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이고에 살 때 우리가 살던 골목에는 딸 또래의 아이들이 여럿 살았다. 딸이 1학년 때 그 집에 이사 들어가서 8학년 올라갈 때까지 7년 동안, 아직 유아 티를 못 벗은 모습부터 사춘기 중학생의 모습까지 아이들이 크는 모습을 지켜봤다.
딸은 같은 골목에 사는 아이들과 카풀로 통학했다. 카풀을 처음 제안한 캐시(이하 모두 가명)네와 우리 집, 그리고 캐시의 친구인 샐리와 우리 앞집에 사는 세라까지, 모두 네 아이의 부모가 돌아가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왔다. 캐시네는 양쪽 부모 모두 중국 출신으로 아빠는 엔지니어이고 엄마는 회계 쪽 컨설턴트라고 했다. 캐시의 언니는 동부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집에는 캐시 부모와 외할머니가 함께 살았다. 중국인 중에는 전업주부가 거의 없고 조부모가 함께 살면서 양육과 가사를 돕는 집이 많다. 캐시네는 그 지역에서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인 가족의 모습이었던 셈이다. 성격도 그랬다. 실용적이고, 수줍음이 없고, 목표지향적이랄까. 하루는 캐시가 나에게 8-10분 정도의 통학 시간 동안 자신들이 계산을 연습할 수 있도록 두 자릿수 덧셈 문제를 차 안에서 문제를 내달라고 했다. 자신의 아빠가 운전하는 날은 늘 그렇게 해주기 때문에 통학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때 캐시가 고작 3, 4학년 정도였는데, 어린 녀석이 참 야무지네... 하며 속으로 생각하며 흔쾌히 그렇게 해주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쉽지는 않았다. 운전하면서 영어로 두 자릿수 덧셈 문제는 빠르게 생각해 내고, 아이들이 답을 말하면 그 답이 맞는지 암산하는 것도 골치 아팠고, 계산에 능하지 않은 내 딸은 차 안에서 침묵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두어 달 하다가 문제 내는 것을 까먹는 척, 슬그머니 그만두었다. 캐시의 외할머니는 늘 골목 바깥까지 나와서 캐시를 기다렸다가 데리고 들어갔다.
캐시의 친구인 샐리라는 아이는 중국인 엄마와 백인인 새아빠, 하프 시스터(Half sister, 한쪽 부모만 같은 형제) 애비, 외조부모와 살았다. 샐리의 친부는 중국인으로, 다른 주에 살아서 1년에 한 번씩 아빠를 보러 간다. 샐리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다. 매일 훈련이 있는 데다가 다른 주로 대회를 나가는 일이 많아서 매우 바빴다. 직장에 다니는 샐리의 엄마 대신 할아버지가 샐리의 운전을 해주었고 할머니가 아기를 돌봐주었다. 백인 아빠와 동양인 엄마 사이에 태어난 애비는 인형처럼 예뻤다. 샐리는 자신의 동생을 무척 예뻐하면서도 새아빠를 아빠(Dad)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신 이름을 불렀다. 난 처음에 마이크 이야기를 해서 마이크가 누군가 했는데 알고 보니 샐리의 새아빠였다. 새아빠는 그다지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던 듯 하다. 샐리 일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일이 없었다. 한 번은 딸이 샐리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해서 그 집 문을 두드린 일이 있었다. 마이크의 얼굴을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다. 애비의 할머니가 애비를 유모차에 태워서 동네를 산책할 때도, 샐리와 샐리의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동네를 산책할 때도, 학교에서 열리는 행사에도 마이크는 한 번도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으니까.
현관문 틈으로 보이는 낯선 얼굴을 보고, 샐리 아버지인가요? 물었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 그런 셈이죠.(Yeah. Kind of.)
카풀 멤버 네 명 중에서 샐리는 가장 조용하고 온순한 아이였는데 속사정은 모르지만 마음이 그냥 찡했다.
우리 앞집에 사는 세라는 중국인 엄마 지홍, 백인 아빠 존과 살았는데, 세라 얼굴은 순수 동양인 얼굴이었다. 지홍은 바이오텍에서 일해서 출근을 했고 존은 재택근무를 하는 직종이어서 주로 존이 육아를 담당했다. 존은 교육에 열성적인 편이었다. 우리가 아이에게 무슨 교육을 시키는지 시시콜콜 묻기도 하고, 강사를 소개해 달라고도 하고, 뭔가 딸에게 좋은 걸 사주면 우리 세라에게도 사줘야겠다고 했다. 아이들 어릴 때는 한 달에 한 번 저녁 시간에 세라 집 앞에서 블록파티를 열어서 동네 꼬마들이 나와서 놀기도 했다. 바로 앞집이었고 카풀 멤버들 중에서는 우리와 가장 친한 집이어서 세라가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아빠가 백인인 집이라 먹는 게 다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세라는 떡볶이, 김밥, 삼겹살, 김치볶음밥까지 무엇을 줘도 뚝딱 먹고 빈 접시를 들고 왔다. 지홍은 일찍 퇴근하거나 주말에 놀러 갈 때는 우리 딸까지 같이 데려가곤 했다. 딸은 덕분에 중국 문화 공연도 보러 갈 수 있었다. 마주 보고 있는 두 집 아이들이 두 가정의 문화를 두 배로 즐기면서 자란 셈이다. 한 번은 세라네가 해변에 가면서 딸을 데리고 갔다. 비키니를 입고 해변에 간 세라 엄마는 자신의 배에 난 여러 흉터를 딸에게 보여주었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무척 많이 노력했고 아이를 낳은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홍과 존은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게 되었을 때 포기하는 대신 중국에서 세라를 데려왔다는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세라가 참 소중한 아이라고. 그 이후 세라는 딸에게 자신의 입양 전 이야기를 딸에게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세라는 다섯 살 즈음에 입양되었다. 세라가 생모를 찾고 싶어 해서 중국에 간 적도 있지만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여느 날처럼 방과 후에 아이들 네 명을 차에 태우고 시끌벅적한 수다를 듣고 있었다.
