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스크린 영어회화 클래스에 다닌 적이 있다. 모두 갓 미국 온 아줌마들이어서 미드를 봐도 들리는 것도 없었고, 선생님이 물어봐도 다들 쭈뼛쭈뼛 더듬더듬 몇 마디 못 했다. 우리 아줌마들을 흥분시킨 주제는 "씨월드"(시댁 이야기)였다. 시댁 주제만 나오면 아줌마들은 서툰 영어 실력으로 핏대를 올렸다. 당시 영어 강사는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었는데 역시 한국 아줌마 입을 열려면 시댁 이야기를 주제로 해야 한다고 놀리기도 했다. 결혼한 여자라면, 억세게 운이 좋은 여자가 아니라면, 억세게 성격이 좋은 여자가 아니라면, 시어른들, 특히 시어머니 때문에 속상하고, 억울하고, 복장이 터질 듯한 경험을 해봤을 것 같다. 나도 그런 얘기가 한보따리 있다.
처음 어머님을 뵈었을 때 참 낯설었다. 난 당시 남자 친구보다 두 살이 적은데 어머님은 우리 엄마보다 꽤 젊으셨다. 스물이 채 안 되어 남편을 낳았다고 하시니까 서른이 거의 다 되어 나를 나은 엄마보다 훨씬 젊으셨다. 남편은 젊은 어머님을 꼭 어머니라고 불렀다. 우리 집은 가족 사이에 호칭이 몹시 자유로운 편이고, 당시 고등학생이던 막내는 물론, 나도 그때까지 부모님께 존댓말을 쓴 적이 거의 없었으니, 젊은 어머님에게 존칭은 물론 일거수일투족 깍듯하게 모시는 분위기가 몹시 낯설었다. 남편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은 것은 결혼하고도 아주 한참 후여서 어머님의 살아온 세월은 잘 알지 못했지만 어머님의 얼굴에는 삶의 그늘이 고집스럽게 말라붙어 있었다. 젊고, 고단해 보이는 이분은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꼬치꼬치 묻지도, 빤히 뜯어보지도 않고 둘이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만 원짜리 몇 장을 선뜻 쥐어주셨다. 다른 건 알 수 없지만 배려심이 많고 까칠한 성격과는 거리가 먼 분이라고 느꼈다. 아버님은 결혼 직전에 뵈었는데 말씀이 거의 없는 분이었다. 두 분 모두 나에게 "임의롭게" 하라시며 편하게 대하라고 하셨다. 아버님은 몇 해 전 돌아가셨는데, "임의롭게"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어봐서 그런지 아버님을 떠올릴 때마다 "임의롭게 해, 임의롭게" 하시던 목소리가 기억난다.
시어른들의 이런 친절함이 자유로움으로 다가왔다. 친정 부모님은 반듯하고, 깍듯하고, 철저하고, 자신에게 엄한 분들이었다. 항상 나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있으며 나는 시시각각 그 수많은 기준들을 귀에서 두뇌로 처리해야 한다. 그분들의 가르침은 내가 가정을 지탱하고 사회인으로 사는 든든한 밑바탕을 만들어주었지만, 한편 나는 그런 삶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그때 시댁의 방식, 즉 임의롭고, 낮에도 이불을 거실에 끌고 나와 누워서 쉬기도 하고, 음식도 반찬 이것저것 하지 않고 고기 굽고 상추 씻어서 단출하게 먹고, 뭔가 대충, 편하게 사는 방식이 참 매력적으로 보였다.
이 친절한 "남의 편"의 어머니와 마음속 1 라운드가 시작된 건 큰 아이를 낳고 나서였다. 출산을 앞두고 친정 엄마에게 산후조리를 부탁해 놓았고, 예정일보다 며칠 일찍 이슬이 비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오늘 아이 낳으러 가니까 퇴원하면 산후조리하러 와죠."
"어머, 며칠 기다리면 안 되니? 우리 합창단 공연이 아직 안 끝나서 내가 못 가."
"애가 나오는데 어떻게 기다려!"
