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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에서 마드리드까지 렌페(Renfe)라는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기차로 2시간 30분이 조금 못 걸리는 거리이다. 세비야가 작은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기차역은 유럽 다른 도시에서 보았던 기차역 규모나 시설에 뒤지지 않았다. 참, 세비야는 공항 인테리어도 예술적인 느낌이 난다. 비행기는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좌석 등급을 상향하려면 큰돈이 들지만 기차는 몇십 유로 차이여서 작은 사치를 부려서 가장 비싼 좌석을 구입했다. 좌석이 널찍하고 유리창까지 완벽히 깨끗해서 창밖을 구경하기에 좋았다. 딸은 이제까지 경험한 승차, 탑승 경험 중 최고라며 기차를 타고 달리는 매 순간 즐겼다. 세비야 인근에서는 우거진 푸른 숲과 마을이 보이다가 북쪽 내륙으로 올라갈수록 카펫처럼 펼쳐진 마른풀 위로 올리브 나무가 정렬해 놓은 듯 솟아 있는 풍경이 나타났다. 올리브 나무를 빼놓고 본다면, 마른풀 위로 이따금 소가 풀을 뜯고 관목이 드문드문 보이는 바깥 풍경은 캘리포니아, 특히 북가주와 매우 비슷했다. 단, 캘리포니아는 남가주와 북가주 중간 부분의 베이커즈필드라는 농경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땅이 활용되지 않는 반면, 스페인은 올리브나무를 심지 않은 땅이 없이 구비구비 언덕 너머까지 올리브나무가 보였다. 미국에서는 스페인산 올리브유도 많이 접하지만 스페인산 와인이나 와인 비니거(Wine Vineger)도 흔히 접하여서 포도밭 풍경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철도 주변에는 올리브 나무만 흐드러지게 볼 수 있었다.
점심때가 약간 지나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와 세비야와는 사뭇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내린 역은 마드리드의 아토차(Atocha) 역이었는데, 기차역이 웬만한 도시의 공항의 방불케 할 만큼 크고 복잡했고 사람들은 바빠 보였다. 우리가 여행한 앞의 두 도시보다 관광객에 비해 비즈니스 여행자가 많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아토차역에서 처음으로 유료 화장실을 만났다. 파리나 런던 등 대도시의 화장실은 유료화장실이라도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보다 훨씬 낡고 더러운 곳이 많은데 아토차역 유료 화장실은 호텔 라운지 화장실만큼 깨끗하고 현대적이었다. 기차 승강장에서 우버 택시 승차장이 더 가까워서 우버 승차장으로 갔다. 미국의 우버는 공유 승차(Shared Ride)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자동차를 이용하여 차량 외부에 우버 차량임을 나타내는 표시는 작은 스티커 하나뿐이다. 반면 마드리드의 우버는 개인 차량이 아니라 공항 택시나 일반 택시처럼 우버 택시 디자인이 도색되어 있었다. 우버 앱에 여권번호를 넣어야 했고 대기 시간이 결코 짧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일반 택시 승강장으로 가서 택시로 숙소에 도착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는 설명보다 훨씬 넓고 좋았다. 에이비앤비 사이트 설명에는 면적이 조금 넓은 호텔 객실 크기(300~400평방피트)로 나와 있는데 설명에는 아파트 독채라고 되어 있었다. 비용은 청소비와 수수료까지 200유로 정도이고 지도에서 보니 아주 큰 공원이 인근에 보여서 정보가 미심쩍었지만 조금 망설이다가 예약한 곳이다. 마드리드에 오면서 가봐야지 했던 유일한 곳인 프라도미술관과도 도보 5-10분 거리였다. 지난 봄학기에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시각예술개론(Introduction to Visual Art)을 수강할 때 교과서에 소개된 고야의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고야는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 그림도 고야 그림이란 말이야, 하는 호기심도 느꼈고. 고야가 스페인 사람이고 프라도 미술관에 고야 그림이 많다고 하여 가보고 싶었다. 또 딸아이의 영어 선생님이 마드리드에 가면 프라도 미술관에 반드시 들러보라고 추천한 곳이기도 하다. 아파트 건물 입구에서 주인집 초인종을 누르고 올라가니 젊은 호스트가 아기를 안고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실이 나오고 전실에 다시 두 개의 현관문이 나오는데 하나는 주인이 쓰는 집이고 하나는 우리가 머물 집이다. 에어비앤비는 여러 번 이용해봤지만 이용할 때마다 다른 형태의 주거시설을 만나게 되는 점이 흥미롭다. 미국이나 한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심플한 인테리어에 이케아 가구와 오래된 원목 가구를 적절히 혼합하여 배치해 놓았다. 일반 가정에서 쓰는 풀사이즈 냉장고가 들어 있어서 더운 날씨에 물을 금방 차게 해서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마드리드 구도심이 이렇게 깨끗할 수 있을까 싶게 주변도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도에 녹지로 표시된 공원이 레티로 공원이라는 유명한 공원이고, 프라도 미술관뿐 아니라 마드리드 왕궁, 산미구엘 시장 등이 모두 도보 15분 거리 내에 있었다.
