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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Aug 02. 2021

레몬 중심

요즘 내 생활의 중심은 아무래도 레몬이다.

뒤뜰에 레몬이 주렁주렁 열리는 레몬나무 덕분이다. 레몬은 보기만 해도 싱그럽고, 냄새를 맡으면 더욱 싱그럽다. 음료나 음식에 넣으면 입이 오므라들도록 톡 쏘는 신맛은 또 얼마나 좋은지. 이렇게 좋아하는 레몬이 마당에서 흐드러지게 열리다 못해서 요즘 투둑 투둑 떨어지고 있으니 내가 정신 못 차릴 만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닥에 떨어진 레몬 중에 흠집이 없으면서 만지면 약간 부드러운 탄력이 느껴지는 걸 줍는다. 우리가 레몬색이라고 부르는 고운 빛깔의 싱싱하고 단단한 레몬은 예쁘기는 하지만 즙이 풍부하지 않고 향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레몬색에서 개나리꽃 색으로 갈 정도는 익어야 레몬의 신맛이 부드러우면서 풍부해지는, 친절한 신맛이 나는 것 같다. 아무리 신맛이 친절해진다고 해도 레몬은 시다. 사과나 오렌지처럼 우적우적 씹어 먹을 수 없는 레몬으로 무얼 할지 처음에는 별로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척박한 땅에서 이렇게 상큼한 즙을 가득 안고 자란 레몬이 그대로 폐기물의 운명을 맞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누어주기도 하지만 레몬나무 있는 집이 많기도 하고 나누어줄 사람이 없기도 하다. 이제 이 기특한 레몬나무와 3개월을 동거하고 나니 레몬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생겼다.


레몬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레몬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사 올 때 한창 꽃이 피어서 벌이 웅웅 거렸는데 요즘은 아기 주먹만 한 초록 레몬이 노란 레몬들 틈에 꽤 많이 열려있다. 레몬나무가 있는 마당 구석에는 스프링클러도 설치되어 있지 않고 땅이 시멘트처럼 딱딱한데도 뿌리를 얼마나 깊이 내렸으면 이렇게 과즙이 풍부한 레몬을 키우는지 참 기특하다. 대추만 한 아기 레몬, 반을 자르면 즙이 주르르 흐를 것 같은 샛노란 레몬까지 눈길을 주고 마음을 행복으로 부풀리는 일. 그건 레몬나무만 있으면 부지런을 떨지 않아도 그냥 할 수 있는 거다.


예쁜 레몬을 주으면 탁자 위에 조르르 모아 놓고 하루 이틀 향을 즐기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물론 나무에 달려 있는 레몬도 그린다. 레몬을 그리기는 쉬운 듯 어렵다. 수채화를 이제 1년 남짓 그린 실력이어서 레몬의 상큼함이 마음처럼 표현되지 않아서이다. 아주 자세하게 그리는 것보다 수채화 물감의 특성을 살려서 대충 그린 더 마음에 들긴 하다. 실은 이 레몬나무는 가지치기를 오랫동안 하지 않아서 수형이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나무 전체를 그리기는 어렵다. 지금 초록인 레몬들이 내년 봄쯤 노랗게 익으면 그때 가지치기를 하고 한두 해 지나야 나무 모양이 조금 잡힐 것 같다. 그때까지는 레몬나무 대신 레몬을 많이 그려봐야지.

부엌에서 레몬의 쓰임새는 끝도 없는 것 같다. 레몬을 깨끗하게 닦아서 겉껍질만 삭삭 긁어서 굽는 레몬 버터 스콘, 레몬을 편으로 썰어서 설탕에 절여서 만드는 레몬청은 레몬이 주인공이 되는 아이템이다. 주재료는 아니더라도 레몬 과육만 동강동강 썰어서 얼려두었다가 스무디에 얼음 대신 넣어도 편리하고 상큼하다.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레몬에 십자형으로 칼집을 넣어서 소금을 뿌리고 월계수 잎과 타임, 통후추를 몇 개 넣어서 보관해도 매우 쓸모가 많다. 레몬에는 구연산(Citric Acid) 성분이 풍부하여 유리병에 통 레몬을 담은 후에 레몬즙을 따로 짜서 잘박 잘박하게 부어 두면 따로 방부제가 필요 없이 저장성이 좋다. 이렇게 숙성된 절임 레몬은 풍미가 풍부해서 비프 부르기뇽, 갈비찜, 치킨 마살라 같은 고기 요리에 조금씩 넣으면 잡내도 잘 잡히고 요리의 풍미가 확 산다. 레몬 껍질을 빼서 샐러드 소스에 넣어도 맛있고, 샌드위치에 피클 대신 넣을 수도 있다. 잼이나 피클을 만들 때도 저장성을 좋게 하고 식초보다 상큼한 신맛을 주어서 알짜 조연 역할을 한다. 얼마 전에 마당에서 열심히 열리지만 식구들이 잘 안 먹는 금귤을 한 바구니 따고 레몬을 섞어서 마말레이드를 만들었다. 서너 병 나왔는데 지인들이 가까이 살면 나눠주고 싶은 맛이었다.


생선 위에 즙만 뿌리거나 즉석 레모네이드를 만들고 남은 레몬 펄프가 붙어있는 껍질도 바로 쓰레기로 분류되지 않는다. 레몬 껍질은 훌륭한 세제 역할도 하기 때문에 무쇠 프라이팬이나 그릇까지 싹 닦으면 개운하다. 이제 레몬은 노란 레몬 빛도, 상큼한 냄새도 잃고 생선 냄새, 음식 찌꺼기를 묻히고 모양도 알아보기 어렵게 변해있다. 레몬은 끝으로 싱크대 음식물 분쇄기에 들어가 분쇄기 청소까지 하고 사라진다.


레몬,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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