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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Oct 11. 2022

아들 기억 한 자락 1

넌 장난꾸러기였지

아들이 내 곁에 있었을 때 나는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호흡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아들이 문 뒤에 숨어있다가 튀어나와서 나를 놀라게 하기도 하고 뭔가 장난칠 거리를 종종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면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고등학생이나 된 녀석이 이런 장난을 하다니! 나무라는 멘트를 날렸지만 깔깔대고 웃던 녀석의 웃음소리에 얼마나 행복했던지. 한 번은 욕실 세면대 거울 옆에 있는 작은 수납장 문을 열었는데 문 뒤에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라고 쓴 종이를 붙여놓았다. 누구 소행인지 다 안다. 비명소리를 기다렸는지 잠시 후 아들이 옷장 안에서 나타났다. 

"엄마, 안 놀랐어요?" 

아, 놀란 척해주는 걸 잊었다.

디스피커블 미(Dispicable Me)의 그루가 낼 만한 졸린 목소리로 "깜~짝~"이라고 해주었다. 

또 캘캘캘 웃는 아들. 아들은 그런 장난꾸러기였다. 


우리가 타운하우스에 세들어 살 때였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앞집 아줌마가 문을 두드렸다. 아들을 나오라고 했다. 앞집과 우리 집 사이에 큰 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에 앞집 딸이 새로 뽑은 폭스바겐 뉴비틀을 주차해 놓았는데 차에 덴트가 생긴 것이다. 아들이 범인이라는 걸 아줌마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잊어버렸다. 기억나는 건, 아들과 옆집 아이인 니모가 물풍선을 잔뜩 넣은 물풍선을 들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그 차에 던지다가 아이스박스를 차에 떨어뜨린 것이다. 아들, 아줌마와 함께 옆집에 가서 니모를 불러냈는데 니모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면 딱 잡아뗐다. 아들은 물풍선을 채운 아이스박스를 들고 나무 위에 기어오르는 일이 니모의 도움 없이 어떻게 가능했겠냐며 니모가 공범이라고 항변했다. 아줌마는 아들의 항변을 듣더니, 그럼 둘 다 책임이 있다면서 어떻게 책임을 지게 할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앞집 딸 세라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뉴비틀이 너무 갖고 싶어서 돈도 모으고 조르기도 해서 아줌마가 큰맘 먹고 사준 차였다. 우리가 살던 타운하우스는 그 지역에서 작은 편에 속하는 단지였고, 아줌마는 이혼 후에 치위생사로 일하며 자신의 노모와 딸을 부양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줌마는 더 이상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아들은 그런 장난꾸러기였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처음 왔을 때 우리는 온 집안에 카펫이 깔린 월세집에 살았다. 이사 들어왔을 때 새 카펫처럼 하얗고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던 카펫은 머지않아 점점 알록달록하게 바뀌었다. 처음에는 얼룩이 질 때마다 카펫 클리닝 세제로 싹싹 닦아냈지만 닦는 속도보다 염색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 집에서 1년쯤 살았을 즈음에는 아들 방이 마커 자국, 고무찰흙 자국, 스티커 등등에 뒤덮여 원래 카펫 색을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손님이 왔다가 아이들 노는 방문을 무심코 열어보고 한 마디를 짧게 흘렸다. 

"어떻게 저 지경이 되도록 두셨어요?"

저 지경이 되기 전에 열심히 얼룩을 지우려고 해 봤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우리가 미국 와서 처음 산 자동차는 미니밴인 시에나였다. 그 차 안에도 온통 낙서와 스티커로 뒤덮여 있다. 보통 내구성이 좋기로 유명한 도요타 자동차 치고는 우리 시에나는 문제가 많은 편이다. 배터리 방전도 빠르고, 배터리 문제가 아닌데 시동이 걸리지 않은 적도 여러 번이었고, 길 위에서 갑자기 부품이 터져서 선 것도 두세 번 된다. 그런데도 차 안을 덮은 아이들의 낙서 때문에, 그리고 그 차를 타고 캠핑을 다니고 여행을 다닌 기억이 매섭게 생생해서, 14년이 넘은 이 차를 보내지 못했다. 사실 낙서는 지우지 않았는데도 이제 많이 바래서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주 잘 보면 흔적이 보이는 정도이지만 내 눈에는 거기 있던 낙서가 보인다. 낙서하면서 깔깔대던 웃음소리가 들린다. 방바닥에도, 차 내부에도 낙서를 해대던, 내 아들은 그런 장난꾸러기였다.

1학년 때 한 낙서

놀이방에서 유치원으로 옮겨갈 나이쯤 되었을 때다. 우리 집에 서너 명의 아이들과 엄마들이 놀러 와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놀고 있었다. 한창 수다를 떨고 있는 엄마들에게 한 아이가 터벅터벅 걸어와서 매우 걸걸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아줌마, 얘가 머리를 잘랐어요."

달려가 보니 토마스 기차가 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가위로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나갔고 방바닥에는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 기차를 가지고 놀다가 바퀴에 머리카락이 엉겼던 거다. 머리카락을 두피 가까이 잘라놓아서 결국 한동안 머리를 빡빡 밀어주어야 했다.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녀석에게 밀리터리 룩을 입혀놓으니까 그 장난스러운 표정이 더해져 딱 말년 병장 삘이 났었는데. 그 사진은 네 인생 사진 중 한 장이었지. 이 장난꾸러기 녀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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