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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나무늘보의 시간

by 글벗

유체이탈을 한 듯 나 자신을 바라보면, 어느 날은 나무늘보 한 마리가 보인다.


나무늘보 아줌마는 느릿느릿 냉장고로 다가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는 한참을 들여다본다.

분명히 뭘 꺼내려 했는데... 10초쯤 멍하니 서 있는다.

아, 달걀을 꺼내려 했었지.

달걀을 꺼내 찜기에 올린 뒤 과일바구니로 걸어간다.

이번에는 토마토 앞에서 망설인다.

세 개 중에 어느 것을 먹어야 할까?

하나하나 눌러보며 조금 더 부드럽게 익은 토마토를 집어든다.

이제 빵봉지를 연다.

가운데가 불룩한 프렌치 로프여서 슬라이스의 크기가 제각각이다.

어떤 조각을 꺼낼까 10초쯤, 아니 20초쯤 만지작거린다.

너무 작은 조각을 먹으면 점심 전에 분명히 군것질을 할 테고 큰 조각을 꺼내면 어제처럼 반은 버리게 될 텐데. 결국 비교적 작은 조각을 먹기로 한다.

그러고도 몇 번 더 우물쭈물하는 상황을 거쳐서 삶은 달걀 하나, 토마토 반 개, 토스트 한 조각, 커피 한 잔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 사이에 두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진짜 내가 나무늘보가 되었나 봐.


하루 15시간 넘게 자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나무늘보.

나무늘보를 일컫는 영어 단어 "Sloth"는 "태만, 나태"라는 뜻이다. "나무에 매달린 느림보" 정도의 느낌을 주는 우리말보다 도덕적 판단이 짙게 배인 단어이다. 하지만 나무늘보의 느린 행태는 성격이 아니라 생리적, 생태적 특성에 기인한다고 한다. 영양가가 낮은 나뭇잎이나 식물의 싹을 먹고살며, 소화 과정이 매우 느리고, 대사율이 매우 낮으니 어렵게 얻은 에너지를 최대한 아껴서 쓰려면 오래 자고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즉, 주어진 조건 하에서 생존에 최대한 유리하도록 행동하는 거니까 나무늘보의 "느림"은 사람의 "게으름"과 엄연히 다르다.


나무늘보 아줌마의 느린 행동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느리게 기어 다니다가 행동으로 이어지기 전에 길을 잃는 게 행동을 느리게 하는 가장 빈번한 원인이다. 달걀을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헤매다가 제자리를 찾아올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때로는 후회로 남은 과거의 수많은 선택들이 선택지로 떠올라서 간단한 결정을 내릴 때 주저하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토마토를 무심코 집으려는 순간, 예전에 곰팡이기 피어 토마토를 버린 일이 떠오르는 거다. 그러면 단단한 토마토보다 잘 익은 걸 무르기 전에 먹는 게 낫다는 생각에 토마토 고르는데 긴 시간을 쓰게 된다. 사람은 긍정적 경험보다 부정적 경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오래 기억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이 들수록 부정적인 선택지의 목록이 길어지고 그로인해 주저주저하는 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무늘보를 닮아가는 나의 모습이 흘끗흘끗 보일수록 시간은 점점 더 빨리 흐른다. 눈을 몇 번 끔뻑였을 뿐인데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다. 나무늘보도 잠에서 깨며 이렇게 생각할지 않을까?

"어, 잠깐 눈붙였는데 벌써 밤이네. 세월 참 빠르다."


생각해 보면, 느리게 살면서 세월을 빨리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무늘보들은 포식자들이 우글대는 정글에서 빠르게 도망치지 않고도 살아남는다. 느린 덕에 털에 이끼가 끼어 보호색이 되었고, 워낙 느리게 움직이니까 재빨리 움직이는 동물과 달리 포식자들의 눈길을 끌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도망치면서 살아남는 것보다 나무에 매달려서 살아남는 것이 더 열등한 건 아닐 거다.


아직 노년이라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언젠가 지금보다 더 느려진 노년의 삶을 살게 될 때, 해야 할 일에 떠밀려 정신없이 보내던 젊은 날만큼 소중히 여기면서 살고 싶다. 어쩌면 느린 덕분에 젊은 날보다 적은 실수를 하면서 살 수 있으니 빨리 내닫는 세월을 더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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