어느 아이가 말했다. 자신은 결혼은 하고 싶지 않은데 아기는 갖고 싶어서 고민이라고 했다.
세라가 대꾸했다. "결혼 안 해도 아기 가질 수 있어. 그냥 입양하면 돼."
샐리가 말했다. "입양한다고 진짜 자기 아이가 되는 건 아니야."
세라가 받아쳤다. "난 입양되었고 우리 엄마 아빠의 진짜 아이가 되었는데? 난 세라 브라운이야. 우리 아빠도 브라운, 나도 브라운."
샐리가 반박했다. "그건 그냥 그렇게 부르는 거지 진짜 브라운이 되는 건 아니야. 브라운이 낳은 아이만 브라운이 될 수 있는 거야."
세라가 할 말을 잃으면서 대화는 잠잠해졌다.
샐리는 새아빠의 성을 쓰지 않는다. 그 집에서 새아빠의 성을 따르는 아이는 동생 애비 뿐이다. 한 지붕 밑에 살지만 결코 자신의 아빠가 되려고 하지 않는 새아빠와 사는 샐리의 항변이 측은하게 들렸다. 입양 부모의 진짜 아이로 살아가는 세라의 침묵에 마음이 아팠다. 서글퍼졌지만 두 아이에게 위로가 될 만한 아무 말도 찾지 못하고 조용히 운전만 했다.
카풀 멤버 외에 골목에서 함께 노는 아이 중에 제시라는 아이가 있었다. 제시는 우리보다 한두 해 늦게 그 동네에 이사 왔고, 엄마와 둘이 살았다. 아빠는 중국 공산당 간부라고 하는데 중국에 살았다. 제시 엄마는 나보다 훨씬 연배가 높아 보였다. 중국에서 갓 이사왔을 때 제시의 억양은 매우 재미있었다. 아이들은 깔깔 웃으면서도 제시를 포용해 주었고 제시는 아주 밝고 씩씩한 성격 덕택에 아이들과 매일 어울려 놀면서, 이삼 년 후에는 제법 어색하지 않게 영어를 할 수 있었다. 제시의 엄마도 중국에서 곧바로 온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제시가 아이들과 놀지 않는다고 했다. 문을 두드려도 제시 대신 엄마가 나와서 제시가 지금 나가서 놀고 싶지 않다는 말만 전한다고. 제시가 사춘기를 조금 일찍 겪는구나. 제시네와는 우리가 다른 동네로 이사 가기 전 날 골목 사람들이 열어준 송별회에서 마지막으로 본 뒤 몇 년 동안 잊고 지냈다. 산호세로 이사 오고 얼마 후, 딸이 아침에 어두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밤에 제시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제시가 자기 출생의 비밀을 딸에게 모두 털어놓으면서 그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자라는지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한 것이다. 제시가 딸에게 해준 이야기는 드라마에서 볼 법한 이야기였다. 여자가 불임인 상류층 부부, 혼외 자식, 미천한 출신인 의붓딸 구박, 끊임없는 자살 생각... 제시는 정말 힘들어하고 있었다. 삶에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딸의 마음은 제시가 털어놓은 이야기를 품을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오빠를 그렇게 잃으면서 이미 구멍이 보이도록 지친 마음이었다. 딸은 제시의 전화를 더 이상 받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 그건 네가 짊어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야. 다른 어떤 아이도 마찬가지지. 마리 엄마가 제시 엄마랑 친하고 가까이 사니까 제시가 힘들어한다는 걸 귀띔해 놓을게. 이것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인 거 같아.
제시의 말은 모두 사실일 거다. 반면, 친하지는 않았고 오가면서 몇 번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이지만 나는 제시의 엄마가 진심으로 제시를 아끼고 애틋하게 여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마음을 표현하는 데 우리 모두는 서툴지 모른다. 그 서툰 표현이 사춘기를 지나는 제시에게는 견디기 고통이 된 듯하다. 사춘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는데, 무모한 반항을 넘어서 동굴에서 나와 세계를 분해하고 재구성해서 다시 보게 되는, 더욱 아슬아슬한 시기이지 않을까? 맞다. 이번에도 나는 시간을 되짚어서 나와 아들을 떠올리는 거다.
지난여름, 마리 가족이 북가주 여행을 하면서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물렀다. 인도계 캐나다인인 마리 엄마와 위스콘신 출신의 아일랜드 계 백인인 마리 아빠와 또 다른 시각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리 엄마에게 물어보니 제시 가족은 중국에 잠시 들어갔다가 제시가 중국 학교에 적응하는 데 문제가 있어서 금방 다시 나왔고, 몇 년 전에 구입해 둔 저택으로 이사를 들어갔으며, 제시는 무사히 지내는 듯하다는 소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