내가 다녀오라고 해서 준비할 수 있었죠.




저스틴 비버는 온라인에 올린 음원으로 발굴되었다는데, 제 음원의 퀄리티는 그런 급이 아닙니다.

(아래 글을 끝까지 읽으신 분들은 들어보셨겠지만 ...)

https://brunch.co.kr/@thewholeiceberg/90


무엇보다 모창을 하면, 남의 노래를 잘 따라하겠는데, ‘내 목소리’라는 것도 못 찾은 것 같아요.



대학교를 졸업할 때는 대학원으로 로스쿨을 갈까도 고민했지만 (학비가 비싸네요)

음악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늘 언저리에 있었죠.


싱어송라이터 아니더라도 영화음악쪽에 도전해볼까? 하며 가까운 연세대학교 영상음악전문가과정 모집요강도 보고 했지만, 그 학비 들여서 내가 뭘 얻을 수 있을까? 란 고민에 답이 안나와서... 미룹니다.


좀 더 열정이 쌓이면?

그거 안하면 죽을 것 같다- 란 생각이 들면 그 때 하자 - 하고 미뤘네요.

(근데 전 뭐 하고 싶어서 절박했던 적은 없어서…)


회사생활을 하고

밥벌이를 하니

창작욕구가 사그러드는 희한한 삶이 시작되었어요.


돈이 생기니 중고로 살 수 있는 기타는 늘어나는데 막상 그 기타로 곡을 안 만드네요?

(물론 씀씀이가 적어, 30-40만원 선에서 사다가, 최근에서야 70만원 정도까지 도전했어요)

점점 치지도 않게 되네요.

직장생활 2년차, 첫 자취방-항균페인트 색상을 파랑으로 한… 이상한 사람.  당시 보유하던 기타

아, 이런 기타는 이런 느낌이구나. 이런 소리구나.

귀만 좋아집니다.


개미의 근면성실한 삶이 어느덧 창작적으로는 안일한 삶이 되어

베짱이의 창작욕구는 소비욕구로 치환된 것 같아요.


모 작가님께서는 ’다재다능‘하다고 해주셨는데,

전 제 ’다능‘함이 불편했던 시절이 있어요.


뭐 하나만 잘하면 그 쪽으로 진로를 정해서 한 우물만 팠으면 어떤 전문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란 생각인거죠. 배부른 소리.


근데 이거 해보면 이것도 어느 정도 잘하고, 근데 특출난 것 같지도, 엄청난 열정이 생기지도 않고, 저거 해보면 저것도 어느 정도 잘하고……

그것도 재능인지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전 연습하는 걸 지겨워한다거나 재미없어 한다거나 하는 게 없어요. 그냥 그 순간 순간, 한 음 한 음, 연습의 시간을 채워가는 게 그냥 싫지 않아요.


그런 태도는 농구하면서 배운 걸까요. 같은 자리에서 슛 연습을 해요. 한 번, 두 번, 세 번, …어둑어둑한 새벽하늘이 점점 밝아지면서 백번…다른 자리로 가서 다시 시작.한 동작을 계속 연습해요.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왼발을 축으로 회전하고 점프. 착지하기 전에 스냅.스핀을 걸고 백보드의 한 구석을 맞춰서 찰랑 (쇠사슬 네트)골.


그런 혼자 하는 연습이 실전에서 드러나더라구요.

농구를 좋아한다면서 혼자 연습을 안하는 친구들은 잘 모르는 그 시간.


프로선수들의 하이라이트 영상은 같은 자리, 비슷한 상황에서 수백시간, 수천시간을 연습한 것의 결과.


아무튼, 프로가 되겠다는 목표는 없어졌지만, 연습은 그런 거라고 알고 있어서일까요.


농구선수들에겐 그게 슛이고 드리블 같은 연습,

기타 연주자에겐 그게 왼손 오른손의 손동작,

브런치 작가들에겐 하루 하루 쌓아가는 한 문단, 한 문단.



