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그리고 아쉬움
오랜만에 달린 드라마가 끝났다. 흡 ㅠㅠ 허전해 ㅠㅠ
전체 16화 중에서 중간 부분인 9~12화 정도를 아주 대충 보긴 했지만, 그래도 최근 드라마 중에서는 재미있게 봤다. 처음 본 순간 이 드라마가 비주얼 면에서는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는데, 그 믿음은 마지막화 마지막 장면까지 충족되었다. 정말 영혼을 갈아넣은 촬영과 색보정과 CG는 아마 한국 드라마에서는 몇 년간 안 나오지 않을까. 며칠 전에 봤던 영화에서 쓴 CG보다 더 정교하고 그럴듯했다면 말 다한 거지.
김은숙 드라마가 최근 몇 년간 정말 와 닿지 않는 이야기만 계속해서, 어느 순간 작가에 대한 내 믿음이 시들해졌다. 작년 최고의 히트작 <태양의 후예>는 처음부터 김은숙이 시작한 스토리가 아니었고, 김은숙의 역할은 영화 뺨치게 심각했던 스토리를 드라마의 수준에 맞게 톤과 무게 조절하는 것임은 드라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김은숙이 준비한다는 신작이 더 기대됐었다. 전통설화 속 "도깨비"라니.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도깨비를 현대적인 로맨틱 코미디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도깨비>는 역시 김은숙의 작품답게 로맨틱 코미디 감성이 충만했다. 너무 간지러워서 가끔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그 달콤한 불량식품 같은 느낌도 여전했다. 하지만 김은숙이 도깨비 캐릭터를 위해 세워놓은 설정은 치밀했고, 그 설정을 각 에피소드나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 기발하게 이용했다. 기분이 좋으면 날씨가 따뜻해지고,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쁘면 천둥이 치면서 비가 내리는 것, 맥주 한 잔에 취해서 방망이, 아니 칼을 휘둘러 금괴를 마구 쏟아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았던, 문을 열면 어떤 세상이든 갈 수 있다는 것. 도깨비의 능력에 저런 것들이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저걸 저런 상황에 기가 막히게 녹여내는 솜씨에 감탄했다. 무릎을 치며 깨달음을 얻었던 순간도 있었으니까.
드라마는 여기에서 나아가, 우리가 일상에서 이야기했던 운명, 전생과 후생,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뤘다. 쉽게 이야기하던 아홉수가 사실 완전한 수를 채우기 직전이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숫자라는 것, 한 생명에게는 4번의 삶이 주어진다는 것,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죄라는 것(이 부분은 동의할 수 없지만), 그리고 신의 존재는 인간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며,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 말이다. 어렴풋하게 알던 사실인지 진실인지 모르는 것들부터 우리가 운명과 삶, 절대적인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온 것들 모두를 이야기 안에 잘 버무려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만 가능한 스토리텔링과 판타지일 것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정서도 동북 아시아권에 머무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물론 CJ의 힘으로 그 경계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뭐든지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한 법이고, 이 드라마에서도 역시나 '계산을 잘못한' 움직임이 보였는데, 특히 케케묵은 관습과 관념이 2016년과 만나면서 시청자들이 고민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었다. 쉽게 말해, 진짜 거슬리는 것들을 극복하기가 너무 어려웠다는 것이다.
결국 '아홉수'라는 설정 때문에, 여주인공 은탁의 나이는 19살이고, 극 중에서 강조하듯이 '수능을 앞둔 고3'이 되었다. 반면 그녀의 짝이 될 남자주인공, 김신은 900살 먹은 도깨비다. 900살은 판타지의 영역이지만, 19살은 현실의 영역이다. 아직 미성년자 딱지도 안 뗀 소녀가 운명적인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는 게 안타까운 게 아니라 가끔 징그러웠다. 이 이야기가 최소 100년 전을 배경(1917년?)으로 했다면, 19살 소녀가 운명을 개척하고 평생 사랑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시대적 배경을 용인하는 선에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서른 살도 어린애로 취급받는 2010년대에 펼쳐놓으니까, 김신과 은탁의 러브스토리는 아저씨가 아기 하나 점찍어 키워서 잡아먹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카페에서 본 "배경이 차라리 시대극이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댓글이 정말 공감한다.
드라마는 두 개의 시간대를 주로 다루지만, 16부작에서는 시간 가속 페달을 굉장히 세게 밟았다. 결국 2016년에서 30년이 흐르고, 다시 몇십 년이 더 흘러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만나는 순간을 그렸다. 등장 인물들이 다시 만나서 행복해지는 건 좋았지만, 달콤 커피가 30년도 더 뒤에도 영업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무리수를 너무 많이 뒀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 16부에서 이렇게 무리수를 둬가면서 할 거라면 차라리 시간대를 고려 시대, 180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 2016년, 이렇게 3개로 나누어 그때그때 이야기를 진행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현생의 러브스토리보다 고려 시대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기도 하고, 메인인 도깨비 부부보다 왕여와 김선 커플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피치커플이라는 커플이름은 도저히 어색해서 못 쓰겠네.) 하지만 이렇게 구성을 짰으면 피피엘은 들어오지 않았겠지. 우리나라 드라마는 피피엘 없으면 망하니까...
그리고 항상 느끼는 아쉬움. <도깨비>도 결국 설정은 좋은데 서사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드라마로 남았다. 애초에 소재나 윤곽 자체가 16부작 전체를 채울 만한 서사가 나올 게 아니었다. 수많은 시간을 인물의 클로즈업과 예쁜 장면으로 채우는 걸 보면서 비주얼이 극강인 만큼 서사는 저 멀리 날아가겠구나 확신하기도 했다. 온갖 예쁜 장면과 인물들의 눈물과 웃음으로 80분 16부작을 채웠는데도, 인물의 정서를 깊이 이해한다거나 공감하기도 어려웠다. 이거 아니면 이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비주얼만 건져보겠다는 거였나.
김은숙 작가의 다음 작품은 사극이라고 했다. <도깨비>를 쓰면서 사극에 대한 감을 어느 정도 잡았다고. 모쪼록 이번 드라마보다 더 탄탄한 이야기를 펼치길 바란다. 그리고 공유도 좋긴 하지만 다음에는 꼭 이동욱을 원톱 주연으로 썼으면 좋겠다.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