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 가훈이라고 했다. 한자로 썼을 때 글자가 아름답고 보기 좋다. 무엇보다 기독교적인 정언 명령의 성격도 지니는, 두루두루 번듯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가훈 전시회를 하면 아빠가 멋진 붓글씨로 써주셔서 나는 매우 뿌듯했다. 나의 부모님의 삶에는 뜻이 바르고 좋은 이 구절이 매우 선명한 북극성이라는 것이 삶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너무 선명해서 문제라고 느끼기도 했지만. 그런데 내 마음은 배배 꼬여서 그랬는지 자랄수록 이 말이 와닿지 않았다. 번듯하고 옳은 말이지만 내 이성이 자라는 만큼 이 말의 뜻은 더욱 아득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출렁대는 마음을 다독이고 삶의 방향으로 돌이킬 수 있는 계기는 내가 누군가에게, 이 세상에서 아직은, 지금은 쓸모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돌봐야 하는 아이가 있지. 쓸모가 있으니 살자.
난 누구보다 부지런히 세 끼 밥을 잘 챙겨주니까 밥값은 하고 사는 것 같아.
가족 모두 방치하는 화초에 물을 주어 화초가 건강을 되찾고 새잎을 틔울 때도 나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는 계기로 삼았을지 모르겠다.
너를 무엇에 쓰면 좋겠니? 누가 묻을 때 몇 가지 나의 용도를 떠올릴 수 있는 한, 나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한 삶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을 털어놓자면 나는 가정을 넘어서는 사회 단위에서도 내가 가진 작은 자원들을 나누는 걸 좋아했다. 주일학교에서 교사가 부족할 때 아이들을 맡아주기도 하고, 소모임에 우리 집을 개방하기도 하고, 반주가 필요한 모임에서 요청하면 시간을 내어 반주를 하러 갔고, 지역 봉사 모임이 생겼을 때는 뉴스레터를 만들어주거나 모금을 하러 다니거나 행사에서 물건을 팔거나 그런 자잘한 도움을 주었다. 나의 쓸모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일은 아니지만 내가 이런 일을 즐거워하는 걸 보면 이 일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컸던 것 같다.
내 인생의 A.D. 이후 어려워진 대목이다. 큰 아픔을 가진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까? 그들의 행운을 감사하고 이야기하기에 내 눈치가 보이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아픔을 겪은 사람이 곁에 오면 나의 그늘이 무겁게 드리우지 않을까? 나의 도움을 받기보다 그들이 나를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을까? 아직 그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고 꿋꿋하게 머리를 들이밀 용기가 없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이 내가 알았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하다는 걸 알면서도 따뜻한 그들의 마음을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만들지 않고 싶은 부분도 있다. 그날 이후 손상된 존재의 새로운 용도는 없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쩌면 이것은 인조물을 기준으로 하는 생각일지 모른다. 사람이 만든 세상의 모든 물건은 적어도 만들어질 때 용도가 있어서 만든 거니까. 컵이나 의자처럼 누구나 용도를 알고 사용할 줄 아는 물건도 있고, 밥솥이나 냉장고처럼 용도는 대체로 알고 있지만 탑재된 기능을 알뜰히 사용하려면 사용 설명서를 꼼꼼히 읽어야 하는 물건도 있다. 요즘은 커피포트처럼 간단한 물건에도 사용 설명서가 친절하게 따라온다. 자연물에는 이런 용도가 덜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자연물은 생존이 존재의 이유인 것 같다. 이런 질문은 두뇌가 오동작하는 사람만 고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만든 존재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갓 태어난 사람에 탑재된 유전자가 이 사람을 어떻게 프로그램해 놓았는지 도통 알 수 없으니까. 그 사람이 태어난 집안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인지, 그 집안이 속한 사회 경제적 환경에 적합한 성향을 가졌는지도 모르고, 인생은 설명 한 줄 없이 툭 던져지다니.
그 아이도 이런 고민을 했겠지. 이제 3년 반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