짐을 풀고 일단 전날 예매해 둔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했다. 오디오 투어 한국어가 제공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셋이서 각각 오디오 투어 기기를 들고 각자 돌아다니다가 마주치면 서로 좋았던 그림에 대해 짧게 나누고 다시 돌아다녔다. 6년 전 아이 둘을 데리고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생하던 기억이 났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당시 내가 좋아하던 인상파 그림이 가득했는데 그때 열 살이던 딸이 움직이지 않으려고 생떼를 써서 끌고 다니느라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그러던 아이가 이번에는 내가 놓친 그림 중에 자신에게 인상 깊었던 그림을 소개해 주며 꼭 보라고 알려주기도 한다. 특히 딸과 동감한 부분은 종교 그림에 관한 거였다. 스페인 화가들이 그린 성경 이야기는 해석과 표현이 자유롭고 다양하여 다른 유럽 종교화에 비해 훨씬 재미있었다. 고야의 블랙 페인팅은 한두 점, 두세 점이 아니라 전 컬렉션을 모두 볼 수 있어서 횡재를 한 느낌이었다. 화가들이 그림을 통해 들려주는 신화와 역사, 인생 이야기에 젖어든 행복한 오후였다.
(이날은 찍어둔 사진이 하나도 없네요)
저녁 먹고 숙소로 돌아와서 기념품으로 산 퍼즐을 맞췄다. 모든 가족 일정까지 마친 뒤 나에게는 중요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취소된 항공편을 재예약하는 일이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다음 날, 귀국 항공편이 취소되었다는 공지가 왔다. 처음 이메일에는 항공사 쪽에서 노력은 하고 있으나 지금 대부분의 항공편이 만석이어서 재예약이 어려운데 계속 노력한다는 이메일이었다. 매사에 태평한 남편은 항공사에서 알아서 해줄 거라고 했지만 우리 집의 클레임 전담반인 나는 항공사를 상대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몇 번 경험했었다. 웹사이트나 앱에서 할 수 있는 옵션, 즉 활성화되는 버튼이 "취소" 하나였다. 취소하면 전액 환불해주겠다고 인심 쓰는 듯 써놓았다. 스페인까지 실어다 놓은 다음에 항공편을 취소해 버리면 어떻게 돌아가라는 건지 어처구니없었지만 항공사가 알 바 아니다. 이런 경우 비즈니스 클래스 탑승자나 그 항공사와 여러 번 여행한 기록이 있는 경우 항공사에서는 대개 우호적으로 알아서 처리해준다. 하지만 일반 승객의 경우는 전혀 이야기이다. 특히 우리는 어린아이를 동반하지도 않았고, 에어캐나다는 7년 전 캐나다 여행할 때 이용한 뒤 전혀 이용 기록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항공사의 배려 대상이 아니었다. 고객센터 전화를 하니 몇 번은 대기 시간이 길다면서 아예 연결이 안 되고 끊어지거나 대기 시간이 4시간 이상이라고 나오기도 했다. 메뉴 중에 탑승이 48시간 이내인 경우가 따로 있는 걸 보아 탑승 48시간 이상 남은 경우 전화를 받아줄 의향이 없는 것 같아서 오늘 저녁까지 내내 기다린 것이다. 밤 10시쯤 전화를 하여 출발 48시간 이전이라고 선택하니 대기 시간이 2시간이라고 나왔지만 3시간이 넘게 대기하고서야 전화 반대편에서 상담원 목소리가 들렸다. 대기하는 동안 통화할 내용을 대충 메모해두었지만 3시간이 넘어서 들리는 상담원의 목소리가 꿈같았다. 다시 통화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그쪽에서 재예약하여 보내준 확인서를 전화를 끊지 않고 바로 확인해 보았는데 잘못되어 있었다.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수정을 요청하고 다시 기다렸다. 그쪽 시스템은 매우 느렸고 다시 왔는데 이번에도 잘못되어 있었다. 두세 번 잘못된 항공편을 보내주던 상담직원은 오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일하고 있다면서 5분만 쉴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세 시간을 기다려서 통화를 했는데 5분 정도 더 기다리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지. 5분 만에 돌아온 상담원은 다시 한참을 시스템에 뭔가 넣고 하더니 마침내 우리를 샌프란시스코 공항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 항공편을 예약하여 보내주었다. 상담원과 통화를 시작하고 50분이 넘게 걸린 거였다.
"우리 예약이 두 개로 나누어져서 복잡했나 봐요. 끝까지 도와줘서 고마워요."
"당신의 예약이 나뉜 것이 더 복잡할 건 없었어요. 우리 회사 시스템이 최근에 자꾸 바뀌었는데 계속 에러가 나서 힘들었던 거예요.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전화를 끊으니 새벽 2시 반이었다. 항공편 취소 공지를 받고 일주일 만에, 고객센터 연결 후 4시간 만에 드디어 귀국 항공편을 손에 쥐고 그제야 마음이 놓여 단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