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마당 일기를 쓴다. 쓸 게 없었다기 보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어느 이야기부터 할지 결정을 못 내린 쪽에 가깝다. 소담스러운 열매가 익는 마당 식구들을 자랑하고 싶기도 하지만 오늘 가장 쓰고 싶은 이야기는 흙과 거름이다.
이 집 뒷마당에는 뒷집과 경계한 울타리를 따라 아무것도 심지 않은 빈 식재 공간이 있었다. 울타리 밑으로 한 5-6 미터 남짓 되니까 꽤 너른 공간이지만 담장이 동남쪽에서 오는 햇빛을 막고 있고 잔인하게 강한 서향 빛만 받는 곳이어서 식재 공간으로 그다지 좋은 자리는 아니다. 뭘 좀 심을 수 있을까 해서 꽃삽으로 땅을 몇 번 긁적여 보았다. 어찌나 딱딱하게 굳었는지 표면은 토기로 된 거북등처럼 갈라질 뿐 파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3평은 족히 될 것 같은데 그냥 놔두기는 아깝지. 메마른 흙이 목을 축이면 부드러워져서 파내기 좋으려나. 물을 뿌렸지만 먼지처럼 딱딱한 땅을 덮은 마른 흙은 물에 젖지 않고 그대로 지표를 따라 낮은 곳으로 흘러갔다. 마른 흙이 물을 밀어낸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래도 조금씩 물을 뿌려가며 매일 조금씩 꿋꿋하게 땅을 골랐다. 매일 물을 조금씩 뿌리니까 땅이 물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물이 땅에 닿자마자 먼지와 함께 조르르 흘러내렸는데 어느 정도 지나자 물을 뿌리면 흙이 조금은 젖는 게 보였다. 흙속은 진흙과 비슷한 흙이어서 물이 전혀 빠지지 않기 때문에 곧바로 무엇을 심을 수는 없어 보였다. 시간이 지나서 야트막한 구덩이를 팔 수 있을 정도로 흙이 부드러워졌을 때 토질 개선도 할 겸 여기에 거름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화초나 채소를 기르면 흙과 거름을 사는 데 제일 큰 비용이 나간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거름은 의외로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부엌에서 나오는 계란 껍데기, 버섯 껍질, 바나나 껍질, 각종 야채 껍질과 커피 찌꺼기를 모아서 핸드 블렌더로 잘게 부순 뒤 흙과 섞어두면 열흘만 지나도 잘 썩은 거름 냄새가 난다. 믹서에 갈아도 되지만 수분이 너무 많으면 거름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핸드 블렌더를 쓰는 게 제일 낫다. 원래 거름 만드는 건 아들 일이었다. 그 아이는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쿠키 반죽처럼 뭉쳐있는 거름 덩어리를 풀어주곤 했다. 나도 맨손으로 거름을 만져봤다. 찐득한 거름 덩어리가 손에 달라붙었다. 다시 손을 씻고 장갑을 끼고 거름 덩어리를 흙에 비벼서 공기와 잘 접촉하도록 풀어주었다. 잘 풀어주지 않으면 좋은 거름이 되지 않고 곰팡이가 피기도 하고 식물 뿌리에 달라붙어 뿌리를 썩게 만들기도 한다.
흙을 고르기 시작하면서 땅 판 것이 아까워 여기에 심었던 로즈메리와 패션 플라워는 모두 실패했다. 거름과 물을 조금씩 섞어주고 약 2개월쯤 지난 뒤 거름에서 싹튼 어린 참외와 토마토를 심었다. 핸드 블렌더의 칼날을 뚫고 살아남은 씨앗의 생명력이 대단하다. 이제 3주 정도 되었는데 화분에 심은 그루들보다 훨씬 짙고 싱싱한 잎사귀를 낸다. 하지만 동향 빛을 받는 화분에 심은 참외는 잎이 가녀려도 참외 몇 개를 달고 있는데 이 공간에 심은 참외는 초록 잎만 무성하다. 아무래도 이 공간에 채소는 기르기 어려울 것 같아서 지난주에 포기 나누기를 한 알로에와 제라늄에서 다듬어 낸 난 가지를 심었다. 꺾꽂이할 때는 꽃이 피기 전에 하는 것이 원칙인데 아직 꽃을 여기저기 달고 있는 제라늄이어서 걱정했다. 하지만 이제 일주일이 좀 지났는데 초록 잎이 제법 올라온다. 가지를 살짝 뽑아 보니 하얀 뿌리가 여기저기 보인다. 알로에도 초록빛이 돌면서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바싹 마른 갈색 잎들이 엉겨 붙어 있었는데 알로에가 이제 숨 쉬는 게 보인다.
신선한 흙에서 생명을 회복한 제라늄과 알로에는 우리 집에 오는 이들에게 분양하기로.
(* 커버이미지는 여기에서 자라는 토마토가 아니라 마당 반대편에 심은 방울토마토를 그린 것이다. 이곳에서 자라는 토마토는 잎만 시퍼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