"의사한테 얘기하면 며칠 미룰 수 있게 주사 놔줄 거야. 내가 단장이라서 지금 못 빠져."
친정 엄마한테 골이 난 나는 알았다고 했지만 갑자기 산후조리원이나 도우미를 예약할 수도 없었다. 결국 어머님한테 SOS를 쳤다. 어머님은 흔쾌히 오시겠다고 했다.
아이를 낳고 어머님이 산후조리를 해주러 오셨다. 아니, 손자 보시면서 아들 챙겨주러 오셨다.
냉장고를 열어서 오래된 군고구마 봉지를 찾아내셨다.
"어머니, 그거 오래된 건데 미쳐 못 버린 거예요. 드시지 마세요."
"얘, 여자들은 원래 이런 거 먹는 거야."
일주일도 넘은 군고구마 한 봉지를 다 드시는 걸 보면서 내가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냉장고를 싹 치우시고 남편이 어멈 좀 주라고 장 봐온 것을 모두 냉장고에 넣으셨다. 하루 종일 아들이 저녁에 퇴근하면 뭐 해줄까만 생각하셨다. 나는 방금 첫 아이를 낳은 철없는 산모였고 심사가 뒤틀렸다. 남편이 사 온 거 나도 먹고 싶은데 냉장고에 딱 넣어놓고는 나에게는 미역국과 밥만 먹게 하셨다.
아이를 도무지 바닥에 내려놓지 않으시고 계속 안고 계시고 청소나 음식 준비를 하실 때는 나에게 안으라고 하셨다.
"어머니, 병원에서 그러는데 자꾸 아이 안아주면 아이가 손도 타고, 출산 후에 아이 많이 안아주면 나중에 손목도 시큰거린대요."
"아이고, 젊은것들이 약아 쳐 먹어서... 그 손모가지 뒀다가 얻다 쓸라고 지 새끼도 안 안아준다니."
그렇게 3일이 지나고 나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남편아, 어머님이 계속 여기 계신다면 난 애 데리고 집을 나가겠어."
남편은 판단력이 매우 빠른 편이다.
"아, 어머니 왜 저러신대. 내가 알아서 할게."
남편이 어머님께 드린 말씀은 이거였다.
"어머니, 애가 자꾸 깨서 어머니 잠도 잘 못 주무신다고 어멈이 걱정 많이 해요. 낼모레부터 장모님이 오신다니까 제가 집에 모셔다 드릴게요."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어머님을 구태여 차에 태워서 집에 모셔다 드리고 다음 날 드디어 합창단 공연을 모두 마쳤다는 우리 엄마를 모시고 왔다.
엄마가 와서 내가 좋아하는 반찬도 해주고 나를 위하는 말도 해주니까 살 것 같았다. 엄마는 나를 생각해주는 내편이었다.
1 라운드가 마음속에서 나와 현신한 것은 큰 아이가 1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어머님은 큰 아이가 태어나고 매일 전화를 하셨는데 그날을 오전 11시 현재 일곱 통을 하셨다. 물론 친절한 질문이었다. 애 내복은 잘 입혔냐, 기저귀를 갈아줬냐, 분유는 잘 먹었냐, 젖은 좀 나오냐... 그 친절한 질문에 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나도 나름대로 친절하게 한 말씀드렸다.
"어머니, 벌써 일곱 통 하셨는데 쟤가 잘 알아서 하니까 자꾸 전화 안 주셔도 돼요."
일단 알았다고 끊으셨는데 1시간쯤 후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목이 멘 어머님 음성이 들렸다.
"내가, 내가, 내가 걔를 어떻게 키웠는데.... 근데 네가, 네가..."
수화기 반대편에서 흐느끼는 음성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전화를 그냥 끊고 남편에게 곧바로 전화를 했지만 남편은 회의 중인지 받지 않았다. 도련님에게 전화했다.