6. 격려로 북돋아진 결심


아아, 너무 주절주절 말이 많았죠?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구요?


초고도 뭐도 아닌 그냥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는 게, 구구절절 시시콜콜 제 이야기만 잔뜩.

브런치스토리에 존재할 의미가 있나 싶은 제 이야기만.

(언젠가 자서전 브런치북이 나오려나요. ’불혹에 쓰는 자서전과 유언’ 이런 제목으로. )


감사하다구요.

한 두 개의 댓글로 별거 아닌 거에 대단한 것처럼 느끼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예전에 사운드클라우드에만 올려둔 음원들에 찍어둔 영상들을 입혀서 유튜브에도 올려보게 되고.


제가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도

음악도

글도

계속 할려구요.


그 시절에만 쓸 수 있었던 찌질함 가득한 노래가 있었듯이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된 후 만들어낼 수 있는 노래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쓴 ’100점 만점에 50점’의 글이 누군가에겐 ‘시기적절한 글’이 될 수 있었듯이

제 50점 짜리 곡이 누군가에겐 또 시기적절한 노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됐어요.


아이들이 좀 더 자라야 뭘 더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 이 나이의  아이들이 있어서 쓸 수 있는 게 있듯, 지금에만 붙잡을 수 있는 게 있을거에요.



7. OUTRO: That's my que.


문단마다 숫자를 넣는 건,

글이 길어지는 제 자신을 제한 하고 하는 수단이에요.

(알랭 드 보통 따라 하는 것 같이 보일 수 있겠지만)


‘ 작작 써. 읽는 사람 피곤해.'
 너, 그러다가 내일 오후에 피곤한 내색하고, 아내에게 싫은 소리 듣는다?’

-----[다음 날, 퇴고(? 아니 첨언)중 업데이트] 실제로 싸웠네요...----


7이 제 마지막 숫자입니다.

나갈 장면scene이 되었네요.

이제 그만.


별거 아닌 삶의 이야기.

하지만 전하고 싶은 감사의 마음을 꼭꼭 담아.

기침하는 첫째 아이 덕에 깨어난 이 새벽


어제 해가 떠있을 땐, 온벼리 작가님께서 나눠주신 결혼생활 이야기에서 제 결혼생활의 반성할 부분을 배웠는데, 감성충만한 이 새벽엔 민트별펭귄작가님의 글을 통해 한국사람의 학창생활과 직장생활의 또 다른 면을 알게 되고. 또 비슷한 일을 기록하셨던 ㅇㅇ님의 옛 글도 떠오르고...


10명만 있어도 충분한 것 같았던 구독자 수가 민트별펭귄님의 가세(?)로 20명이 되어 조금 기쁘고,

아내에겐 100명이 되면 그 때 공개하겠다고 했는데 ㅎㅎㅎ 이제 1/5 달성.

(아내는 요즘 다투게 되면 브런치글쓰느라 소요하는 시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합니다)


공개하기 전에 아마 육아 관련 글 싹 거둬서 재편집하고 브런치북으로 만들어야겠어요.


네, 날 것은 한정판입니다.

회의 맛을 전혀 모르지만 사회생활하며 그냥 먹고 있긴 한데,

날 것이 좋은 것도 있나보죠 뭐.



끝까지 읽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다음 번엔 더 잘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게 오랜 만에 큰 격려로 묘한 두근거림을 선물해주신 작가님들,

감사합니다. (작가명미정님, 바람꽃님, Sweet Little Kitty님)

(아내에게나 그런 감사의 편지를 쓰지?)


끝까지 읽어주신 분께 나누는 제 사생활(?개인사가 더 적합한 단어인가요?)의 흔적:


저와 처음으로 사진 찍은 기타 사진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사진이 아닌 기타사진)

쾌걸조로 느낌으로 프라이버시 보호 정책(어설픈 신비주의) 을 사수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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