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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Oct 03. 2022

네 번째 10월

네 번째 10월을 맞는다.


어제는 애도하는 아이들을 위한 전국 연합(National Alliance for Grieving Children)이 미국 전국을 투어 하며 여는 세미나에 다녀왔다. 남은 아이의 엄마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뭔가 배워야 할 것 같은 간절함에 두 달 전쯤 신청하고 기다리던 세미나이다. 세미나가 아침 8:30부터 시작이어서 일찌감치 집을 나서서 팔로알토로 향했다. 도착하여 접수를 하고 부스를 둘러보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분이 어디에서 왔냐고 말을 걸어왔다.


저는 유부모에요. 아들을 잃었거든요. (I am a surviving parent. I lost my son... )

- 저런... 아들 이름이 뭐였죠? (I am sorry. What was your son's name?.)


난 울컥하고 말았다. 누군가 나에게 아들 이름을 물어준 것이 얼마만인지...


- 몇 살이었어요?

내가 답했다. 거의 열일곱이 다 되었을 때였어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죠.

- 어떤 아이였나요?

울먹거리면서도 나는 아들 자랑을 하고 싶었다. 아주 착하고 똑똑한 아이였어요. 우린 정말 행복한 가족이었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 나도 아들을 잃었어요. 아주아주 오래전에요. 내 아들도 열일곱 살이었죠.

아...

- 그런데 이제 괜찮아요. 지금은 그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이 행복해요. 아들을 잃은 지 몇 년이나 지났나요?

4년이 되었어요.

- 4년이면 아직 한참 슬플 때군요... 시간이 지나서 당신도 나처럼 말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거예요.

부끄럽지만 난 가족치료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아들을 돕지 못했고 지금은 딸을 어떻게 키워야 좋은지 모르겠어요. 딸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 아이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 오는 게 아직도 힘들지만 나는 꼭 와야 했어요.

부스에서 듣고만 있던 젊은 봉사자 한 명이 나에게 말했다.

- 난 언니를 잃었어요. 열다섯 살이었죠. 정말... 힘들었어요.

내가 물었다. 뭐가 제일 힘들었죠?

- 엄마 앞에서 괜찮은 척해야 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아마 당신 딸도 많이 힘들 거예요. 괜찮은 척할 뿐...


첫 세션의 강사는 Donna Schuurman 박사였다. 슈만 박사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모두는 길고 긴 죽음의 끝자락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느 족보에나 감춰진 죽음이 있죠."

모든 생명체에게 다가오는 단 한 가지 확실한 운명이 죽음이지만, 가족 중에 누군가 뜻하지 않게 맞게 될 때 아이들이 얼마나 큰 충격에 빠지는지, 그 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나는 슈만 박사의 강의를 마음과 머리로 흡입했다.


치유의 시작은 이야기를 꺼내는 거라고 했다. 슬픔에 빠진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얼른 기운차리기를 강요하는 대신 아이 이야기를 물어봐 주라고.

"아이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러고 보면 난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혼잣말과 같은 그림을 그리면서 치료의 길을 걷고 있었나 보다. 슈만 박사는 세월호 참사 때 한국에 방문했던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자살일 경우 주위에 다른 사인으로 알린다는 이야기 등 죽음과 유족을 대하는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후 두 번째와 세 번째 세션도 내가 겪은 일을 넓은 각도로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미국에서 18세 이전에 부모나 형제를 잃는 아이는 14명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물론 지역과 인종에 따라 격차가 심해서 중남부, 흑인 그룹은 비율이 훨씬 높고 내가 사는 지역 아시안의 경우 28명 중 한 명 꼴이다. 딸아이 교실에 보통 30-40명이 있으니까 교실에 보통 한두 명쯤이 있겠네. 우리 가족의 아픔이 어떤 모양의, 얼마나 큰 상자 안에 들어있는지 어렴풋이 보고 나니 시야가 더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남편에게 세미나 이야기를 해주었다. 예민한 사춘기 딸은 어색한지 자리를 피했다. 딸도 들었으면 하는 대목을 중심으로 약간 목소리를 높여서 이야기했으니 아마 딸도 귓등으로 들었을 것 같다.

"언니를 잃은 사람이 가장 힘들었던 건 엄마 앞에서 괜찮은 척하는 거였대. 아이들은 부모보다 더 혼란스러울 텐데 말이지..."


그리고 오늘은 딸이 첫 월급을 타서 가족 회식을 했다. 일주일에 몇 시간 일하는 거여서 쥐꼬리 월급이지만 동네 중국 만두집에 가서 골고루 시켜 먹으면서 축하해주었다. 딸이나 나나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이지만 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엄마다운 모습으로 엄마의 자리를 지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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