"형수님, 놀라셨겠어요. 엄마는 또 왜 그런데...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나보다 한참 어린 도련님은 의젓하게 대답을 했고 도련님이 어떻게 어머님을 달래 드렸는지 모르지만 어머님은 그날 일을 다시 거론하지 않으셨다.
결혼한 지 스무 해가 넘었고, 이런 에피소드는 몇 년에 한 번씩 발생했다. 에피소드가 남긴 독한 감정의 찌꺼기들은 차곡차곡 쌓였다. 가장 강렬한 미움을 느낀 건 딸 2개월 때 수술을 마친 후였다. 그때 아들은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딸이 입원하고부터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 와서 아들을 봐주고 계셨다. 나는 수술 전에는 조바심에, 수술 후에는 주렁주렁 달고 중환자 실에 있는 아이를 보고 안도감과 안타까움에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쏟았다.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내가 해줄 게 없으니 눈 좀 붙이러 집에 들렀다. 집에 들어서니 거실에서 아들과 누워있는 어머님이 보였다. 현관문 열리는 동시에 현관문 불이 켜지자 어머니는 반쯤 잠이 들었다가 깨시면서 우리를 보셨다.
"얘, 애 먹을 거 없으니까 반찬 좀 해놓고 가라. 네가 해놓고 간 콩자반 다 먹었어."
아마 내가 예상했던 어머님의 대사는, 아기가 좀 어떠니, 마음 많이 아팠겠다, 였을 것이다. 전혀 각본에 없던 대사가 귀에 들어오고 엉겁결에 네, 내일 해놓을게요, 대답을 했지만 내 마음에는 서운함, 모진 고생을 하고 병원에 누워있는 딸에 대한 미안함, 일주일도 넘는 콩자반을 줄기차게 먹었을 아들에 대한 미안함,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폭탄주처럼 섞여서 끓어올라 밤에 잠을 잘 수도 없고 한 동안 마음이 돌덩이 들어간 것처럼 아팠다.
몇 개월 후 딸을 돌봐주던 이모님이 그만두시고 새로운 이모님을 찾던가 일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 난 다시 어머님을 떠올렸다. 사실 이모님은 어머님이 딸을 미워하신다고 몇 차례 나에게 고자질을 하신 적이 있다. 가끔 어머님이 오시면 아들과 딸을 대하는 게 너무 다르더라고, 대놓고 차별하시더라고, 이렇게 연약한 아기한테 그렇게 대하는 할머니는 처음 봤다면서 나에게 흥분하신 적이 몇 번 있었다. 어머님 평생에 아들 둘 기른 것이 가장 자랑이시니까 딸이 예쁜 것을 몰라서 그러실 수 있겠지. 어머님께 아이들 봐주십사 부탁드렸다. 어머님이 하시던 일이 있어서 얼마간의 소득도 보전해 드렸다.
그렇게 주중에 같은 공간에 살면서 기대한 대로, 또는 기대하지 않은 걸 보기도 하고 겪기도 했다. 일을 마친 나에게 하루 종일 손주들 돌본 이야기를 하는 어머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묻어났다. 갓 돌 지난 딸이 인형을 아기처럼 업고 얼르고, 뽀로로를 보고 춤을 추는 걸 손뼉 치며 장단을 맞춰주셨고, 내가 놀아줄 줄 모르는 놀이를 놀아주셨다. 아이들 눈높이를 맞추는 데에는 나보다는 어머님이 선수셨다. 한 번은 어머님이 화장품을 꺼내놓고 화장을 하는데 딸이 쪼르르 가서 앞에 앉았다. 내가 화장을 하지 않으니까 딸에게 화장품은 신기한 물건이었던 것 같다. 어머님은 손녀한테 화장품을 설명해주셨다.
"이건 구루모야. 이거 봐라. 이거 바르면 피부가 반들반들해져."
"이건 환대숑이고, 이건 딱분이야. 이렇게 뽀얘지는 거 보이지? 너도 발라줄까?"
