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슬로운

변화가 가져온 신선함

by 겨울달

* 본 영화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영어 단어 중 'cut-throat' 라는 단어를 배울 때, 비주얼적으로 그 의미가 너무 생생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기억할 정도다. 말그대로 눈감으면 코가 아니라 목이 베일 정도로 치열한 경쟁. 그 사이에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합법과 불법의 회색지대를 마구 넘나드는 행위가 묵인되기도 하다. 요즘 세상에 그만큼 치열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워싱턴 D.C.는 아마 그 중 대표적인 필드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 <미스 슬로운>은 성공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유능한 로비스트, 리즈 슬로운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미지: 다음영화 / (주)메인타이틀 픽쳐스


빨간 머리, 창백하게 하얀 피부, 빨간 립스틱, 잘 갖춰입은 명품 정장, 잠은 언제 자는가 싶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리즈. 워싱턴의 대표 로비스트인 그는 단 한가지, 자신의 신념에 맞는 일만 의뢰받는다. 이번에도 리즈는 자신의 신념에 비춰 총기구입의 신분검사를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선해도 방법은 불법으로 판단될 것이 너무나 명확한 것들. 결국 반대편의 음모와 계략으로 그동안 해왔던 일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 모든 일의 결과가 리즈의 앞에 닥쳐온다. 과연 리즈는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영화 자체는 어딘가에서 많이 봐온 정치스릴러의 전형을 따른다.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상황, 부담스러울 정도로 드라마틱한 전개. 마지막에 남겨둔 회심의 펀치는 통쾌하긴 하지만, 이것보다 더 속시원한 반전(?)을 많이 보기도 했을 뿐더러, 자연스러운 전개라기보다는 온갖 뜸을 다 들이다가 "이건 예상 못했지? 짠!!" 느낌으로 꺼내놓는 것에 내가 놀라거나 신나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딘가 '뻔하다'라는 것은,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 내가 오버드라마틱한 분위기와 전개를... 싫어한다기보다는 그 분위기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때가 종종 있어서 그런 것.


영화의 전형성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은, 바로 '성별을 바꾼 것'에 있다. <"미스" 슬로운>? 몇 년 전까지 우리가 만난 리즈 슬로운같은 캐릭터는 모두 남성이었다. 우리가 그동안 이런 영화에서 보았던 캐릭터들, 이들이 벌이는 사건들, 이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들. 모든 영화의 '디폴트'는 남성이었다. 하지만 <미스 슬로운>은 이 디폴트를 제대로 흔듦으로서 '새로움'을 획득한다. 여자들도 이런 삶을 살 수 있구나, 여성 캐릭터도 영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여자 배우들도 이런 역할을 할 수 있구나, 그런 새로움.


이미지: 다음영화 / (주)메인타이틀 픽쳐스


<미스 슬로운>이 시도한 '성별 바꾸기'는 단순히 타이틀 롤, 슬로운을 '미스터'가 아니라 '미스'로 바꾼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를 자세히 보면 남자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꿔도, 여성 캐릭터를 남성으로 바꿔도 어색한 부분이 거의 없다. (물론 이 영화에서 '여성'이라는 것이 나름 중요한 카드로 사용되는 부분은 있지만, 이를 남성으로 바꿔도 어색함은 없다.) 리즈 슬로운뿐 아니라, 총기 규제 입법에 헌신한 에스미, 리즈 슬로운이 직접 키운 후배이자 나중에는 경쟁자가 된 제인 등 주요 캐릭터는 이전까지 대부분 남성 캐릭터였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한 발짝 나아간다.


영화 캐릭터들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지점에 위치하는지도 살펴볼 만하다. <미스 슬로운>의 여성 캐릭터들은 신념이 있고, 똑똑하며, 자신의 일을 제대로 처리할 줄 알며, 치열한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안다 (안 그런 캐릭터도 있다). 오히려 남자 캐릭터는 능력있는 슬로운을 경계하고, 그들의 활동을 위태롭게 만드는 음모를 짜내거나, 사익을 위해 음모에 동참한다(당연히 안 그런 캐릭터도 있다). 이렇게 말하니까 이야기의 구도가 '능력있고 선한 여자 vs 능력있고 선하지 않은 남자들'로 치우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에서 내편 남의 편은 성별이 아니라 캐릭터가 가진 신념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영화에서 대결을 벌이는 양자는 모두 남자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 또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 게 아닐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여성 영화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이 영화는 리즈 슬로운의 입을 빌려 대놓고 이야기한다. "전 성별 자체는 관심이 없어서요." 이 영화는 우리가 잘 아는 전형적인 정치스릴러/드라마 영화에서 캐릭터의 성별을 바꾸는 도전을 했고, 그래서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그에 대해서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여성 캐릭터'와 '여자 배우'가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배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스 슬로운>은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영화다. 그래서 캐릭터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배우가 더 중요하다. '믿고보는 배우' 제시카 차스테인은 리즈 슬로운이라는 캐릭터를 정말 잘 연기한다. 아름답고, 당당하고, 강인하고, 카리스마있으며, 어쩌면 재수없기까지 한 캐릭터는 제시카 차스테인의 섬세한 연기를 만나 강력한 힘을 얻는다. 리즈 슬로운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하게 되진 않더라도, 최소한 그가 해왔던 선택과 행동에 나름의 정당성을 불어넣고 관객이 나름대로 이해하게 한다. 에스미 역의 구구 바사-로, 제인 역의 알리슨 필의 연기도 훌륭하다. 할리우드에 연기 잘하는 젊은 여배우들이 이렇게나 많습니다, 여러분.


이미지: 다음영화 / (주)메인타이틀 픽쳐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도 아니고 여성 영화도 아니다. 그저 주인공을 포함한 주요 인물의 성별이 여성이며, 이야기가 '여성'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의미를 찾기보다는 재미있는 스릴러 영화를 즐긴다는 기분으로 보시는 걸 추천한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이를 잘 받쳐준 연출로 만들어낸 쫀쫀한 영화를 기대하시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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