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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Jul 31. 2022

기억이라는 혼합물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산 지 삼 년 반이 넘었다. 요즘은 아픔이라는 불치병과 투병하며 사는 삶에 조금 익숙해진 기분이 든다. 아들 기일이 시월인데 그때까지 겨우 세 장 남은 달력을 보면서 벌써 가슴이 쿵쾅대는 건 어쩔 수 없다. 단, 시월이 가까워오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걸 아니까 익숙해졌다는 표현을 쓴 거다. 몰아치는 통증에 몸부림치는 대신 심호흡도 할 줄 알고 자세도 고쳐앉을 줄 아는 환자가 되었다고나 할까.


아이를 보내고 나면 모든 것이 후회스럽고 가슴 아프다. 매 순간, 세상 천지에 아픔이 도사리고 있다. 눈 뜨는 순간 깨워야 하는 아들이 없는 아픔으로 시작해서 침실로 가기 전에 굿나잇 인사를 할 아들이 없는 걸 느끼는 순간까지 가슴 아프며, 아이와 함께했던 모든 경험, 함께하지 못했던 모든 경험 때문에 가슴이 저미다. 그리고 깜빡 잊고서 가슴이 아프지 않으면 다음 순간에는 가슴이 아프지 않았던 것 때문에 마음이 뻐근하다. 


몇 개월 전에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교차로 모퉁이에 있는 낡은 상가 단지가 날카롭게 내 감정을 자극했다. 이 지역으로 이사온 후 그 길을 두세 번 지나다녔을 텐데 낡은 간판이 달린 구식 건물이 들어선 단지에 눈길이 간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한눈에 알았다. 미국 와서 처음으로 아들 침대를 사러갔던 곳이었다. 아주아주 커다란 가구 전시장에 들어서서 온갖 종류의 침대를 구경하던 기억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일어났다. 생생한 기억이 곧 찌르는 듯한 아픔으로 변했다. 설마, 십사 년 전에 단 한 번 갔던 곳을 내가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할 리 없었다. 내 기억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건지, 맞는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건지 모르지만, 내 눈은 그 상가에 가구점 간판이 있는지 재빨리 찾고 있었다. 기억 속에 있는 가구점 간판이 저만큼 안쪽에 보였다. 침대 주문장을 쓰고, 배달을 받고, 침대 아래 서랍을 열어보던 기억이 마음에 마찰을 일으키며 주렁주렁 끌려 나왔다. 아들과 밟았던 모든 땅을 지나다닐 때마다 가슴이 아팠는데 이제 지나다니면서 아파할 길이 또 생긴 것 같았다. 


이번에 스페인 여행을 준비할 때도 그랬다. 우리 가족이 그렇게 멋진 추억을 만들었던 유럽 여행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아렸다. 아들 없이 떠나는 유럽 여행은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심하게 상처를 입은 뒤에는 상처와 가까운 곳, 먼 곳 가릴 것 없이 온몸이 아프 듯이, 아들과 조금이라도 연결이 되는 곳은 그냥 다 아팠다.


그 와중에 문득 든 생각은, 내가 아파하는 기억이 사실은 좋은 기억이라는 거였다. 아들과 관련이 되어 있으니까 누르면 아플 수밖에 없지만 그곳에 상처를 입은 건 아니네. 여행 다니면서 아들의 가장 환한 얼굴을 보았고 가장 활짝 웃는 웃음을 보았는데 그 기억을 아프게 떠올릴 필요는 없잖아. 아들의 침대를 사러간 기억도 상처의 기억은 아니다. 낯선 땅에 도착해서 우리가 고른 첫 가구가 아들 침대였다는 건 아파할 일이 아니다. 첫 집을 장만하고 처분할 때까지 그 침대를 잘 사용했으니까 그 가구점이 있는 상가를 지나다니면서 아파할 일이 아니다. 


아들과 함께했던 기억과 마주치면, 이제 아이와 좋은 기억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앞으로도 슬픔을 느낄 거다. 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마치 상처가 있는 것마냥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돌아가는 건 조금 씩 벗어나려고 한다. 그건 상처가 아니니까. 가까이만 가도 아픈 곳을 모두 피하고 산다면 내가 갈 곳은 없을 테니까. 기억이란 여러 가지가 뒤섞인 혼합물이어서 상처의 기억과 그렇지 않은 기억을 가려내기 쉽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자꾸 들여다 보면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 기억을 알아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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