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캐런들
요즘 미국 미디어에는 '캐런'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딸과 함께 틱톡(TikTok)을 보다 보면 아이들이 캐런을 패러디해서 올린 포스팅이 많다.
"도대체 캐런이 누군데 이렇게 유명한 거니?"
"엄마, 캐런은 진짜 이름이 아니고 가게에서 별일 아닌 거 가지고 매니저 나오라고 그러고 멀쩡한 거 환불해 달라고 우겨대는 그런 아줌마야"
즉, 캐런은 '엄친아' '된장녀'처럼 어떤 문화적인 특질을 가진 사회의 인물 그룹을 나타내는 보통명사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설명을 종합하여 조금 더 자세히 표현하면, 캐런은 이런 사람이다.
주로 도시 교외의 중산층 거주 지역에 살고, SUV나 미니밴을 몰며, 아이들 교육에 열성적이다. 쇼핑을 자주 하지만 쇼핑을 즐기기보다 자신의 철저한 경제 욕구를 실현하는 데 관심이 더 많아서 구입한 지 석 달쯤 된 물건을 들고 가서 당당하게 반품을 요구한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되는 일에는 그 누구에게도 거침없이 항의한다. 캐런의 아이들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 비록 선생님이 정당하게 아이를 야단쳤다고 하더라도 그 선생님은 교장, 교육청까지 불려 갈 각오를 해야 한다. 캐런의 표정과 헤어스타일에는 '나와 얽히면 국물도 없다'는 태도가 드러난다.
https://www.insider.com/karen-meme-origin-the-history-of-calling-women-karen-white-2020-5
미국 생활 10년 남짓 동안 나도 캐런을 여럿 만난 것 같다. 슈퍼마켓의 좁은 통로에서 쇼핑 카트 두 대가 지나가려면 서로 비켜야 하지만 오만한 눈동자를 굳세게 내리깔고 마주오는 사람에게 비켜줄 시늉도 하지 않는 캐런, 자신은 주택가에서 역주행, 고속주행을 일삼으며, 자신의 길에 누가 끼어들면 곧바로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는 캐런, 자신의 뒤에 길게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랑곳없이 사소한 문제까지 다 따지는 캐런, 아시안이 말을 걸면 아예 못 들은 척하는 캐런, 서비스 직종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교관인 것처럼 위압적으로 고객을 대하는 캐런, 차선을 잘못 들어 직진 차선에 서있으면서도 직진 차량을 막고 꿋꿋하게 좌회전을 기다리는 캐런, 같은 학교 학부모에게 말 대신 손가락 하나로 까딱까딱해서 이리저리 지시하는 캐런.
픽사 애니메이션 <오버 더 헤지 (Over the Hedge)>에도 캐런에 해당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교외 신축 주택 단지의 입주자 협회 회장인 이 캐런은 이웃집 잔디가 조금 길게 자란 걸 보고 곧바로 전화하여 깎으라고 지적하고, 단지에 야생동물이 나타나자 방충 방제업자를 고용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잔인하게 없앨 것을 지시한다. 적대적인 성격과 외모, 사건의 배경 등을 종합하면 요즘 말하는 캐런에 딱 들어맞는 캐릭터이다. 한국에서 이 애니메이션을 봤을 때는 그냥 재미있게 보았는데 미국에서 살다 보니 매우 실감 나게 그려진 캐릭터임을 여러 번 실감하게 된다.
산호세 지역에서 살 때,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 듣기와 말하기를 가르치던 ESL 클래스 선생님 한 명이 기억난다. 실력 있고 열정적이었으나 선생님의 태도와 말은 꼭 집어내기 어려운 이유로 거슬릴 때가 많았다. 자기 딸이 고등학생인데 사립학교에 다니며 딸이 학교에 들어간 이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학부모회 회장을 맡았다고 했다. 덕분에 자기 딸을 매년 그 학년 선생님 가운데 가장 좋은 선생님 반에 넣을 수 있다고 자랑했다.
할로윈을 앞둔 어느 날, 수업시간에 할로윈 전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캐런 선생님은 켈트족의 오랜 전통인 핼러윈이 상업적인 장난으로 변해서 매우 아쉽다고 했다. 그리고 학생들을 무작위로 지적하여 "너는 할로윈 때 뭐할 거야?" 질문을 던졌고, 학생들이 무슨 대답을 해도 선생님은 야유하듯 "That's BORING(흥, 재미없어)."이라고 답했다. 나도 운 없이 걸렸고,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Safe Halloween(안전한 할로윈)" 개념의 행사를 해서 거기 갈 거라고 말했다. 캐런 선생님은 "그런 건 동양인들이 와서 전통을 변절시킨 거지 진짜 할로윈이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 아이는 미국 유치원에 다니거든요."
