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인아 Oct 28. 2022

예민함과 섬세함, 그 사이 어딘가

타고났을까, 획득됐을까


우리나라에서 '예민함'이라는 단어는 부정적 어감을 내포한 채로 쓰일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타인에 의해 예민하다고 평가될 때에 굉장히 불쾌해했고, 예민함이 밖으로 나타날까 전전긍긍하며 무던한 척, 거슬리지 않는 척, 상처받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 가면을 쓰며 살아왔다.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며 수년을 살아왔지만, 진짜 '나'는 속에서 갑갑하다고, 숨 쉬고 싶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고, 그 외침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어떻게든 밖으로 형태를 드러내고 싶어 했다. 결국에는 숨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신체화 방어기제라는 일그러진 형태로 세상 빛을 보려 나오곤 했다. 근 1년간 상담치료를 받다 보니 나의 섬세함과 예민함은 나의 잘못도, 흠도 아닌 그저 '나'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나의 일부분을 펼쳐보려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감각이 아주 민감한 아이였다. 감각 중에서도 청각과 구강 감각이 유독 도드라졌었다. 잠에 들 때에 시계 초침 소리를 듣고 잘 수 없어 나의 방에 있는 벽걸이 시계는 없거나 무소음 시계로 교체되었다.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거실에 있는 시계의 초침 소리도 들렸다. 옆에서 엄마가 누워 잘 때면 아주 작은 숨소리에도 나는 몇 시간이고 깨어 있었다. 엄마가 자장가를 불러줄 때면 그 자장가가 끝날 때까지 나는 다 듣고 있다가 자장가가 끝나면 잠이 들었다. 아주 작은 소음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니 그 어린아이에게 이명이 찾아오기도 했다. 밤마다 너무 괴로웠다. 구강 감각도 민감해 나는 부드러운 음식을 많이 선호했다. 7살 즈음 나는 육류의 살코기는 입에 대지 않고 언제나 비계만 먹었던 게 기억이 난다. 잠눈도 밝아 성인이 된 지금도 안대 없이는 집안의 모든 전원 불빛이 나의 입면을 방해한다. 시각 자극에도 민감해 눈앞이 번쩍번쩍한 콘서트장이나 어두운 아르떼 뮤지엄에 다녀오고 나면 불안해했던 몸상태 때문에 빠르게 소진이 되곤 한다.


이런 나의 감각과잉은 부모에게 충분히 수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억제하는 방법을 습득하여 적절한 수준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돌보아지지 못했고 경험이 자유롭게 밖으로 표현되지 못하였다. 나의 감각과 정서를 한순간에 종잇쪼가리로 만드는 엄마의 언어습관에 지치고, 그런 엄마가 무서워 내 감각과잉을 호소할 대상이 없다시피 하며 살았다. 시끄러운 자극이 다가올 때마다 불편함은 불편함대로 겪으며 수용되지 않은 불쾌감은 불쾌감대로 내 정서적 평온을 깨트렸고 나는 어른의 보호와 돌봄을 충분히 받지 못한채 스스로 삭혀내고 억제해내야 했다.


