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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

요세미티(Yosemite) 3박 4일 캠핑(3)

오십 대 부부의 차박 이야기

by 글벗

체에 걸러지는 듯 선루프를 통과해 차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잠을 깬다.

다른 캠핑객들이 일어나기 전에 잠자고 난 트렁크를 정리해 놓는다.

차박이 창피할 건 없지만 어질러진 이부자리를 들키는 것은 속살을 보이는 것처럼 민망하다.

삶아온 계란, 썰어온 야채, 빵 한 조각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다.

커피를 마시며 그날 행선지를 의논한다.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도 간단하게 준비한다.

하루는 샌드위치를, 다음 날은 참치주먹밥을 만들었다. 미리 씻어온 과일과 전날 구운 옥수수도 간식으로 챙겼다. 옥수수는 요세미티 오는 길에 과일 가판대에서 체리를 사면서 6개를 1달러에 샀는데 꿀맛이었다. 설거지통으로 가지고 다니는 플라스틱 박스에 물을 받아와서 간단하게 설거지를 하고 페이퍼타월로 물기를 말려서 제자리에 넣으면 하룻밤을 보낸 캠핑장에서 떠날 준비가 끝난다.

살림살이가 차 트렁크에 너끈히 들어가는 걸 보면 마음이 참 가뿐해진다.


둘째 날.

오전에는 요세미티 폭포 주변의 등산로로 하이킹을 했다.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 때마다 숨 막히는 자연의 위용이 펼쳐진다. 그 거대한 자연을 이루는 이름 모를 풀과 벌레, 부스러져 내린 돌덩이들까지 마음에 벅차게 들어와 몇 번이나 스케치북을 꺼내고 싶은 마음을 눌러야 했다. 클라크 포인트(Clark Point)라는 곳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스케치북을 폈다. 이 자연의 위용을 어떻게 작은 스케치북에 옮길 수 있을까? 내가 스케치하는 걸 보고 "이 장면을 그리는 거예요?"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기에는 너무 아름답죠. 그냥 시도하는 거죠."

이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근접하게 글이나 그림에 담을 날이 올 수 있을는지.

오후에는 캠핑장 주변 개울가에서 그림을 그렸다. 제법 더운 날이었는데 개울물에 발을 담그자 등줄기가 시원해졌다. 남편도 야외의자를 개울가에 가져와서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낮잠을 즐겼다. 이상적인 삶의 한 조각을 슬로 모션으로 누린 기분이다.


땅거미가 드리울 때쯤 캠핑장으로 돌아갔다. 모닥불을 피워서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데 후덥지근한 기운은 누그러지지 않고 하늘도 심상치 않았다. 하늘 한쪽에 검게 변하더니 우르릉거리며 불편한 신호를 보냈다. 빗방울도 간간이 떨어졌다. 바람이 거세졌다. 곳곳에서 돌풍이 일기 시작했다. 사정없는 바람에 캠핑장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무거운 것을 찾아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눌러놓느라 분주할 때였다.

"쾅"

큰 나무가 넘어가서 무엇인가를 덮쳤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동시에 멈추고 나무가 쓰러진 쪽으로 걸어갔다.

몇 미터인지는 모르지만 꽤 큰 나무 아래 깔린 건 자동차였다. 다행히 사람은 그 안에 없었다.

한바탕 노여움을 분출한 바람이 잠잠해졌다.

종일 아름다움을 감탄하며 걷고 발을 적시며 완벽한 순간을 만끽하게 해 준 자연에게 경고장을 받은 느낌이었다. 자연이 허락하는 만큼만 우리가 누릴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메시지 같았다.

다행히 어둠이 짙어지면서 바람이 잦아들었고 까만 하늘에 별이 하나둘 드러났다.


셋째 날.

