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왕궁 속 절대권력 쟁취를 위한 음모
루이 14세에 대한 정보는 세계사 수업과 어릴적 만화로 배우는 세계사 등에서 접한 내용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프랑스의 왕정 시대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강력한 권력을 쟁취한 왕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의 별명은 '태양왕'이며, 절대왕정 시기 프랑스의 위상을 드높였던 왕이지만, 자신의 권력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나라를 파산 지경에 이르게 한 독재자였고, 희대의 바람둥이였다는 것, 마지막으로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는 데 오랜 시간과 엄청난 돈을 들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도요.
루이 14세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광기를 그린 [베르사이유는(Versailles)]는 프랑스 프리미엄 채널 카날플러스(Canal+)와 캐나다 프리미엄 채널 슈퍼 채널(Super Channel)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시리즈입니다. 베르사이유 궁전 건축을 배경으로 루이 14세와 귀족 간의 권력 다툼을 그린 사극입니다. 프랑스 절대왕정시기에 대한 드라마와 영화들은 많이 만들어졌으나, 루이 14세를 '전면에' 내세운 'TV 드라마 시리즈'는 처음 제작된 것입니다.
만 4세의 오른 루이 14세가 즉위 28년째 되는 1667년, 그는 프랑스-스페인 전쟁과 그 사이에 일어난 프롱드당의 반란사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일반 귀족들뿐 아니라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마저 자신의 왕권에 점점 도전해 오자, 루이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천도'를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그의 아버지 루이 13세의 사냥 궁전이 있는 곳, 파리 외곽의 작은 마을 베르사이유로.
당연히 귀족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파리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고 특권을 누렸던 이들이 그 권력을 놓을 리가 없죠. 왕이 베르사이유의 사냥궁 주위를 두르는 건물을 한 채씩 올릴 때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감옥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결국 베르사이유가 완공되고 루이 14세가 정식으로 입궁하는 1682년까지 루이 14세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귀족들과 험난한 권력 투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루이가 귀족층과 벌이는 권력 투쟁은 두 가지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귀족들이 베르사이유 궁전에 입궁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귀족임을 증명해 보이는 일종의 '혈통증명서'를 제출하는 것. 오래 전부터 귀족이라는 이유로 세금 등 모든 의무에 대해 면제받았던 귀족들은 자신들이 그런 특권을 누릴 정당한 자격이 있는지 증명하기 위해서 왕이 있는 베르사이유에 직접 와서 '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증명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결국 왕의 일입니다. 수십년 간 누려왔던 '내가 누구인가'의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면 지금은 왕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사정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겁니다. 귀족 중 누구도 이런 굴욕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반발은 심했고, 루이 14세는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귀족들을 제거하여 자신만이 가지는 절대 권력을 유지하려 합니다.
게다가 그 수단은 다양합니다. 타국과의 외교, 국내의 정치, 때때로 벌이는 전쟁, 심지어 자신의 성적 행위도 이용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아프리카 국가와의 수교를 위해서는 갓 태어난 왕비의 사생아의 존재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잔인하죠. 문제는 저때는 루이가 그나마 제정신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보다 더 심한 일들을 자행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일까요?
권력에 집착하고 이를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루이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루이의 그림자로 살아야만 하는 동생 오를레앙 공 필립은 그 모욕의 역사가 기록에 남아있을 정도로 '형의 그림자'로 살았습니다. 필립은 형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온전히 소유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위한 일 하나 하지 못한 채 평생 루이의 꼭두각시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모든 기회를 박탈하고, 그의 행동 모두를 자신의 권력 강화에 이용하는 형에게 신물이 납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마저도 자신보다 형을 더욱 사랑하는 상황이고, 아내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확신할 수도 없는 지경까지 옵니다. 자신의 짓밟힌 자존심이 회복될 기회가 오길 바라긴 하지만, 그것이 형 루이의 실각과 죽음으로 오게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를레앙 공은 역사에도 기록될 만큼 유명한 동성애자였습니다. 그의 애인 중 가장 유명한 슈발리에 드 로레인도 이 드라마의 주요 인물입니다. 오를레앙 공은 영국 공주 헨리에타 앤과 결혼했지만 여장을 즐겨하고 슈발리에 뿐 아니라 동성애인을 여럿 두었는데, 그 이유가 헨리에타 앤과 루이 14세 간의 노골적인 추파를 질투해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헨리에타 앤과 루이 14세가 실제로 애인 사이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서(남아있을 리도 없겠지만) 이 부분은 극적 재미를 위해 지어낸 부분이라 추측됩니다.
