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4주 영화 감상 기록
애뤠비안 나이트~ 애뤠비안 데이즈~
정말 할 말이 많다. 먼저,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 기대치가 낮았지만 그래도 기대치 이상이었다.
어릴 적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 기억은 없다. 어릴 때 내가 본 건 휴일 아침 디즈니 만화동산뿐이다. <알라딘>,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등 “명작”들이 극장에 나왔을 땐 극장 자체를 간 적이 없고, 그땐 드라마와 소설을 더 좋아했다. 아동소설을 전집으로 사서 두 번씩 읽을 정도였으니까. 암튼 성인이 되어 접한 90년대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과거 보정이 없는 상태로 보게 됐고, 그것보다는 내가 자라는 만큼 변화하는 디즈니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구구절절하지만 할 말은 하나다. 나는 <알라딘> 원작이 너무너무너무 재미없다.
게다가, 다들 예고편 봤잖아요. 그거 때문에 인터넷이 정말 여러 번 뒤집혔다. 그걸 보고 나서 영화에 기대치가 낮아지면 낮아졌지 높아지진 않았다. 'A Whole New World' 장면이 "아주 살짝" 공개됐지만 그걸로 기대감을 가지긴 부족했다. 그러니 걱정이 될 수밖에. 이번 영화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가이 리치, 요즘 영화에서 부진했던 윌 스미스에 신인급 배우가 알라딘과 자스민을 연기하는 상황에선 누구든 흥행을 장담할 수 없었다. <호두까기 인형과 네 개의 왕국>과 <덤보>, 감히 말하자면 <미녀와 야수>도 특별한 걸 느끼지 못했으니 더 걱정할 수밖에 없다.
이제 와 말하지만, 그 모든 게 기우라 정말 다행이다. 원작을 잘 모르기 때문에 완전히 비교를 할 순 없지만, 보기엔 충분히, 아니 원작 이상으로 화려하면서 애니가 아닌 실사 영화가 할 수 있는 느낌을 그대로 전한다. 자파나 알라딘이 원작보다 별로라는 평가가 있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이다. 모두가 걱정한 윌 스미스는 예상외로 지니와 너무 잘 어울렸다. 윌 스미스가 아닌 지니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스민은 정말 완벽하다. 역시 가이 리치의 안목을 믿어야 한다.
내가 <알라딘>에서 가장 언급하고 싶은 건 이야기다. 90분을 120분으로 늘리면서 너무 지루해졌다, 제목을 <알라딘>이 아니라 <자스민>이나 <지니>로 바꿔야 할 만큼 비중이 완전히 달라졌다 등등 여러 의견이 갈린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알라딘>은 원작을 2019년에 맞춰 가장 적극적으로 재해석했으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재해석을 거친 후 이야기는 신비로움은 덜하지만 공감대는 넓혔고, 캐릭터는 멋짐은 덜해도 관객이 캐릭터의 고민과 생각에 공감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두 캐릭터의 변화는 놀랍다. 자스민은 온실의 화초가 아니라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이끌기 위해 실력을 키우는 준비된 리더로의 모습을 보인다. 자스민의 변화가 드러나는 대사들, 솔로곡 'Speechless'는 영화의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지점이다. <알라딘>의 실사화가 기술, 연출, 캐스팅 같은 게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자스민을 이 정도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왜 2019년에 명작 애니메이션을 리메이크해야 하는지 정답을 제시한다. <미녀와 야수>의 하다가 만 리메이크보다는 <덤보>의 위험하지만 가치 있는 시도, <알라딘>이 원전 안에서 최대한 현대적인 접근을 취하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자스민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연스럽게 알라딘의 캐릭터가 비중이나 중요도가 줄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90분을 2시간으로 늘렸으니 알라딘은 나올 만큼 나왔으니 비중 면에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중요도'라는 건데, 애니메이션 <알라딘>은 알라딘이 램프도 얻고, 공주도 얻고, 왕의 자리도 얻으며 그가 모든 걸 가지는 결말로 나오지만, 영화에서의 알라딘은 다르다. 그는 왕자가 되고 싶고 공주를 얻고 싶지만 왕이 된다거나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순진하지. 순진한데 그만큼 누군가의 옆에 있기 위해 마법이라도 쓸 만큼 절박했던 것도 이해한다. 일단 귀여운 것도 그렇고 ㅎㅎ
신기한 건 두 사람의 캐릭터 해석이 조금씩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의 역학이 바뀌었다. 익숙한 비유를 찾자면, 재벌가 후계자(주로 남자)와 평범한 사람(주로 여자)이 사랑에 빠지고 재벌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는 수많은 한국 로코 서사를 사막 한가운데로 옮기고, 성별을 다수의 경우와 반대로 배치해 놓으면 <알라딘>이 된다. 관계의 인상이 바뀌면서 'A Whole New World'가 주는 느낌도 달라진다. 그저 마법 양탄자를 타고 사랑을 속삭이는 것 같았던 원작과 비교해 영화에선 자스민의 가슴속 뜨거운 열망을 알라딘과 그 밤 짧은 여행이 열어주는 듯하다. 마지막을 아그라바의 백성으로 마무리한 건 보너스.
여러모로 자스민에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씐" 어쩌고 하면서 영화의 가치를 절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설프게 하느니 안 하느니만 못하다."라는 말도 있다. 일단 "페미니즘"은 귀신처럼 누군가에게 씌는 게 아니다. 페미니즘은 남성을 혐오하는 것도, 배척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보자는 것이고, 남성처럼 여성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자스민에게도 멋진 왕자와 결혼해 왕국을 혼수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 도시의 지도자가 되는 꿈을 꾸게 하는 게 페미니즘이다. 알라딘에게 술탄의 배우자가 되어 그와 함께 도시를 이끌어가게 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알라딘>을 보며 여자아이들이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가 되는 대신 스스로 왕이 되는 걸 꿈꾸게 하는 것, 그게 바로 페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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