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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인아 Jun 05. 2022

삶과 죽음의 갈림길, 그곳에 서있는 나

나에게 '생존'이란 대체 무엇일까

우울이라는 감정을 빼놓고 나의 이전 삶들에 대해 이야기 힘들다. 나는 그만큼 오래도록 우울과 기분부전에 점철된 삶을 부지해왔다. 이런 우울이라는 감정이 나를 압도하고 있을 때에는  우울이 걷힌 감정을 궁금해하고 갈망하게 되지만, 막상 우울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오면 다시 우울을 끌어 당기 싶어 하는 역설에  스스로에게 진절머리가 난다.


나는 때때로 스스로를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세워 생각에 잠기곤 한다. 문득 기억의 고통이나 강박과 같은 불안의 습격으로 인해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시간이 찾아오면 습관처럼 그 자리에 가있는다. 억울함, 분노, 슬픔 등의 부정적 정서에 삼켜져 들어가 죽음에 대한 생각의 늪에 몸을 맡겨버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생존이 나에게 중요한 키워드인 만큼 죽음만큼 생(生)을 가득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 평화로운 날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때나, 내가 좋아하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피부를 간질이는 바람을 느낄 때면 그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걸 온 마음 가득히 느끼려고 애쓰곤 한다.


'죽고 싶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삶의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매일이 이렇게 생으로 가득 차 있었으면'
'나는 지금 살아 있구나'


나는 이렇게 매번 살고 싶은 생각과 죽고 싶은 생각을 또렷하게 인식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생각들은 내가 의도적으로 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주제를 꺼내어 스스로 생각하려고 한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너무 고통스러울 정도로 우울하거나 불안할 때면 자연스레 죽음의 생각이 나를 끌어당기고, 부정적 생각 없이 평화로운 날 산책을 나갔을 때, 그때 마침 하늘이 높고  새파랗고 그 하늘 아래서 살결을 통해 잔잔히 부는 바람을 느끼며 햇볕을 쬐일 때면 자연스레 가득 찬 생이 나를 끌어당긴다.

산책길을 걷다가 문득 '이 하늘을 보기 위해 이 날까지 살아왔구나' 싶었던 날의 하늘의 모습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동물적 본능으로 생존의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나는 심한 우울을 가진 사람조차도 마지막 죽음을 결심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살고 싶어 발버둥을 치다가 끝끝내 삶을 등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모자랄 것 없고 오래도록 간직해온 꿈마저 이루어 가고 있는 내가 왜 이렇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도처에 깔아놓고 살아가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너무나 슬펐지만 가장 먼저 부모가 떠올랐다. 어린아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는 바로 부모이다. 그 진실은 부정하고 싶지만 너무나 또렷이 존재했고 매번 마주 보기에 버거운 역사이다.


나의 엄마는 평소에는 따뜻하고 착했다. 하지만 본인이 몸이 힘들고 신경질이 잔뜩 차올라 있을 때면 하늘에서 몇 년 동안 못 울린 천둥이 몰아서 울리듯 큰 소리를 지르며 폭언을 쏟아냈다. 그 폭언에는 본인의 죽음에 대한 협박도 포함되어 있었다. "너희, 엄마가 콱 죽어버려야 정신 차릴래?" 그 순간의 엄마는 본인의 성정에 못 이겨 눈빛이 달라진 상태에서 말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하루만 지나도 본인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말을 당신의 딸은 누구보다 뚜렷이, 누구보다 아프게 기억하며 그날들 이후의 삶을 살아내었다. 그렇게 남은 상처는 십수 년이 흐른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세상의 바람을 맞고 있다. 엄마의 죽음을 빌미로 한 협박이 애착 대상의 상실에 대한 공포, 생과 사의 기로에 대한 밀접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나의 만성화된 우울과 인지적 오류의 모든 원인을 이것으로만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집 밖에서 사람들에게 당하고 억울하게 피해입은 수 많은 일들을 부모에게 달려와 말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는 예측불가성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은 내 입을 꽁꽁 싸매게 만들었고, 보호받지 못한 채 2차, 3차적 심리적 아픔이 재생산되는 상태가 방치되어 수년이 흐르고 말았다.

 이런 부모의 비일관성은 내 인간에 대한 신뢰에도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혼란형 애착과도 연관성이 깊은 비일관적 양육 태도는 상대가 나에게 한 약속에 대해 집착하게 만들고 상대와 내가 했던 모든 상호작용의 통합된 모습 대신 상호작용의 가장 마지막 모습을 통한 상대방에 대한 평가로 기대와 실망을 아주 쉽게 오가게 한다. 그리고 아무 힘이 없을 어린 시절 부모가 나를 보호해주리라는 강한 확신을 획득하지 못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과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데 온 신경과 에너지를 쏟게 된다.


생존에 몰두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생존 그 이상의 것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를 빌려와 설명하자면 나는 20대 후반에 이르도록 안전의 욕구를 채우는데 온 힘을 다해 살아간다. 안전에 대한 욕구가 안정됐다 생각하고 그 상위 단계인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를 위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유대를 쌓으려 해도, 내가 안전한지, 상대가 나에게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지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확인하고 확보하려 든다. 그렇다 보면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 이유보다도 상대가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조건을 더 중요시하게 된다. 이는 관계에 있어서 나의 분별력을 지배하고 정확한 판단과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선택하는 것의 괴리를 머리로는 알기에 지독한 양가감정이 또다시 일어나 이것이 나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게 된다.

나는 공부를 해서 갖기 어려운 직업까지 손아귀에 쥐기를 코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다. 들어가기 어려운 대학에 들어가 꿈까지 이루었지만, 내가 이 모든 학업의 여정을 지속하는데 작용한 동기는 자아실현이나 명예 획득과 같은 거창한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내가 이 긴 여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평생 해도 좋을 만큼 애정을 가진 분야였기에 가능했던 것도 있지만, 역기능적 가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절규 즉, 고통으로부터의 회피의 수단으로써의 기능이 8할이상 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담치료를 하면서 살면서 부모에게도 말하지 못한 죽음과 관련한 나의 생각과 그 기저에 깔린 내 마음을 살펴볼 수도 있게 되었다. 아직 선생님 앞에 내어 보이고 싶지만 망설여 담아두고 있는 형태마저 모호한 뭉텅이 같은 마음도 여전히 산더미 같다. 내 삶의 기억과 역사가 시간이 흘러도 아프고 지겨운 것은 변함이 없겠지만 수년이 걸려도 그 역사마저 보듬을 수 있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라며 기다려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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