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인가

by 겨울달

일단 리뷰부터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곱씹어 보기 전부터 이 영화가 그리는 불안한 청춘에 마음이 불편했다. 미려한 화면과 감정을 증폭하는 음악은 20대 청년 종수의 열등감과 분노를 생생하게 전하며 감정을 끌어올렸고, 나는 편치 않은 마음 때문에 의자를 여러 번 고쳐 앉으며 봤다. 복잡하고 상징이 가득한 영화를 과도하게 단순화하자면, [버닝]은 결국 종수와 벤의 이야기다. 종수는 벤에게 집착하고, 벤이 가진 모든 것을 열등감 가득한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분노를 쏟아낸다.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 해미에 대한 사랑은 핑계일 뿐, 모든 걸 가지고도 삶이 지루하다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증오를 쏟아낸다. 사회에서 소외되어 무력하고, 강인하게 일어설 자신이 없는 청년의 분노가 푸른 화면에 넘실대면, 그의 감정과 선택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기 전부터 압도된다. 이것이 영화가 의도한 경험이라면, 내게는 먹혔다고 말할 수 있겠다.


<버닝>을 오롯이 종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영화는 더할나위 없는 명작일 수 있다. 하지만 종수가 모든 젊은이들을 대표하지 않듯, <버닝>의 분노가 모든 젊은이들의 분노를 대표하진 않는다. 20대, 불행한 가정 환경, 돈 없고 빽 없는 남자의 세상을 향한 절망과 분노. 대표성을 가질 수 있을까?


종수의 분노는 결국 벤을 향하지만, 처음부터 벤에게 향한 게 아니다. 처음엔 해미였다. 분명히 그랬다, "창녀"라고. 다른 남자 앞에서 아무렇게나 옷을 벗고 다닌다고 창녀라고 했다. 그게 과연 해미를 아끼기 때문에 한 말일까? 벤에게 지른 것처럼 "해미를 사랑하기 때문"일까?


종수가 사라진 해미를 찾아다니며 진실이 조금씩 드러날 때, 해미의 말과 행동을 모두 믿을 수는 없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종수는 해미를 믿으려 하고, 믿기 위해 온갖 증거를 찾으러 다닌다. 조금만 자신의 근거를 뒷받침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찾기 위해 헤매고 또 헤맨다.


결국 종수에겐 해미가 중요하지 않다. 해미가 죽었든 아니든, 아예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종수의 분노의 열등감은 누군가에게 향했을 거다. 알쏭달쏭한 벤은 그가 잘못을 했든 하지 않았든 종수의 분노가 다다르는 지점이 됐을 것이다. 그러니 해미가 도구적 캐릭터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해미라는 여자가 존재하긴 한 걸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보며, 아주 잠깐 해미가 종수의 상상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해미는 있고,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 많은 걸 흘리고 다녔다. 결정적으로 포르쉐가 그 외딴 곳으로 향하다니... 해미의 존재 여부를 의심한 게 아주 잠깐 동안 미안했다.)


이창동 감독은 시대와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하는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버닝>에서 담아낸 이야기도 감독이 생각한 지금의 이야기라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아픔을 다른 이들에 대한 분노로 드러내는 비뚤어진 청춘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공감을 얻지 못한다. 지금의 청춘들은 노오력이 모든 것을 이뤄주지 않으며, 사회가 X같다는 것도 알고, 누구를 향해 그 칼을 겨눠야하는지도 깨달아가고 있다. 종수같은 사람은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아마 4~5년 전 이 영화를 제작해서 개봉했다면 사회를 정확히 짚어냈다고 큰 찬사를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6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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