티오가 로드(Tioga Road) 쪽으로 달려서 투얼럼 메도우(Tuolumne Meadow)로 향했다. 메도우를 우리말로 하면 풀밭, 목초지, 초원 정도인데 캘리포니아에서 만나는 메도우들은 조금 다른 느낌이 있다. 일단 배경으로 산이 보이고 산 아래 풀밭이 넓게, 또는 아늑하게 펼쳐지고 풀밭 아래 땅은 대개 질퍽해 보이고 그 주변이나 가운데로 물이 흐르는 경우가 많다. 만화에서 대개 사슴이 물 마시러 나올 것 같은 장면을 떠올리면 비슷하다. 요세미티 전역에는 이런 크고 작은 메도우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야생화가 핀 곳, 풀이 많이 말라있는 곳, 우기가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질퍽한 곳 등 풍경이 다양하다. 투얼럼 메도우는 개울이 가로지르는 너른 풀밭인데 연약한 풀이 돋아나고 있어서 정해진 통행로 이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다.


운 좋게 그림 그리기 좋은 바위를 찾아내어 이곳에서는 과슈 물감으로 메도우 풍경을 그렸다. 한 시간 남짓 그리는 동안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풀밭의 색조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플레네르(Plein-air) 페인팅이라고 한다. 플레네르 페인팅은 어찌 보면 험한 작업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스케치북을 펼쳐드는 것이 일단 쑥스럽고, 마음에 드는 풍경이 보이는 곳은 그늘이 들지 않거나 앉아서 그리기 어려울 때가 많고, 딱 맞는 도구나 재료가 마침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또 남편은 그림을 그리지 않으니까 무작정 오래 앉아서 그리기도 어렵다. 그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여행길에 경험하는 시각적 감동을 생생하게 붙잡아두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느 한순간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이 냉동 밀키트를 조립하는 정도의 느낌이라면, 플레인에어 페인팅은 방금 캔 조개와 쑥을 넣고 직접 담근 된장을 한 숟가락 넣어 간을 맞추는 그런 느낌이다. 먹는 사람 입맛에는 딱 맞게 간이 된 냉동 밀키트 음식이 더 완벽할지 모르지만 음식 하는 사람이 느끼는 즐거움은 비교할 수 없을 거다.


이번 요세미티 여행에서 마지막 그림은 캠핑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테나야 레이크(Tenaya Lake)에서 그릴 작정이었다. 어느 해인가 6월에 왔는데 지난겨울 내린 눈이 아직 허리춤까지 쌓여 있었다. 그 해 티오가 로드를 막 개방했을 때였고 테나야 레이크에는 방문객이 우리밖에 없었다.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며 그때까지 얇게 얼음이 되어 땅을 덮고 있던 눈을 사각사각 밟으면서 주차장에서 호숫가로 걸어갔었는데.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신기했다. 매일 휘리릭 증발해 버리는 기억 때문에 고민인 내가 요세미티에서 기억은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하다니. 지금 눈에 보이는 장면과 십여 년 전에 눈싸움하던 장면이 겹쳐서 보였다. 올해는 주차 자리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호숫가가 사람들로 붐볐고 날이 따뜻했지만 이 땅의 인상은 똑같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컵라면을 먹었다.

남편은 돗자리로 쓰는 담요를 호숫가에 깔고 그늘 아래에서 잠을 청했다.

숲이 병풍처럼 둘러싼 호수에서 맑은 호수물에 무릎을 걷고 노는 아이들, 작은 텐트를 치고 쉬는 사람들의 모습이 몽환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잘 그리려는 욕심에 스케치를 공들여했는데 날이 갑자기 추워지고 사람들도 짐을 챙겨 떠났다.

그릴 대상이 떠난 후에 사람들을 그리는 것도 어색해서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스케치는 집에 돌아와서 완성했다.


서둘러 준비해서 떠난 캠핑에서 시간은 자연의 장단에 맞추어 느긋하고 부드럽게 흘러갔다.

자연의 위대함에 경탄하고, 작은 생명의 강인함에 탄복하면서 잘 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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