감각이 예민한 것은 어느 정도 타고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의 어머니도 귀가 무척 예민한 편이라 유전적 요인이 강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살아오며 쌓이고 쌓인 나의 외상 기억들 하나하나가 감각 과민이 유전인자와 얽히고설켜 스트레스 자극을 받을 때, 감각 과잉을 자아내는 것 같다. 잠귀가 밝아 옆사람이 부스럭 대면 잠에서 깨던 아이가 엄마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술을 마시고 딸꾹질을 하며 새벽에 귀가하던 아빠의 인기척을 느꼈다. 그 아이는 엄마가 깨서 아빠가 들어온 것을 알까 봐, 아빠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 분노할까 봐 엄마 대신 마음 졸이며 작은 몸이 바들바들 떨릴 만큼 불안해했다. 엄마의 통제가 싫어 무엇이든 몰래하던 버릇이 있던 나는 방 안에서 문 앞에 엄마의 발소리가 들리는지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게 온종일 그것도 가장 편안해야 할 집 안에서 온몸의 각성을 올려놓고 생활하다 보니 각성이 내려가야 하는 밤에는 잠에 들어 너무 어려웠다. 상담치료를 하며 그 당시의 나를 돌아보면 가족도, 누구도 없이,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규칙도 통제도 없이 안전과 보호만 있는 공간으로 그 아이를 꺼내와 편안하게 각성을 내려놓고 스르르 잠에 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나의 공감능력과 동일시 능력은 20년이 넘도록 빛을 못 보고 살았지만, 근 1년간 상담을 받으며 내가 이토록 감정이 섬세한 사람이구나를 여실히 느끼는 중이다. 감정이 소중히 다루어져 본 적 없이 자라온 아이는 청소년이 되었을 즈음 눈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반 아이들이 전부 눈물바다가 되는 다큐멘터리를 보고도 혼자서 울지 않았다는 자부심에 젖어 사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그 아이는 슬픔을 느낄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느꼈을 때 알아봐 주고 수용해주는 어른이 없음에 단단한 벽을 쌓고 살아가던 아이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말 쇼나 원숭이 쇼와 같은 동물을 이용한 쇼를 보는 것, 동물원 관람을 즐거워하지 못했다. 저기서 링을 돌리고 있는 원숭이는 얼마나 훈련을 많이 받았을까, 저기서 뛰고 있는 말은 저 루트를 얼마나 학습받았을까 궁금하고 이입되었었다. 그 동물들을 조련하는 사람이 중국에서 온 어린 원주민일 때면 '저 아이는 나와 비슷한 나이 같은데 왜 학교에 가지 않고 저기서 저 일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고 마음이 쓰였다. 그렇게 이입을 하고 나로 돌아오면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는 즐거운 쇼를 나는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촉촉한 감수성을 잔뜩 켜놓은 채로 뉴스의 '사회' 배너를 들어가면 나는 마음의 자해를 할 수 있다. 매일 누군가는 살해당하고, 스스로를 죽이고, 성폭행당하고, 부당대우를 받는다. 내 마음의 에너지를 가늠해놓지 않고 무작정 그 뉴스들을 맞닥뜨릴 때면 나는 피해자들에게 아주 쉽게 빙의되어 세상에 대한 환멸과 삶의 덧없음에 눈물바다로 30분을 보낼 수 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에면 상대의 뉘앙스와 눈빛, 손짓을 아주 잘 캐치하고 기억하는 면이 있다. MBTI 검사를 하다 보면 언제나 F가 90%에서 100%를 오간다. 상대가 어떤 일에 대해 감정을 호소하면 큰 내막을 듣기도 전에 나는 그 사람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처음 이 감수성을 깨달아갔을 때, 이 기질이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 기질을 내 것이 아니라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전자에 박혀있는 이 감정적 기민함을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부정할 수 없다면 기꺼이 활용하며 살아가자 생각하며 상담을 통해 균형점을 찾아가는 중이다.


몇 달 전 방영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며 참 많이도 공감하고, 또 아파하고, 기뻐했다. 그중에서도 영우의 '감각 과민성'을 보며 동질감에 기뻐했던 순간이 많았다. 물론 자폐를 가진 영우만큼은 아니겠지만,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없고, 안대가 없이는 집안의 아주 작은 전원 불빛마저 입면을 이룰 수 없는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아 행복했다. 나의 감각 과민이 충분히 수용되지 못해 생긴 결핍이 영우를 통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평생도록 원망스럽기만 했던 나의 섬세한 기질을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도 겪고, 지금도 여전히 갓난아기처럼 어르고 달래줘야 하는 기질이 불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일부임을 인지하고 수용하고 보듬을 수 있어졌다. 나의 기질적 섬세함과 예민함을 다루어가며 잠깐 기도하기를, 이 세상의 민감한 사람들이 타인의 예민하다는 핀잔과 부정적 피드백에 상처받더라도 그 기질이 결코 쓸모없지 않음을 나처럼 깨달을 수 있는 기회에 닿기를 간절히 바래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세포들이 기억하는 애착 손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