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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Sep 16. 2020

그리는 행위의 매력

초보자의 변

일주일에 한 번 수채화를 배운지는 두세 달 정도 되었다. 너덧 명의 주부들이 줌(Zoom)으로 두 시간 동안 수다를 적당히 가미하여 그림을 배운다. 선생님도 비슷한 연배의 청소년 자녀를 둔 주부이다. 아, 오리 엄마이기도 하다. 예전에 업둥이 오리 알에서 태어난 오리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바로 그 오리 엄마이다. 학생 주부들은 매 수업보다 서로서로, 그리고 선생님에게 칭찬을 듬뿍 들으면서 두 시간 동안 수다와 그림 삼매경에 빠진다. 그런 칭찬으로 고래보다 무거운 중년의 아줌마가 그림에 푹 빠져버렸다. 요 며칠은 일주일을 못 기다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혼자 그림을 그리곤 한다. 칭찬 덕분에 시작했지만 그리면서 나름 발견하는 그림의 매력도 사뭇 크다.


그림을 시작하고 새삼 눈을 뜬 것은 빛의 농간이다. 초록임을 의심치 않았던 이파리에 빛이 비칠 때 이파리는 더 이상 초록이 아니다. 이파리 위에 나뭇가지가 드리워 빛을 막아도 이파리는 초록이 아니다. 이파리뿐일까? 커피잔이나 꽃병, 책상, 벽, 바닥, 어느 것 하나 빛을 떠나서 제 색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기독교에서 태초에 가장 먼저 존재한 것이 빛이며, 그 빛이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따뜻하고 밝은 빛을 주어 생물을 소생하게 하는 자연계 현상뿐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도 빛과 무관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림 그리는 횟수가 늘면서 빛, 그리고 빛이 바꾸어 놓는 사물의 색에 점점 매료되고 있다.


또 하나는 사물의 절대 사실과 나의 주관적 이해 간의 교류이다. 아직 모사 단계이지만 가끔 그림 대신 좋아하는 사진이나 사물을 보면서 그리는데 보이는 실재보다 더 아름답게, 혹은 나의 주관적인 마음을 투영하여 그리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럴 때마다 더욱 사실에 집착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언젠가 선생님이 그림은 거짓말을 잘해야 한다고 했는데, 앞뒤가 맞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려면 그리려는 사물의 사실적 속성을 더욱 정확히 이해하고 그릴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빛을 관찰하고, 영어의 냉정한 진실(Cold hard facts)에 해당하는 사물을 그대로 보는 연습과 거기에 물감과 붓을 통해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열중하는 시간. 언제 시들해질지 모르지만 지금은 가슴이 뻐근하도록 재미있다.


지난번 글도 이번 글도 어설픈 생각을 성숙시키는 수고 없이 화두만 적는다. 나중에 담그려고 절여놓은 배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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