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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Jan 22. 2021

세어보지 않으면 사라지고 마는

은총을 기록하게 된 이야기

#1

2018년 11월. TV를 보기 시작했다. TV를 틀어놓으면 집중해서 보지 않더라도 시간을 보내기 훨씬 수월하다고 사람들이 추천해 주었다. 그때 <알쓸신잡>도 보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도 봤다. 입담 좋은 패널의 이야기와 함께, 선남선녀가 몽환적인 공간에서 펼치는 이야기와 함께 시간은 술술 흘러갔다. 당시 가장 핫하다는 드라마 중에 <손 더 게스트>가 있었다. 무서운 영화나 책에는 근처에도 못 가는 편인데 이 드라마는 어쩐지 제목부터 끌려서 틀게 되었다. 동해 바다가 나오는 첫 장면. 한 여인이 길에 서서 전단지를 돌린다. 여인의 표정은 절박해 보인다. 휴가를 즐기는 젊은이들 몇몇은 전단지를 받아 들고, 몇몇은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여인의 마음에 어두움이 찾아온다. 초라하게 짓밟힌 여인의 절박한 마음에 생긴 그 어두움을 타고 손이 찾아온다. 다음 장면, 바닷가에 모여 앉아 떠들썩하게 여흥을 즐기고 있는 젊은이들을 향해 칼 든 여인이 다가온다. 젊은이들을 무차별하게 찔러댄다.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지금 내 마음은 슬픔보다 더 무섭게 슬프고, 어둠보다 더 검은 어둠일 텐데, 지금 나에게 손이 찾아오면, 그러면 어떡하지? 그 장면 뒤에 몇 장면 더 흘렀지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TV를 끄고 벌렁대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멍한 마음은 얼마간 방황하다가 그늘 진 숲에서 자라는 버섯을 떠올렸다. 썩은 흙에서, 죽은 나무에서, 햇볕을 흠뻑 받지 못하는 그늘에서 버섯이 자란다. 독버섯도 자라고, 향기 그윽한 송이버섯도 자라고. 땅에서 같은 걸 먹고 버섯은 다른 걸 만든다. 버섯이 인생이라면, 인생에 일어난 경험에 따라 세상을 향해 생산물을 내놓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 결코 독버섯이 되지 말게 해 달라고, 썩은 양분에서 향내를 만드는 버섯처럼, 나의 아픔이 향기로 승화되기를 기도했다.


#2

어둠 속에서 내가 받은 온정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감사의 글을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 저장했다, 다시 꺼내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도 한 편도 제대로 끝맺지 못한 건, 적을 만한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커서 나의 글솜씨로 표현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여행에서 받은 감동을 놓칠까 봐 기록해두는 걸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내게 베푼 온정과 은총이 내 기억 사이로 빠져나가서 망각의 틈새에 끼일까 봐 두려웠다.


열 일 제치고 달려와 준 모든 분들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

곧바로 달려와 지금까지도 마음의 위로가 되는 말씀을 주신 목사님

죽은 아이가 쓰던 옆방에서 함께 밤을 지켜주신 모든 분들

슬픈 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정성스레 보내주신 모든 분들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함께 뜨개질을 해주신 책을 빌려주시고 TV 프로그램을 추천해주신 모든 분들

아들의 사진을 보내주시며 함께 추모해주신 모든 분들

위로의 카드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

간편 음식이 가득 든 쇼핑백이나 화분을 두고 간 분들

아들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그려주신 분

졸업은 못했지만 졸업앨범에 따로 페이지를 마련하여 실어주겠다고, 졸업장을 주겠다고 제안한 분들

납골당을 대신 알아봐 주시고, 함께 보러 다녀주신 모든 분들

장례사 선정부터 장례식 일정과 음식 모든 절차를 맡아서 처리해 주신 분들

장례식에 꽃과 음식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

장례식에서 가족보다 더 슬픈 울음으로 함께 슬퍼해주신 분들

아무에게도 풀지 못했던 자신의 상처를 내게 보여주며 위로해주신 분들

2주기가 되도록 그날을 기억해 주시는 모든 분들

지친 나 대신 항의할 것, 따질 것, 처리할 것 모두 도맡아서 해준 분들

바쁜 생활 중에도 함께 밥 먹고, 차 마실 시간을 내어주시는 모든 분들

딸의 통학과 배구를 비롯한 괴와 활동 운전을 수개월 동안 맡아주신 분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 달라고 연락처를 보낸 얼굴 모르는 분들.

엉엉 우는 나에게 어깨를 내어주신 모든 분들


여기 적은 것보다 난 훨씬 많은 도움을 받았고, 훨씬 큰 은총을 입었다. 은총은 세면 셀수록 커지고, 적으면 적을수록 목록이 길어지는 것 같다.


#3

며칠 전 <손 더 게스트>를 다시 틀었다. 내가 그때 왜 TV를 꺼버렸는지 첫 편을 얼추 다 봤을 때 기억이 났다. 내가 마음의 어둠에 질겁했던 순간이. 하루에 4~5편씩 정주행 하여 전 편을 다 보았다. 억울하고, 슬픔을 겪고, 고통을 당한 이들이 손에게 영혼을 빼앗기는 것은 부당하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진실이 아닐지.


#4

먼 옛날 의녀와 무녀와 마녀는 모두 같은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평범한 삶을 살기 어려운 아픔을 겪은 여자들. 그 여자들이 겪은 아픔이 여자들이 달이는 약초에 스며들여 병든 이와 산고를 겪는 이와 마음이 지친 이들을 달래주지 않았을까? 모든 약에 들어가는 건 감초가 아니라 그들 인생에 찾아온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아픔이 다른 인생을 향한 표독한 저주가 되지 않고 다른 아픔을 달래고 치료하는 데 쓰였다면 그걸로 된 일이다.


#5

축복은, 감사는 세어보지 않으면 날아가 버린다. 다시 열심히 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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