화장이라는 낯선 행위보다 더욱 낯설지만 들어본 단어였다. 외할머니도 화장품 이름을 저렇게 부르셨던 거 같다. 어머님을 외할머니가 사시던 외정 시대 분으로 생각하면 뭔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한 번은 까이유라는 캐나다 배경의 만화 비디오를 틀어줬는데 TV를 보시던 어머님 표정이 갑자기 넋 나간 듯 보였다. 옆에서 불러도 넋 나간 듯 보시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애들은 저렇게 커야 되는데 난 큰 애를 저렇게 못 키웠어. 장남 노릇하라고 맨날 다그치기나 하고... 그때도 저만했을 텐데"
결론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잘해줘라"
어머님은 묵묵히 손주들을 봐주시고 집안일을 돌봐주셨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으셨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프리랜스 에디터라는 며느리가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왜 집에 있는 날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지 어머니는 알 수 없었다. 이해 못하기는 친정엄마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네가 무슨 의사니, 변호사니? 네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애를 내팽개치고 돌아다니니?"
어쨌건...
어머님이 아이들을 봐주신 지 1년이 채 못 되어 우리는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남편이 먼저 출국하고 우리가 출국하기 전 한두 달은 서로에게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일한 거 마무리하고 돈 받을 거 받고, 한국에서 인사드릴 곳을 챙기고, 미국 생활을 준비하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어머님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던 것 같다. 물론 아들의 부재에서 표현의 자유를 느끼신 것도 있겠고...
이렇게 험한 이별을 하고, 어머님이 2년 후에 미국에 와서 한 달간 머무셨는데 피차 마음의 앙금은 곳곳에서 모락모락 올라왔다. 어머니는 조용한 투덜이 스머프 역할을 하셨고 한 달을 어떻게 지나갔다.
다음 해 한국에 나갔을 때, 어머님은 나를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경계를 풀어도 될까? 멈칫하는 나에게 어머님은 코리아나 화장품 한 세트를 내밀며 말씀하셨다.
"얘, 내가 정말 미안하다.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너한테 미안해서 잠이 안 오더라. 난 네가 내 아들 덕에 미국 가서 집 넓은 데 살고 호강하는 거 같아서...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까 말도 안 통하고 낯선 데서 네가 얼마나 힘들겠냐..."
뭔가 한참 말씀하셨다.
10년 넘게 굳은 덩어리가 다 녹는 걸 느꼈다. 어머님은 어른이시고,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가족이셨다.
사실 죄송한 사람은 나였다. 며느리 노릇 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많은 판단을 했던지...
그 후로도 어머님이 외정 시대 마인드가 변한 건 아니다. 나도 나이 먹는 만큼 철이 들거나 수더분한 성품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까지 다시 응어리질 일을 만들지 않는 건 그 응어리를 만드는 건 상대방의 사람됨이 아니라 둘의 차이 때문에 빚어진다는 걸 배웠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인생을 경험한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고 보면 이해한다는 말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단어인지. 사람은 자기 시각을 내려놓고 무엇을 이해할 수 없고, 빨간 렌즈로 아무리 열심히 들여다 보아도 빨갛게 보일 뿐이다. 내가 어머님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어쩌면 나는 선입견을 더 굳혀갔을지도 모른다. 영어에서 주어에 3인칭 단수가 오면 다른 형태의 동사를 쓰는 게 떠오른다.
"She does"
그건 무관심이나 배척이 아닌 인정과 존중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아들을 잃었을 때 내 슬픔도 컸지만 나는 어머님을 볼 면목이 없었다. 내가 아이를 잘 기르고 있다고 얼마나 자신만만했었는지 부끄러웠고, 어머니에게 어떤 손자인지 아니까, 하늘, 아니 그보다 높은 손자였다는 걸 아니까... 그런 손자를 잃은 어머님은 이렇게 위로해 주셨다.
"네가 살아보니까 인생이 뭐 있던? 걔가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니. 걔는 걔한테 좋은 데로 간 거야."
아들은 내 얼굴도 조금, 남편 얼굴도 조금 닮았지만 어머님 얼굴은 많이 닮았었다.
글 마무리는 포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