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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 마지막 날이다. 마드리드 왕궁 입장권을 사두었고 오고 가는 길에 산미구엘 마켓과 몇몇 광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솔 광장이라는 곳은 공사 중인 데다가 어떤 정치인의 현장 인터뷰가 있는지 지역 방송사 차량과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어서 원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솔 광장 지역은 한국의 남대문 주변처럼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중심인 듯했고 정치인의 인터뷰가 없더라도 원래 붐비는 곳일 것 같았다. 솔 광장에서 왕궁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산미구엘 마켓이 나온다. 산미구엘 마켓은 바르셀로나에서 본 전통시장보다 상점 구성이 세련되어 보였다. 간판이나 인테리어도 더 감각 있고 좀 더 큰 자본이 투자되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판매하는 음식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음식값은 스페인에 와서 처음으로 비싸다는 생각이 드는 가격대였다. 어디에선가 산미구엘 마켓 아이스크림이 맛있다는 정보를 보아서 어떤 아이스크림 가게인지 궁금했는데 여기에는 각 제품군 별로 독점권이 있는지 아이스크림 가게는 하나밖에 볼 수 없었다. 구경하면서 식탐이 솟아올랐지만 방금 아침을 먹은 뒤여서 나중에 다시 들르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스페인 왕궁은 내부에 입장하기 전에는 왕궁 좌측에 있는 공간에서 전망을 감상한다. 이곳에서는 마드리드 시가지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단, 마드리드 구시가지 모습이 아니고 높은 빌딩과 현대적 건물이 군데군데 솟아 있는 신시가지 모습인 점이 흥미로웠다. 왕궁을 지을 당시에는 이런 시가지가 없었을 것이니, 왕궁이 마드리드 중심이 아니라 외곽에 치우쳐서 건설된 셈이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대부분의 왕궁이 도시 중심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외부 침입을 감시하는 요새의 위치에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우리가 걸어온 마드리드 구시가지는 왕궁 우측에 있는데, 왕궁과 길 하나를 두고 그 건너편은 지대가 약간 높고 왕궁보다 높은 주거 건물이 서 있었다. 아무리 입헌군주제이지만 왕궁과 길 하나를 두고 높은 건물의 건축 허가가 난 것 뜻밖이다. 왕궁을 마주 보고 있는 외부가 으리으리한 성당도 왕궁을 내려다 보고 있는 느낌이기는 하다.
왕궁 내부는 중앙홀과 계단을 제외하고 촬영이 금지되어 사진이 없다. 현재 왕족이 여기에서 거주하지는 않는다. 왕족은 마드리드 외곽의 작은 궁에 거주하고 이곳은 공식 대외 행사와 접견이 이루어지는 관저의 용도로 현재 활용 중이다. 왕궁에는 약 2,800개의 방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관광객에게 개방되는 방은 스무 곳 남짓인 것 같고(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오디오 가이드를 따라다니면 모두 돌아볼 수 있다. 우리가 돌아본 방은 모두 각기 다른 스타일과 콘셉트로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특히 시계나 탁자와 같은 장식품에는 당대 가장 실력 있는 장인의 앞선 기술과 기교로 몇 백 년의 세월이 무색하도록 빛을 내고 있었다. 오래전 이 나라를 지배하던 사람들의 예술적 취향과 최고 장인의 기교를 엿보는 시간은 언뜻 생각하는 왕궁 관광보다 훨씬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순간이었다. 그림도 그렇지만 가구나 조각품 등 대부분의 예술 작품은 예술가가 자신의 최대한 기량을 발휘하도록 지원하고 그 작품을 사주는 사람이 있을 때 탄생할 수 있다. 왕궁 곳곳을 장식하는 예술품들은 그렇게 탄생하여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황홀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관람객 숫자도 시간대 별로 예약을 받아 적절히 통제되고 오디오 가이드도 잘 되어 있어서 안내에 따라 둘러보기 좋았다. 예전에 베르사유 궁에서 이웃 나라의 단체 관람객에 거의 짓밟히는 느낌으로 떠밀려 다닌 것에 비교하면 훨씬 만족스러운 경험이다.
왕궁의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었다. 카페테리아는 직원 구내식당이 있을 법한 위치에 있었고, 실내가 구내식당처럼 생겼으며, 음식은 저렴하고 무난했다. 돌아오는 길에 산미구엘 마켓에 들러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줄을 좀 서야 했어도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다.
오후에는 레티로 공원을 산책했다. 여유롭게 공원을 산책하고, 개를 산책시키고, 조깅을 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공원 중앙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고 멋진 조각상이 있었다. 공원 안에서 뜻밖에 현대 미술 전시관도 만나고 유리로 된 건물에 판지로 제작된 설치예술 작품도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두 곳 모두 입장이 무료였다.
스페인의 마지막 일정은 마드리드 신시가지에 있는 갈리시안 스타일 저녁이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미리 찾아서 예약한 식당이다. 레티로 공원에서 택시를 타고 갈리시안 음식점으로 향했다. 남편이 유튜브에서 보고 예약한 레스토랑으로 La gran pulperia이라는 식당이었다. 여기에서 스테이크와 문어 요리, 샐러드를 주문했다. 갈리시아는 스페인 북서부에 있는 지역이라고 하고 이 지역에는 소고기와 해산물이 풍부하여 재료 맛을 싱싱하게 살린 요리가 유명하다고 한다. 우리는 8:30에 가서 거의 첫 손님이었다. 식당 규모에 비해 전반적으로 소박한 인테리어였고 음식도 꾸밈이 거의 없이 내왔다. 맛을 보니 꾸밈이 필요 없었다. 미국 스테이크와는 당연히 비교가 안 되고, 한우와 달리 마블 없이 살코기와 지방이 분리되어 있는데 정말 고소했다. 문어 요리나 샐러드도 거의 소스나 양념이 없었고 필요 없었다. 스페인 여행 마지막 날 저녁, 디저트까지 잔뜩 시켜먹고 흐뭇하게 마무리했다.
컴컴해진 뒤 식당을 나오니 숙소로 돌아갈 일이 막막했다. 구도심의 관광지에서는 택시를 쉽게 잡을 수 있었지만 세계 모든 곳의 신도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택시가 희귀했다. 적당한 길가에 자리를 잡고 저 멀리 택시가 보일 때마다 힘차게 손을 흔들어 든 끝에 택시를 탈 수 있었다. 택시기사는 영어를 하지 못했지만 딸이 스페인어를 좀 하는 걸 알자 우리에게 도시를 설명해주고 싶어 했다. 세비야에서 우리가 겪은 경험이 있어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고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기사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딸을 통해 몇 마디 알아들은 이야기의 요점은 신도시는 사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거다. 택시를 타고 신도시 풍경도 즐겼다. 마드리드의 신도시 풍경은 얼바인, 파리나 로마 근교에서 본 신도시, 샌디에이고 어딘가에서 본 신도시와 매우 비슷했고 곳곳에 높은 건물과 회사 이름이 보였다. 택시 기사는 길을 거의 돌지 않으면서도 고속도로 대신 우리가 구경할 만한 경로로 이동하여 숙소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이제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