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 장면에 도착하기 전까지 여러 장면이 오갔다. 기억나는 첫 장면은 흔들리는 차 안이었다. 차 안에서 나는 동료와 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20대 중반에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동료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나에게 선배가 되는 연차였다.
시안을 들고 내가 선배에게 묻는다.
"판형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xxx 판형으로 하지."
"그러면 그림이 여기에서 잘려나가지 않을까요?"
선배는 시안을 들고 판형 가장자리가 될 부분을 손가락으로 그리면서 대답한다.
"아니, 이렇게 트림하면 이 꽃은 다 보일 거야."
다음 장면은 사무실이다. 좁은 사무실을 다른 회사와 함께 쓰는지, 아니면 내가 이 회사에 신입직원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전 장면에서 작업하던 책의 기획안인가 대지인가를 펼쳐놓고 들여다보고 있다. 옆자리에 앉은, 낯설지만 친절한 여직원이 나에게 말을 건다.
"저한테 이 작업에 도움이 되는 책자가 있어요."
나에게 가계부 두께 정도 되는 책자를 건넨다.
"고마워요."
받아보니 작업에 도움이 되는 책자가 아니다.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이걸 도대체 왜 준 거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여직원이 말한다.
"제가 큐티한 내용을 메모해 놓은 거예요."
좀 더 뒤적여 보니 성경 구절이 시험 문제처럼 한 페이지에 서너 문장 인쇄되어 있고 각 구절 아래에는 뭔가 감상이 수기로 끄적여 있다.
꿈에서 나는 고민에 빠진다. 나에게 성경이 필요할지도 몰라. 하지만 문자적 해석과 주관적 감상은 성경을 진실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게 아닐까? 고민은 나의 의식을 불러내고 나는 꿈에서 깼다. 너무 생생한 꿈이었다. 의식이 말똥말똥해져서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시계를 보니 5시 52분이었다.
꿈을 곱씹어 보았다.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삶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신앙에 기대고 싶어 하는 나를 보았다. 어릴 적 할머니가 중얼중얼 부르시던 찬송가는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내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내 외할머니의 인생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어린 나이에 도박빚 때문에 기울어가는 종갓집 나이 든 사내의 후처로 팔려갔다. 전처 자식들은 이미 자신과 나이가 비슷했다. 새색시는 종가의 안주인이 되어 엄청난 살림을 감당하며 아들 셋을 낳었다. 하지만 아들 셋 모두 어려서 세상을 뜨고 끝으로 나의 엄마를 낳았다. 나이 든 남편은 자신과 똑 닮은 늦둥이 딸을 무척 사랑했다. 남편이 육이오 동란 중 세상을 뜨자 그녀의 지위는 곤두박질쳤고 결국 몇 년 후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고등학생인 딸을 데리고 그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몇 줄로 축약될 수 없는 그녀의 고단한 삶에서 유일한 소망은 신앙이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할머니가 흥얼거리시는 찬송은 그분의 인생만큼 선명하고 단단한 진실이었다. 그 진짜 신앙은 종교와 신학을 무색하고 초라해 보이게 하는 힘을 지녔다.
그 동시에 내 이성은 그런 신앙이 진실과 멀다고 이야기한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 옳지 않음을 보여주는 과학적 증거와 성경의 문학성, 유대이즘과 기독교 발생 과정의 역사, 이런 것들도 다른 차원의 진실이라면 그 두 진실이 어떻게 양립하여 신앙이라는 힘을 만들어내는지 난 결정할 수 없다. 현실에서 나는 두 진실 사이에서 말없이 오가며 괴로워하고 꿈이 그렇다고 보여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