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대 부부의 차박 이야기
5월부터 요세미티(Yosemite) 열병에 걸렸다.
추니박, 지오최 작가 부부 인스타그램에서 요세미티 스케치 여행 사진을 본 것이 발병 원인이었다.
요세미티는 나의 오랜 짝사랑이다. 터무니없이 비싼 물가와 이등 시민의 지위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까지 캘리포니아에 계속 사는 건 요세미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웅장한 자연의 모습과 순수한 자연 속에서 호흡하는 시간을 그만큼 사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추억이 못 견디게 그리워서 요세미티에 가고 싶었다. 휘리릭 구경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며칠 머물다 오고 싶었다.
요세미티에서 캠핑 자리를 찾아보자.
캠핑 시즌은 6월에 시작되는데 1년 전에 다음 해 예약을 시작하자마자 모두 마감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희망이 있기는 하다. 벌금 10달러를 내면 취소할 수 있고 취소해야 하는 사정이란 늘 생기기 마련이어서 예약사이트에 알림 설정을 해놓으면 누가 취소했을 때 알림이 뜬다. 남편이 예약사이트에서 보내주는 알림을 시시각각 확인한 끝에 크레인 플랫(Crane Flat) 캠핑장의 이틀짜리 캠핑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단, 크레인 플랫 캠핑장이 국립공원 내부에 있기는 해도 중심인 요세미티 밸리(Yosemite Valley)까지 차로 40분 정도 떨어져 있다. 폭포 부근으로 하이킹을 가거나 하프돔과 엘캐피탄 사이를 흐르는 계곡을 보려면 밸리까지 차를 타고 가서 주차를 해야 하는데 한창 붐빌 때는 주차 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공동화장실까지 전기가 아예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그런 이유로 예약을 해놓고도 좀 아쉬워하던 차에 남편이 들뜬 목소리로 불렀다.
"어퍼 파인스(Upper Pines)에 자리가 났어. 바로 내일이야. 맞은편 루프에는 그 다음날 자리가 있고, 로어 파인스(Lower Pines)에는 그 다음날 자리가 하나 있어. 모두 하룻밤 씩이야.“
그러니까 당장 내일 출발해서 하룻밤 자고 옮기는 걸 삼일 연속해야 한다는 거다.
그럼 가야지. 난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하룻밤씩 자고 매일 옮겨 다녀야 하는 3박 4일 요세미티 캠핑을 반나절 만에 후다닥 준비하고 다음날 떠나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준비.
캠핑이 여느 여행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캠핑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여행이라고 하겠다.
비비크림을 바르지 않아도 되고, 머리를 빗지 않아도 되고, 인증샷을 찍지 않아도 되고, 꼭 방문해야 하는 명소를 찾지 않아도 되고, 맛집을 찾지 않아도 되고, 맛집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지 않아도 되고, 공연을 관람하지 않아도 된다. 자연 속에 들어가서 텐트라는 축소된 주거 공간만 설치하면, 생존에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덜어낸 삶을 경험할 수 있다. 군더더기가 생략되면 불편할 틈이 생기지만 불편한 대로 즐겁다. 요즘 웬만한 집 살림도구보다 멋진 장비들을 보면 오히려 갑갑해진다. 근사한 트레이 하나를 사기 위해 수많은 리뷰를 읽어야 할 거고, 하룻밤 캠핑장 비용이 넘는 돈을 지출할 거고, 트레이에 흠집이 나지 않게 차에 실어야 할 거고, 캠핑 다녀온 후에는 트레이를 잘 닦아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캠핑까지 보관해야 할 거다. 트레이 없는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느끼는 자유가 트레이보다 더 소중하지 않을까? 그래도 자연에서 개운한 잠을 자고 마음껏 걸어 다니려면 기본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최소한의 장비는 텐트인데, 사실 우리는 가져갈 텐트가 없었다.
지난번 캠핑 때 텐트를 세우는 폴대가 부러져서 똑바로 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처음에 예약했던 크레인 플랫은 날짜가 며칠 여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주에 알아보고 주문을 할까 생각했던 거다. 내일 캠핑을 떠나야 하니 새 텐트를 주문하기에는 늦었고 급히 사려니 망설여졌다. 게다가 삼일 밤을 모두 다른 곳에서 자야 하는데 셋업이 복잡한 텐트를 매번 치고 접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엣다, 차박을 해보자.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니까 인생에서 차박을 한 번 해보고 싶다면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일 거다. 잠은 차 안에서 자더라도 수트케이스를 들여놓고 탈의실로 쓸 공간도 필요하니까 측면까지 가려주는 대형 캐노피를 가져가기로 했다.
밤에 추워질 것을 대비하여 기모 외투와 따뜻한 담요도 챙겼다. 요세미티에서는 캠핑할 때마다 낮에는 더워도 밤이면 고산지대의 계곡다운 추위가 몰려와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났다. 날씨 앱을 보니 내일 낮 최고 기온이 24도이고 최저 기온이 7도라고 했다. 침낭 밑에 깔기 위해 게스트룸 침대에 사용하던 매트리스 토퍼를 가져가기로 했다.
백팩킹이 아니라면 아이스박스도 기본 장비이다. 과일을 씻어서 밀폐용기에 담고, 샐러드용 야채와 쌈장과 함께 먹는 야채를 각각 지퍼백에 담았다. 양념한 LA갈비와 스테이크용 소고기, 케이준 양념에 재운 베이비립은 포장된 채로 아이스박스에 넣었다. 끝으로 자동차 여행에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를 다운로드하고 읽은 책을 고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단편집 중에 가볍고 엉뚱한 이야기를 모은 <파라다이스>를 골랐다. 물론 취사도구, 랜턴, 가열도구, 세면도구 등도 챙겨 넣었다.
이 정도면 3박 4일 동안 자연만 한껏 들이키고 올 수 있겠다.
(계속)
캠핑장으로 향하기 전에 글레시어 포인트(Glacier Point)에 들렀다. 약 2백만 년 전 빙하가 만들어 낸 요세미티 계곡의 4분의 1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