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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Sep 09. 2020

포도잎 서리

이웃집 마당 덕분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이지만 우리가 사는 동네는 주택 간 간격이 좁은 편이다. 트랙 홈이라고 불리는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주택단지라서 그렇다. 한국 아파트들이 33평형 A, B, 45평형 A, B 이런 식으로 조성되어 있는 것처럼 미국 트랙 홈들도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플랜 A, B, C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런 골목에 들어서면 플랜 A, B, C 주택들이 규칙을 찾기 어려운 수열처럼 단순한 리듬과 변화를 반복하며 들어서 있다.


겉에서 보면 앞마당을 모두 다르게 꾸며놓아서 골목의 모든 집들이 세 개의 평면으로 구분되는지 알기 어렵다. 앞마당 잔디와 조경에 엄청난 투자를 한 집도 있고, 집주인이 직접 소담스러운 정원을 가꾸는 집도 있다. 물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집도 있다. 마당과 뒷마당은 관리의 성격이 좀 다르다. 뒷마당은 주로 바비큐 시설과 야외 식탁을 두어 즐기는 공간인 반면 앞마당은 집의 얼굴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미국에서 좋은 동네를 구분하는 손쉬운 요령 중 하나가 그 동네 잔디 관리 상태라는 말도 있다. 그래서 "먹지도 못하는" 잔디에 비싼 물을 주어 키운다.


우리도 수도요금 좀 아끼고 싶어서 물을 덜 주고 싶은데 이틀만 거르면 금방 누렇게 되어 그럴 수가 없다. 동네에서 집값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는 집으로 밉보이기 싫어서다. 저렴한 가드너 서비스를 이용하다 보니 잔디 깎고 대충 자잘한 가지치기는 하지만 죽은 잔디를 살리는 노력은 결국 우리 몫이다. 한 번은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다가 왼쪽 옆집과 처음으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남편과 옆집 아저씨가 예전에 같은 직장에서 일해 안면이 있었다. 덕분에 잔디 구멍을 뚫는 도구를 빌려주었다. 잔디에는 군데군데 구멍을 뚫어서 공기를 넣어주어야 잘 자란다.


우리 왼쪽 옆집은 앞마당에 잔디도 있지만 주로 "먹을 것" 기르기에 더 주력한다. 여기에 시큼한 시골 냄새를 풍기는 거름도 주기적으로 잊지 않고 준다. 집 앞쪽에는 청경채를 탐스럽게 길러서 지나다닐 때마다 침이 고인다. 뒷마당에는 비파나무가 있어서 늦봄에 열매가 조록조록 열렸다. 우리 마당에 몇 알 떨어졌을 때, 우리 강아지들이 잽싸게 주워 먹었다. 그리고 두 집을 가르는 담벼락 옆에는 포도를 잔뜩 심었다.


포도 넝쿨이 담장을 넘어오는 모습은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가느다란 넝쿨손이 담장 위로 넘어왔나 싶으면 금세 잎사귀를 주렁주렁 단 줄기로 변해 있다. 이쪽 넘어온 줄기는 어느 정도 자라면 우리 집에 오는 가드너들이 마당을 청소하면서 모조리 잘라버린다. 싱그러운 포도 넝쿨이 보기 좋아서 예쁘게 자랐을 때 얼른 사진 찍어 놓았다가 얼마 전에 그려보았다.


살겠다고 넘어온 덩굴을 자르는 게 아깝기도 했다. 어차피 자르는 포도 넝쿨인데 혹시 잎을 먹을 수 있나 해서 찾아봤다. 그랬더니 지중해와 터키 쪽에서는 연잎밥처럼 포도잎 안에 만두 속 비슷한 것을 채워 넣어서 쪄서 먹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포도잎으로 장아찌를 만들기도 하는 것 같았다. 짭조름한 장아찌에 삼겹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담장을 넘어온 덩굴 두 개를 잘랐다. 보기에는 여릴 것 같은데 잘라서 만져보니 심지가 상당히 질겼다. 연한 잎만 따서 장아찌 간장을 부었다.

깻잎과 같은 향은 없지만 다른 나물 장아찌와 비슷한 맛이 나서 삼겹살과 잘 어울린다. 저 그림에 나오는 포도잎은 버려지는 대신 맛있는 장아찌로 우리 식탁에 올랐다. 옆집 포도는 담장을 타고 지금도 계속 넘어오지만 이제는 누런 점이 듬성듬성한 철 지난 늙은 잎이다. 담장 넘어온 포도잎으로 장아찌를 담가 먹었다는 건 옆집에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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