또 다른 인물들은 루이의 여인들입니다. 그 중 마리아 테레사는 왕비이지만 왕의 정부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고, 자신의 나라 스페인과 남편의 나라 프랑스가 걸핏하면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는 숨죽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왕의 여성편력은 너무나 심했고, 왕비는 공식 행사에 왕의 정부와 함께 참석해야 할 정도로 모욕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왕비에게는 후계를 이을 태자가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겠죠.
왕의 공식(...) 정부인 마담 드 라 발리에르는 루이와의 사이에서 아이도 여럿 낳았지만, 교회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왕의 정부가 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루이에게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여러 번 간청했고, 루이는 마지못해 이를 허락합니다.
이미 루이에게는 또다른 정부, 마담 드 몽테스팡이 있었기 때문이죠. 어렵게 자라나 왕의 여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던 마담 드 몽테스팡은 아름다운 외모와 재치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여기에, 필립의 부인이자 영국의 공주이며 루이의 대영 외교의 사절 역할을 제대로 해낸 헨리에타 앤도 있고요. 헨리에타 앤은 왕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자신이 필립의 아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며, 왕과의 밀회로 필립에게 상처주는 것만큼 필립과 슈발리에의 애정 행각에 상처받기도 합니다. 뭐 이렇게 많아...
한편 베르사이유와 파리에서는 왕을 살해하려는 음모들이 점점 구체화됩니다. 그 선두에는 왕에게 모욕을 받은 카셀 공작과 몽쿠르, 그리고 슈발리에의 친척이라는 자격으로 왕궁에 들어온 베아트리스가 있습니다. 카셀 공작과 몽쿠르가 베르사이유 주위의 치안을 어지럽히며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귀족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는 사이, 베아트리스는 왕의 호위기사이자 비밀정보를 담당하는 파비안 마르셀을 유혹해 왕이 귀족들을 해치려는 음모를 분쇄하고 반정을 일으키려 합니다. 이들은 슈발리에까지 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필립까지 끌어들여 루이를 없애려는 계획을 성공시키려 합니다. 역사가 스포라고 이들의 거사가 어떻게 될 지는 짐작할 만하지만, 과연 루이는 자신을 없애려는 모든 이들을 솎아내고 절대권력을 세울 것인지, 그 사이에서 누가 루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지... 이런 것들이 궁금해집니다.