"너 어디 사는데?"
산호세 지역은 '짱깨 반, 카레 반'(짱깨 = 중국인, 카레 = 인도인)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동양인의 비율이 높은데, 그중에서 동양인들은 학군이 우수하고 출퇴근이 편리한 쿠퍼티노와 써니베일 지역에 모여 산다. 내가 이 동네에 산다고 대답하면, 그건 미국 유치원이 아니라고 묵살하려는 의도로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로스개토스 지역은 백인 비율이 80% 이상 되는 지역이었고, 딸은 집 앞에 있는 보수적인 루터교에서 운영하는 90% 이상이 백인인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로스개토스에 사는데요."
답변을 금방 찾지 못한 선생님은 학생들 괴롭히는 걸 멈추고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시간은 의문문의 억양을 연습할 때였다. 우리는 보통 의문사가 아닌 Is, Do 등으로 시작하는 의문문은 끝을 올려서 말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날 수업의 주제는 Is, Do 등으로 시작하지만 끝을 내려서 말하는 상황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Did you finish your homework?"을 말할 때 정말 숙제를 했는지 궁금한 경우 "숙제는 다 했어요?"하고 어미를 올려서 상냥하고 묻지만, 상대방이 숙제를 안 했다고 내심 가정하고 "숙제를 하기는 뭘 해"라는 뜻으로 말할 때는 어미를 묵직하게 내려서 말하는 연습이었다. 마지막 단어인 Homework에서 억양을 확 힘주어 낮추면 비아냥거림이 살짝 묻어나는 톤으로 들린다. 형사가 취조실에서 거짓 알리바이를 대는 용의자를 심문하는 상황을 떠올리면 분위기가 쉽게 상상될 것 같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 평범한 문장을 수없이 시범 보이고 학생들에게 따라 하게 했지만 학생들은 아무도 그 문장을 실감 나게 말하지 못했다. 끝을 내리면 된다고 계속 강조하는 선생님한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We don't have THAT attitud(우리는 그렇게 목에 힘들어 간 사람들이 아니에요)"
아, 그렇군. 남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 말을 쓰고 사는 학생들에게는 영어를 쓰는 상대방에게 오만하게 말할 수 있는 태도가 없으니까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거였군. 선생님은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띠고 진짜 그 말이 맞다며 짧고 강하게 동의했다.
그래서인지 동양인이 많은 지역에서도 동양인 캐런은 없다. 상점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환불해 달라고 으름장을 놓고, 음식점에서 지배인 불러 세우고 야단치고, 교장실을 들락날락하면서 학사에 간섭하려면 이런 오만함이 필요한 거였다. "갑질"을 하려면 내가 "갑"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 먼저이다.
2020년 캐런은 다소 정치적인 면모를 보이며 진화하여서, 모두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요즘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당당하게 거리를 누비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목소리가 높아지는 요즘도 꿋꿋하게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All Lives Matter)"를 고집한다. 최근에는 한 캐런이 조깅하다가 담벼락에 인종차별 반대 슬로건을 쓰고 있는 동양인을 보고 담벼락에 낙서를 하여 동네 경관을 망치고 있다면서 비난했다. 동양인은 자기 집 벽이므로 문제없다고 했다. 캐런은 물러서지 않고 경찰을 불렀지만, 이 담벼락이 이 동양인 소유임이 확인하고 동양인은 사과를 받았다.
어찌 생각하면 캐런은 자기주장을 똑 부러지게 하는 강한 여성들이며, 드센 여자를 터부시 하는 사회가 만들어 내는 마녀사냥의 반복일 수도 있다. 캐런과 부딪치면 기분이 상하니까 거리는 두지만 나서서 비난할 마음도 없다. 연약함이 미덕인 여성성과 강한 어머니의 역할을 요구하는 모성성 사이에는 모순이 내재하고 여성은 이 상반된 요구 사이에서 끊임없는 혼란을 겪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도 캐런을 떠올리면 여전히 역겹다. 동양인으로서 그들에게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어 불쾌하기도 하지만, 더 큰 원인은 그들의 행동 기저에 자리 잡은 절대적인 이기성에 대한 메스꺼움인 것 같다.
오래전 길창덕 화백님의 순악질 여사가 떠오른다. 순악질 여사는 개그우먼 김미화의 연기로 재연되기도 했었다. 순악질 여사는 남편을 쥐락펴락하고 이웃의 부당한 처사는 용납하지 않는 무대뽀 아줌마이다. 드세고 막무가내라는 면에서 순악질 여자와 캐런은 분명히 닮았지만, 순악질 여사는 역겹기는커녕 친근하다. (다음에 계속)
Title image: DreamWor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