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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인아 Jun 06. 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디 살아가기를


트라우마의 플래시백과 강박의 그림자는 그럭저럭 잘 살아가던 내가 다시금 죽음의 향기를 맡게 만든다. 열심히 심리치료를 받고 미래에는 지금껏 과는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끊임없이 마음다짐을 하지만 무거운 과거의 짓누름 아래 힘없이 깔려버릴 때가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그래도 삶을 포기할 수 없어 남의 목소리를 빌려서라도 내 스스로가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려 안간힘을 쓴다. 내가 의지하고 매 순간 기억하려 애쓰는 시와 드라마 대사 몇 가지를 가져와 공유해 보려 한다.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박노해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들의 길이듯
삶이 온통 사람의 길이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캄캄한 어둠만큼 밝아오는 것이니,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나는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니라 백번이라도 부정하고 싶고 덜 아프고 덜 버거운 길이 내 길이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이 시는 삶에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며 말해주고 온 하늘이 새들의 길이듯 상처투성이인 지나 온 길 위 발자국도, 기억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이 길도 부정되지 않고 온전히 인정될 가치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말은 지금까지 살아온, 붙어있는 나의 생명을 기특하게 여겨주는 진심 가득한 한마디 같아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고 다시 한번 내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곤 한다.



풀꽃 3
                 나태주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이 시는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아 좋아한다. 내 삶이 꽃피워지기를 바라며, 수십 년이 걸려도 내 삶이 꽃피워지는 날을 기다려주리라 약속하는 말 같아 참 좋다. 내 삶에도 참 좋은 그날이 오기를 무작정 기다려보게 만든다.


드라마 내일 시즌1: 4화 김희선 대사 중
지금 당장은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생각이 들 거야.
그래도 살아. 날씨가 좋아서, 날씨가 흐려서
죽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시작해. 살다 보면 언젠가는 '오늘을 위한 것이었나 보다'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테니까 그러니 "살아"
구련은 저승사자이게 때문에 이미 죽은 사람이다.
내일 시즌1: 10화 김희선 대사 중
(구련) "정말 죽겠다는 마음으로 손목을 그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뜨거운 피가 상처를 따라 흐르고 심장이 손목에 붙어 있는 것처럼 미친 듯이 뛰는 게 느껴져. 분명 세상에 미련 따위 없어서 칼은 댄 건데 고통 뒤에 숨어 있던 수많은 미련이 날 붙잡아. 모든 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했어. 살아 있는 게 죄인 같았거든. 그날 이후 계속 후회 속에 살아가고 있어. 아주아주 긴 시간을 말이야. "
(자살기도자)"이런 흉한 상처를 가진 제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까요?"
(구련) "흉하지 않아. 살기 위해서 간절했던 흔적이니까.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서. 그러니까 살아 OO야"


드라마 <내일>은 웹툰 원작 드라마로 사람을 살리는 저승사자가 매회 자살 예정자를 찾아가 삶의 의지를 되찾아주는 이야기이다. 매회 자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있어 학교폭력 생존자, 트라우마로 신경성 거식증이 된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 성폭행 피해자, 장수 공시 준비생 등이 옴니버스식으로 등장한다. 이런 극 중에서 매회 자살 예정자를 살리기 위해 구련(김희선)이 하는 대사를 듣고 있을 때면 항상 포함되어있는 대사가 있다. "살아"

그 "살아"라는 대사를 들을 때면 어김없이 눈물이 난다. 아마도 누군가가 내가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라 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건드려지나 보다. 나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한 채 누군가 나에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기특하다고, 당연하지 않다고, 앞으로도 살아달라고, 지금까지 그 힘겨움을 버티고 살아있어 주어 고맙다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 왔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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