드라마 전체는 화려하고 압도적입니다. 화려함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광기도 더해지는 느낌입니다. 가끔 베르사이유의 정원을 이용해 입이 쩍 벌어지는 미장센을 선사하기도 하고요. 배우들 연기도 다들 나쁘지 않은데, 주연배우 두 사람은 언급할 만합니다. 주인공 루이 14세 역을 맡은 조지 블래그던은 권력에 집착할수록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연기합니다. 역사책에 남아 있는 루이의 (풍채좋은) 모습과 달리 조지 블래그던의 루이는 조각같이 잘 생겼는데(!) 그만큼 날카롭습니다. 절대권력자로서 고독함을 느끼지만 자신을 위해서 끝까지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데, 이로 인해서 고립되고, 이를 견디기 위해 더 잔인해지는 걸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를레앙 공 필립 역의 알레산더 블라호스의 연기도 인상적인데요, 블라호스가 연기하는 파리하게 아름다운 필립을 보면, 왕의 동생이지만 한없이 무능한 꼭두각시로 살아야하는 그의 인생이 불쌍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박진감 넘치는 액션도 없고, 눈을 확 잡아끄는 요소도 없고(누드 말고요), 역사적 맥락을 모르면 이해가 안 되는 사건도 더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남자가 절대권력을 추구하면서 절대적으로 고독해지는 과정이 냉정하게 그려지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이제 겨우 도입부인데도 이정도 흡입력을 가진다면, 앞으로의 이야기는 얼마나 재미있어질지 기대됩니다. 사실 제가 기다리는 부분은 루이 14세의 두번째 부인인 마담 맹트농의 등장과 마담 드 몽테스팡이 연루된 독약 사건인데, 이건 2시즌 말미나 3시즌 즈음에 다뤄질 것 같긴 합니다. 그럴려면 일단 3시즌까지 제작되어야겠죠?ㅋㅋ
- 프랑스와 캐나다가 합작해 제작하는 드라마이지만, 이 드라마의 작가는 영국인들입니다. 특히 배우 헬렌 미렌의 조카이자 미드 '크리미널 마인드'의 작가로 활동했던 사이먼 미렌(Simon Mirren)이 공동 쇼러너를 맡아서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 프랑스에서 제작되는 드라마의 편당 제작비에서 최고기록을 세웠습니다. 회당 2.6백만 유로 (현재 환율기준 한화 약 34억 5천만원)였죠. 감이 안 오면 이렇게 비교해 보겠습니다. 베르사이유의 회당 제작비는 영국 ITV의 시대극 '다운튼 애비'의 회당 제작비(회당 1만 파운드, 약 16억 7천만원)의 2배 규모였습니다. '다운튼 애비'도 당시 시대를 반영하는 아름답고 기품있는 의상과 소품으로 유명한 드라마이고, 영국에서도 제작비가 상당히 비싼 것으로 유명한 드라마인데, 그것보다 더 많이 썼다는 의미죠. 회당 34억 정도면 미국 프리미엄 케이블 채널에서도 굉장히 비싼 제작비를 들인 작품들의 규모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계산해 보니까 '하우스 오브 카드'와 제작비가 비슷할 것 같네요.
-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베르사이유 궁전이 나와야 하지만 아직 베르사이유 궁전 건축이 완전히 끝나기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베르사이유 궁전을 비롯해 프랑스의 절대 왕정 당시 왕이 사용했던 여러 궁에서 촬영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촬영 로케이션으로 유명한 베르사이유 궁전뿐 아니라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궁전들을 찾아다니면서 촬영하면서 프랑스의 아름다운 궁전들을 많이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런 점 때문이었는지 포스트 프로덕션 작업을 하던 작년, 파리에서 열린 촬영 로케이션 엑스포에서 작품을 공개했었다고 한다.
- 늘 그렇듯 작품에 비판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죠. 캐나다 방송사와 공동제작이긴 하지만 프랑스 방송사가 만든 프랑스 사극, 게다가 프랑스 절대왕정의 최전성기였던 루이 14세의 일대기인데 왜 '영어'로 만드는가에 대한 프랑스 내 비평가들의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물론 방송사는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내린 결정이긴 했었죠. 이 비싼 드라마를 프랑스 내에서 방영하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최소한 유럽 전체,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수출해야 했기 때문에 영어로 촬영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 방영 후 반응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습니다. 카날플러스는 벌써 2시즌을 주문했고, 이미 방영 몇 개월 만에 전 유럽에서 판권을 구매해 갔습니다. 미국은 올해 10월 1일 위성채널 Ovation을 통해 방영되고, 2차 배급은 넷플릭스를 통해 이뤄질 예정입니다. 아시아 등 타 지역도 넷플릭스를 통해 공급되고 있습니다(한국은 현재 심의중).
- 성행위 묘사에 있어 가장 자유로운 프랑스답게 누드씬은 애교고 섹스신은 상당합니다. 그러다보니 이게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영국의 BBC Two에서 방영되었을 때, '보수적인 영국인들의' 항의전화가 심심찮게 왔다고 하네요. 이걸 가지고 프랑스 비평가들이 영국을 솔찬히 놀려먹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