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모로, 디즈니의 진화
디즈니의 신작 애니메이션, <모아나>는 푸른 바다가 아름다운 폴리네시안을 배경으로 한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모투누이 섬. 모아나는 이 섬을 이끄는 족장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언제나 바다를 꿈꾸지만, “바다는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섬이 점점 죽어가자, 모아나는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여신 ‘테 피티’의 심장을 제자리에 돌려놓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 테 피티의 심장을 가져갔던 반신(demigod) ‘마우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신이라 생각한 마우이는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의 소유자. 모아나는 우여곡절 끝에 마우이를 설득하고, 함께 테 피티의 심장을 돌려놓기 위한 모험을 떠난다.
모아나는 분명히 자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공주님이다. 하지만 만화에서 많이 보았던 연약한 공주님이 아니라, 현실 세계 속 공주님이다. (21세기의 공주님들은 왕이 되거든.) 모아나도 족장인 아버지의 밑에서 착실하게 후계자로 커나간다. 자신은 마을 사람들을 이끄는 족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바다로 나가고픈 마음이 가득하지만, 현실과 꿈 앞에서 망설인다. 하지만 그녀의 운명을 믿어준 할머니의 응원을 받고, 망가져 가는 섬을 살리고자 바다로 나간다. 바다를 넘어가면 안 된다는, 천 년이 지나 어느덧 종교처럼 굳어져 버린 믿음. 그 견고한 믿음을 깬 퍼스트 펭귄이, 바로 모아나다.
반면 완벽할 것 같은 마우이는 오히려 이기적이다. 마우이는 반신이지만, 인간의 사랑을 갈구한다. 인간이 자신을 찬양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이를 위해서 무엇이든 다 해주려 한다. 신으로서 무슨 일이든 다 하면 인간들이 자신을 사랑해줄 거라고 믿는 것. 결국, 그것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마우이. 그리고 그의 실책으로 결국 테 피티의 심장을 바닷속으로 사라고, 생명력 넘치던 테 피티의 섬은 검게 변한다.
모아나의 모험은 결국 마우이의 실책을 바로잡는 과정이다. 하지만 모아나는 그에게 죄책감이 아니라 그의 호승심을 건드려서 잘못된 선택을 돌려놓는다. 마우이가 테 카에게 패한 후 절망하며 그들의 모험을 포기했을 때도, 그보다 먼저 일어서서 다시 테 피티의 섬에 가려 했던 것도 모아나다. 반신이 아닌 인간, 그것도 섬 밖의 경험이 없는 어린 소녀.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기억하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모아나는 그 누구보다 큰 힘을 가졌다. 그래서 결국 테 카를 물리친 것도, 테 피티의 섬을 부활하게 한 것도, 마우이가 아니라 모아나다.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것으로 매번 비판받았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과 <겨울왕국>에서부터 조금씩 굳어져 있는 것을 깨 왔고, 이는 <주토피아>에서 빛을 발했다. 디즈니는 <주토피아>에서 공주가 아닌, 현대적이고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다. 어린이들이 귀여운 동물에 시선을 뺏길 때 어른들도 무릎을 칠 만한 스토리텔링을 하기도 했다. <모아나>는 주토피아만큼 날카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고, 공주님 비슷한 캐릭터가 나오기 때문에 약간의 후퇴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고,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자’라는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재미있게 전달한다. 게다가 모아나와 마우이의 관계는 연인이 아니다. 서로에게 모자란 점을 채워주고 좋은 점은 더욱 발휘하게 하는 파트너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다.
영화는 107분으로 전체관람가 애니메이션치고는 조금 긴 편이지만, 지루한 틈이 없다. 압도적인 비주얼과 끊이지 않는 소리 덕분에 인물이 적은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 압도적인 비주얼은 색감뿐 아니라 생생한 느낌을 제대로 전달한다. 광활한 바다, 넘실대는 파도는 눈에서부터 시원함이 느껴지는 듯하고, 조류 온도를 알기 위해 손을 바다에 집어넣을 때는 실제로 물을 가르는 것 같다. 물에 젖은 모아나의 머리카락을 그린 것도 주목할 만한데, 그저 머리카락을 물에 적시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젖은 머리카락이 마르면 어떻게 되는지, 머리카락을 묶으면, 또는 풀면 어떻게 되는지 등을 섬세하게 반영해 놓았다. <인어공주>에서 아리엘의 머리가 언제나 세팅된 것처럼 예쁘게 그려놓았던 것에 비해서는 엄청난 발전이다.
뛰고, 달리는 액션 장면도 속도감 있고 짜임새 있게 전개된다. 모아나와 마우이가 갈고리를 찾으려고 거대한 게 타마토아와 대결하는 장면, 그리고 테 카의 공격을 피해 모아나가 배를 몰고 테 피티의 섬에 들어가는 장면 등이 인상적이었다. 카카모라 해적과 대결하는 장면에서는 <매드 맥스>가 생각나기도 하는데, 영화를 다 보고 찾아보니까 제작진들이 이를 의도적으로 오마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모르고 영화를 봐도 '어, 매드맥스다!'라고 바로 느낄 수 있다.
목소리 연기도 좋았다. 모아나의 목소리를 맡은 아울리 크라발호. 신인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목소리에 생생함이 넘쳤고, 노래도 너무 잘한다. 드웨인 존슨이야 이제는 믿고 보는 배우가 되었지만, 마우이 목소리를 들으면서 목소리 연기도 잘하는구나 새삼 감탄했다. 놀라운 점은 모아나의 닭친구(!) 헤이헤이인데, 앨런 튜딕이었다. 얼마 전에는 <로그 원>에서 까칠한 드로이드 역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에 웃음을 내려줬는데, 이번에는 디즈니 역사상 가장 멍청한 캐릭터를 맡아서 큰 웃음을 주고 갔다. 십몇 년 차 <파이어플라이> 팬으로서, 고물 우주선을 몰던 와쉬가 이제는 감초 성우가 된 것을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면서도 내가 다 기분이 좋고 그렇다.
그리고 음악! 이 영화 음악이 정말 대박이다. 물론 좋을 거라고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린-마누엘 미란다가 참여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좋을 줄은 몰랐다. 모아나가 'How Far I'll Go'를 부르는 순간부터 울컥했다. 노래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압도적인 비주얼과 그것을 채우는 합창단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겨울왕국>에서는 ‘Let It Go’가 너무나 큰 역할을 했었다. 영화를 정확히 반으로 가르는 곡이었으니까. 하지만 <모아나>는 이보다 좀 더 뮤지컬답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를 들어야 전체를 듣는다는 느낌이다. 음악이 정말 많이 쓰였지만, 그 어떤 음악이나 노래도 타이밍이 억지스러운 느낌이 없다. 린-마누엘이 쓴 가사도 정말 멋졌고, 가사 번역도 잘 되었다.
보는 내내 뭉클하고, 흥분되고, 즐거웠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형성도 웃음으로 승화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영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다 그렇고 그렇지 뭐"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에게도 "그렇지만 재미있게 볼 것이다."라고 말하며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