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벗 Oct 04. 2022

내가 만난 아이들 1

지금은 아파트 단지 별로 주민 인구 구성이 비슷하지만, 내가 결혼 전까지 살던 동네는 뒤늦게 개발된 동네이다 보니 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어릴 때 나는 어떤 하나의 그룹에 끼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심한 축농증과 비염이 있어서 초록색 콧물이 끊임없이 나오기도 했고 콧물이 모두 귀로 넘어가서 소리를 지를 정도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눈 깜빡임, 말 더듬, 어깨 움찔거리는 틱도 있었다. 하루는 엄마 지인의 딸이 학교에서 나를 봤는데 내가 코맹맹이에 정서불안처럼 보이는 애더라고 자기 엄마에게 말하고, 그 사람이 다시 우리 엄마에게 말을 전하여 엄마가 나한테 무진장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좀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들과는 친구가 되기 어려웠다. 한편 나는 엄마가 챙겨준 깨끗한 옷을 입고 학교에 갔고 근사한 도시락을 싸갔으며 공부도 제법 하는 편이었고 동네 기준으로는 과외활동과 문화생활도 많이 하는 편이고 관심사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세운상가에 가서 온갖 조립 키트를 사 와서 혼자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피아노 치거나 책 읽는 걸 좋아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울릴 만한 그룹이 모호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무엇보다 나는 소셜 큐(Social Cue), 즉 눈치가 매우 부족했다. 도대체 저 아이들은 뭐가 재미있다고 웃는지, 이 아이는 왜 화를 내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또래와 함께 있을 때는 나 혼자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이 실감 나서 더욱 외로웠다. 그다지 티가 나지 않게 또래 무리에 섞일 수 있었던 시기는 고등학교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때 나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아이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난 네가 이기적인 성격장애자인 줄 알고 얼마나 미워했는지 몰라. 분식집에 네 욕 쓴 거 내가 쓴 거야. 널 오해했던 것 같아. 너무 미안해." 

같은 반인 줄도 몰랐던 아이들의 그런 고백을 고등학교 내내 심심치 않게 받았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에 동네 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의 쌍둥이 동생과 마주쳤다. 난 그 아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아니, 우리 학교는 네 반뿐인, 작은 학교였고 그 아이는 같은 학년이었으니까 분명히 봤을 거다. 나는 우리 반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몰랐던 거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나를 알고 있었고,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 우리 누나랑 같은 반이었지?"

너네 누나가 누군데? 아, 어, 맞아. 

"누나가 너 정서불안이라고 하던데 멀쩡하네. 누나가 집에 와서 맨날 네 흉내를 냈었거든."

그러면서 그 아이는 누나가 시범을 보인 나의 몸짓을 나에게 재현해 주었다. 정말 내 모습이었다. 나는 몰래 코 풀고, 몰래 팔다리를 움찔거리고, 몰래 손가락 문지르고, 몰래 어깨 날갯짓을 한 줄 알았는데 보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사실 난 아직도 몰래몰래 팔다리를 움찔거리고, 손가락을 문지르고, 어깨 날갯짓을 한다.


나를 끼워준 아이들은 착한 아이들이었다. 나보다 잘 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보다 어려운 아이들이 더 많았다. 어렵게 사는 부모 마음도 이해하고, 밤새 택시 운전하고 귀가한 아빠가 주무시도록 다락방에서 숨죽이고 있는 아이들. 아빠가 퇴근하면 매달리고 항상 더 받을 것만 생각하는 철없던 내 눈에는 그런 모습이 신기하고 어른스럽게 보였다. 그 아이들 중 몇몇은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실업계 고등학교나 직업학교에 진학했다. 그 이후 인연이 이어지는 아이들은 없지만 그 아이들은 말랑했던 내 마음에 가난과 삶의 아픔을 보는 눈을 새겨 주었다. 가난한 아이들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에 더 가깝다는 걸 배운 거다.


대학교 때 동네 영구임대아파트 내에 있는 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소정의 활동비를 받고 아이들 음악교실을 한 학기 정도 담당한 적이 있다. 여나믄 명의 아이들과 함께 악보를 보고 계이름 읽고 그날의 노래를 부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부르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 가운데 비교적 딱딱한 계이름 읽기도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하는 아이가 있었다. 3학년 정도 된 여자 아이였다. 어느 날 그 아이가 정말 눈을 크게 반짝이며 크게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 이사 가요! 우리 이제 임대아파트에 안 산다고요. 진짜 우리 집에 살 거래요!"

아이와 헤어지는 게 서운하면서도 내가 임대아파트에서 나가는 처럼 덩달아 기뻤다.

한편, 워낙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아이였고, 밝은 아이여서 임대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그 아이를 그렇게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걸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기 때문에 놀랍기도 했다. 영구임대아파트라는 상징적인 가난의 짐에서 벗어난 그 아이의 밝은 표정은 지금도 시시때때로 떠오른다.


그 영구임대아파트에는 내가 좋아하던 교회 선생님 한 분도 살고 있었다. 동생 뻘 되는 선생님인데, 부모님이  일을 나갔다가 며칠에 한 번 씩만 들어오셔서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고 했다.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에는 기차 철길 옆에 늘어선 판잣집에 살았는데 집안에 수도가 없어서 공동 마당 같은 곳에서 빨래를 했는데, 지나가던 남자아이들이 돌도 던지고 했다고. 그 선생님은 어엿한 수도와 부엌에 있는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게 되어 감사해했다. 그때 나는 대학생으로 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복지관 자원봉사를 했고, 그 선생님은 실업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했는데 가끔 봉사활동을 마치면 그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먹고 놀기도 했다. 그 영구임대아파트는 입구에서부터 야릇한 냄새가 났고 엘리베이터에서는 소변 냄새가 강하게 나서 숨을 멈추고 있어야 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가 계층에 대한 상징적인 키워드로 나오는데, 지하가 아니어도 냄새가 나는 곳은 많이 있다. 그 선생님이 맡은 주일학교 아이 가운데 영희(가명)라는 아이가 있었다. 아빠와 오빠랑 사는 아이이다. 주민등록도, 정해진 주거도 없이 노숙하던 세 식구에게 누군가 집을 내주어 연립주택 지하에서 살고 있었다. 그 선생님은 종종 영희네 집에 안부를 물으러 들렀고 나도 가끔 동행했다. 지하실 입구부터 냄새가 심하다. 내려가는 계단부터 쓰레기가 보이고 현관문을 열면 술병과 쓰레기가 나뒹구는 방이 나온다. 영희의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있으면서도 우리가 가면 선생님들 오셨냐고 하면서 늘 무릎을 꿇고 맞았다. 울면서 자신은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므로 아이들과 함께 살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영희는 그런 술 취한 아버지 품에 털썩털썩 잘도 안겼다. 영희와 오빠는 본드를 많이 해서 입맛이 없기 때문에 얼굴에 늘 허연 버짐이 피어있다.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가끔 들러서 억지로 먹게끔 하지 않으면 제대로 먹지도 않는다. 영희 오빠는 가끔 내 지갑을 훔쳤다. 난 늘 모른 척했는데 내가 모른 척해서 그 아이가 도둑이 되고 감옥에 갔으면 어쩌나 가끔 후회가 된다.



작가의 이전글 기억이라는 혼합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